5.18 시민군, 그 기원과 왜곡 바로잡기

5.18구속부상자회 전 회장 문흥식씨(61)를 둘러싼 광주 학동 재개발 건물붕괴 참사 비리 의혹과 5.18 공법단체 구성의 파행을 두고 논란이 꼬리를 물고 있다.

문흥식씨는 전임 양희승 회장이 10년 넘어 장기 재임하면서 회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온갖 비리에 휘말리는 등 손가락질을 받자, 이를 비판해오던 반대 진영의 지원을 얻어 2019년 12월에 5.18 구속부상자회 회장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비리의 온상으로 지탄 받아온 양희승 씨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문흥식 전 5.18구속부상자회장. 문씨는 지난달 9일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광주 동구 학동3구역 재개발 철거건물 붕괴 참사 원인으로 '정관계 검은 카르텔'과 몸통으로 문씨가 지목돼자 지난달 13일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다.
문흥식 전 5.18구속부상자회장. 문씨는 지난달 9일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광주 동구 학동4구역 재개발 철거건물 붕괴 참사 원인으로 '정관계 검은 카르텔'과 몸통으로 주목을 받자 지난달 13일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다.

전임 회장 양희승씨를 비롯한 집행부는 전남도 중고 대학생 등 10여 명에 지급한 인재육성장학금 150만원 가운데 70만원을 강제 편취하고 회원들에게 상이 등급을 올려주겠다고 속여 200만~300만 원 착복한 사실들이 회원들에 의하여 밝혀져 불신임을 받는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상무골프연습장 매점 자판기 관리운영권 특정인에 위탁해 그 대가로 금품을 12년간 수수했고, 5·18자유공원에서 개최한 한마음음악회와 도청광장에서 개최한 부활제 행사 때 행사비용을 부풀려 수년간 국가보조금을 횡령했다는 점 등도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동안 사단법인은 5.18구속부상자회는 자체 감사가 있었고, 보훈처 감사도 받았지만 제대로 된 감사가 이뤄지지 못해 무려 12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하면서 회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문흥식씨는 회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갖가지 특혜를 집행부 몇 사람만이 독식해온 양희승 체제를 비판하면서, 남다른 조직력을 동원하여 단시간에 양희승 회장 체제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는 회장 취임과 함께 광주 시민사회에 갖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그 자신이 이전까지 무명의 5.18 관련자 처지였음을 의식한 듯, 광주 운동권 인사들이 모인 한 단체 간부들과 자주 회합을 가지면서 이 단체 주요 멤버들의 환심을 샀다.

또한 양희승 체제에서 활동한 Y모씨 등 대학 운동권 출신들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여 이른 시간에 이른바 말깨나 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 비리의 연쇄 고리 이어지는 5.18 단체, 그 원인은?

지난달 9일 광주 학동 3구역 재개발 철거건물 붕괴로 시내버스 탑승자 중 9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당했다. 당시 무너진 건물에 처참하게 부서진 시내버스. ⓒ예제하
지난달 9일 광주 학동 3구역 재개발 철거건물 붕괴로 시내버스 탑승자 중 9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당했다. 당시 무너진 건물에 처참하게 부서진 시내버스. ⓒ예제하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갖가지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취임 초기 광주의 조직폭력 가운데 하나인 신양오비파 부두목의 경력을 가진데다, 5.18 유공자 선정 경위를 두고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문씨는 주변인들에게 “시위하는 것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계엄군에게 끌려가 구타 등을 당했다”고 자신이 유공자가 된 경위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유공자가 된 경위가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2004년과 2006년 5차, 6차 보상심의에 신청했다가 탈락한 뒤 7차에서야 지인들의 도장을 받아 5.18 관련 활동 증거로 제출하는 이른바 ‘인우 보증’ 방식으로 유공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일은 이후 그의 처신이 올바랐다면 묻혔을 것이지만, 그는 조선대 운동권 출신 양희승씨가 저지른 일은 우습게 보일 만큼 갖가지 대형 비리에 휘말리면서 5.18 관련자들은 물론 시민사회의 불신을 자초했다.

6개월 전쯤에는 구속부상자회의 자립을 도모한다면서 폐쇄된 경찰 파출소 등을 싼값에 불하받아 재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하다 특혜 시비와 함께 관과의 결탁 의혹에 휩싸였다.

지난해 말 국회는 가까스로 5.18 관련법을 개정하여 그동안 임의단체로 각각 운영해온 5.18 단체(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가 국가보훈처 산하 공법단체로 출범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자 문씨는 부상자회는 물론 유공자회 준비위를 자신의 수족 등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차후 임원 선거도 간선으로 하도록 하는 등의 전횡을 저질렀다.

학동 참사 당시 17명 사상자들이 탑승했던 시내버스. ⓒ예제하
광주 학동 참사 당시 17명 사상자들이 탑승했던 시내버스. ⓒ예제하

장차 구성될 공법단체의 경우 먼저 수십억 원의 국가 지원금이 우선 배정되고, 전국 자치권역별로 지회와 지부가 구성되면 해당 지역 책임자와 사무 책임자 등은 월 기백만원의 고정급을 받게 된다고 한다.

이걸 노린 몇몇 사람들이 문씨 주위에 몰려들었고, 이들은 회원들의 총의와는 관계없이 이른바 논공행상식으로 미리 감투를 나눠 갖기로 약조하는 등 실로 일신의 안일은 돌보지 않은 채 온몸을 던져 군부독재 타도를 외쳤던 5·18 정신은 물론, 민주 시민 조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추태를 연출했다.

또한, 이번 광주 학동 5층 건물 붕괴 사고가 벌어지면서 철거는 물론 광주 도심 재개발 사업에 문흥식씨 등이 깊게 관여한 혐의로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오르는 등 새로운 비리들이 속속 불거졌다.

그는 2007년 재개발·재건축 대행업체인 미래로개발을 차려 각종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관여하고 이권을 챙겨왔다는 의혹을 받았다.

붕괴 참사가 발생한 학동4구역 재개발 사업에도 깊숙이 관여해 업체 선정 과정에 압력을 행사한 정황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는 문제의 미래로개발 대표직에 자신의 부인을 대신 앉혀 놓고, 자신에 대한 의혹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 13일 돌연 미국으로 도피해 인터폴의 수배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 5.18의 주역, 지역 조폭들 활약의 의미 되새길 때

1980년 당시 실제 5.18과 관련 없이 예비검속 등으로 체포된 경력을 가졌을 뿐인 양희승 전 구속부상자회 회장은 현장과 유리된 사람이라는 비판에 시달려 왔다.

광주 학동참사 합동분향소. ⓒ예제하
광주 학동참사 합동분향소. ⓒ예제하

그런 가운데 문흥식씨는 이 같은 현장 유리의 허허로움을 상쇄하고, 직업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해 온 5.18 시민군 등 저변에 있는 5.18 관련자들의 어려움을 신원해 주리라는 기대를 모은 바 있다.

5월 18일 전남대 교문에서 학생들을 집결시켜 당일 10시 반경 금남로 진출하여 진압 경찰 및 계엄군과 대치하여 싸우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5.18의 전 과정에 참여한 나로서는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이른바 주먹(지역 조폭)들과 택시 운전사, 버스 운전자 등 사회 저변의 시민들이 해방구를 이루고 지키는 데 얼마나 큰 역량을 발휘했는가를 생생하게 목격한 바 있다.

5월 21일 금남로 일대를 꽉 메운 시민들의 거대한 파도에도 물러가지 않던 계엄군이 철수한 데는 택시와 버스 운수 노동자들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애마처럼 아끼던 자신들의 차를 몰고 계엄군의 총탄을 뚫고 나아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계엄군은 연약한 시민들만 통제하면 된다고 여겼다가, 자신들의 차를 몰고 이무기같이 끝없이 긴 행렬을 이룬 채 돌진하는 차랑 시위대의 위용에 놀라 주춤하며 물러섰다.

하지만 보다 큰 것은 자발적으로 구성된 시민군의 대응 사격이었다. 시민군이 사용한 무기라야 대부분 당시 예비군 훈련시 사용하던 낡은 카빈 소총이었다.

이것은 6.25 때 우리 국군이 사용하다가 군에 자동소총인 M16이 주무기로 보급되면서, 성한 것들을 골라 예비군 훈련용이며 경찰 방호용으로 남긴 것들이었다.

하지만 총기의 개인 소지가 금지된 우리나라에서 예비군 무기고, 파출소 무기고 등을 털어 총기를 탈취한다는 것은 실로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이 최후까지 항전했던 옛 전남도청. ⓒ광주인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이 최후까지 항전했던 옛 전남도청. ⓒ광주인

1980년 5월 20일까지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포함한 지역 주민들을 무차별 사격하여 억울한 죽음들이 양산되는 걸 본 화순과 송정리, 나주 등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던 지역 건달들, 부랑인들은 화순 탄광 예비군 대대 등에 영치중인 총기를 털어 무장하기로 결의한다.

이들을 가리켜 건달이나 지역 조폭 등으로 멍에를 씌우기 십상이지만, 실은 이들은 처음부터 건달이 되기보다 빈약한 학력, 직업 기회의 박탈 등 사회적 소외에 따라 지역 건달로 편입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일용직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지역 부랑인들도 위기를 느낀 나머지 무기를 탈취하여, 자발적으로 시민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해방구로 가는 길을 마지막으로 활짝 연 것은 이들 지역 건달, 부랑인 및 스무 살 전후의 의협심 강한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의 발포가 공식화되고 시민들이 무차별 사격에 노출되자 자위 차원에서 금남로 4가 한국은행 등에서 도청을 에워싼 계엄군을 향해 총격으로 응사하여 시민군의 대오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었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무장한 시민군. 영화 '김군'의 주인공. ⓒ5.18기념재단

시민군이 발포를 시작하자 계엄군은 심상치 않은 민심의 변화를 실감했다. 그리고 저녁 6시 즈음이 되어 몰려오는 땅거미에 숨어서 도청 안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담양 쪽 광주교도소, 화순 너릿재, 송정리로 통하는 화정동 고개 너머로 철수하였다.

광주 시민의 승리였다. 이로써 일주일간의 해방구가 이루어졌지만, 하지만 이는 시민군의 전면적인 승리라기보다는 계엄군의 작전상 철수했다는 분석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상당 부분 설득력을 띄고 있다.

이후 이들 지역 조폭들이 주축을 이룬 시민군은 젊은 학생들, 노동자들을 대거 흡수하여 해방구를 이루고 27일까지 1주일 동안 민주 세상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실로 한국 현대시상 국민의 힘으로 자급자족하면서, 치안 경찰이 부재한 상황에서 전무후무한 민중 해방구를 꾸려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5.18 이후 시민군의 소외와 차별

5.18기념재단. ⓒ광주인
5.18기념재단. ⓒ광주인

하지만 이 같은 지역 조폭, 시민 노동자들의 활약은 이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5.18 광주민중항쟁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후 5.18 투사 출신 국회의원 정상용, 김종배 씨 등이 나오기는 했지만 모두 학생운동권 출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 5.18 기념재단이 설립되는 등 시민단체와 5.18 진상조사위원회 등이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지식인 및 학생 운동권 출신들이 자리를 독점했을 뿐 실제 5.18 민중항젱의 주축을 이룬 지역 건달 출신자, 노동자 등 저변 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현재 취업 기회가 원천 봉쇄되고 사회적 무관심과 고질적인 빈곤 등으로 인하여 자살을 택한 5.18 시민군 출신을 비롯한 5.18 관련자들이 150여 명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필자가 보기에는 조폭 출신 문흥식의 5.18 구속부상자회 회장 진출 배후에는 이 같은 5.18 수습 과정의 난맥상이 숨어 있다고 본다.

그가 회장이 된 후에 더욱 비리에 눈독을 들이고 패거리 중심으로 단체를 끌고 간 데는 아쉬움이 크지만, 그에 대한 단죄 못지않게 우리 사회가 껴안아야 할 숙제들도 만만치 않다고 본다.

실제로 최근 들어 각종 5.18 단체들에게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던 시민군 출신들이 대거 등장하고, 실제로 문흥식 주변 인사들 가운데 저변의 시민군 출신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이를 잘 말해준다.

5.18 깊은 상처 감싸고 소외계층 감싸야

1980년 5월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 ⓒ5.18기념재단 누리집 갈무리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 ⓒ5.18기념재단 누리집 갈무리

문흥식은 광주 학동 건물 철거 비리가 시작되기 직전 미국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면서 짤막한 사과의 변과 함께 구속부상자회 회장 사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면서도 <YTN>과의 전화 통화에서 관련 의혹을 울먹이면서 부정하며 조용해지면 귀국하겠다고 하였다니 참으로 후안무치한 친구다.

그보다 더욱 아쉬운 것은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사퇴하고 사무실이 압수수색되는 가운데서도 부회장을 비롯한 집행진 누구 하나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차제에 철저한 반성을 거쳐 거듭나야 할 조직의 모습치고는 너무 초라하고 궁색하다. 우리는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5.18 초심으로 돌아가 5.18 관련 단체들이 거듭나기를 바란다.

아울러 5.18 당시의 시민군, 저변 소외층들이 주축이 된 최근 구속부상자회, 공법단체 임원 선점 문제는 우리 사회가 축적해온 엘리트 위주, 특정 세력 중심의 조직 장악 풍토가 빚은 산물임을 직시하고, 그동안 지속적으로 5.18 관련 단체, 5.18 기념재단, 그리고 심지어 5.18 진상조사위를 장악해온 지식인 출신, 특히 5.18과 무관하면서도 유공자의 탈을 쓴 채 자리 차지하기를 고집해온 인사들은 자리에서 깨끗이 물러나야 할 것이다.

5.18유족회, 5.18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 대표들이 지난 1월 7일 광주광역시의회 1층 시민소통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5.18유족회, 5.18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 대표들이 지난 1월 7일 광주광역시의회 1층 시민소통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명정대하고 민주적인 5.18공법단체 구성과 공법단체 구성원에서 누락된 유족회의 형제자매가 추가될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에 공동으로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왼편부터 문흥식 5.18구속부상자회장, 김영훈 5.18유족회장, 김이종 5.18부상자회장. ⓒ5.18구속부상자회 제공

이것은 최근 5.18 비리 척결을 주장하며 상무지구 5.18기념문화센터 앞에서 천막농성을 100일 넘게 지속해온 구속부상자회 비리 척결 모임 참여자들이 광주의 한 민주단체 소속 인사들을 향해 "당신들은 광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도 이 일환이다.

5.18 당시 해방구의 주축을 이룬 지역 건달이며 부랑아 들은 때로 주먹을 수단으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사회적 소외, 직업 기회의 박탈 등에 따라 형성된 집단이었다.

이들은 때로 약자를 돕는 편이 서기도 했고, 직업 훈련 등을 거쳐 새롭게 사회에 편입되는 선순환의 구조 속에 있었다. 오늘처럼 약자들 위에 군림하고, 일하지 않으면서 지방 행정부, 정치권 인사에 결탁하여 각종 이권에 거머리처럼 기생하는 조폭과는 거리가 멀다.

전두환 군부도 5.18을 통해 나타난 지역 건달의 사회 변혁 욕구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목적으로 이른바 ‘삼청 교육대’를 만들어 살아있는 정신을 가진 지역 젊은이들을 대거 구금, 격려하는 데 나서기도 했다.

'삼청교육대', 즉 ‘맑게 하는 교육부대’를 만들어 사회를 정화하겠다는 구호는 구두선이었을 뿐, 당시 전두환 군부 쿠데타에 실제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을 발본색원하려는 의도에서 급조된 진보 세력 탄압 도구였다.

이제 우리는 분명한 잣대로 5.18 시민군의 주축을 이룬 지역 건달, 부랑아. 지역 출신 젊은 청년들과 이권 개입, 잔인한 폭력, 사욕 추구로 똘똘 뭉쳐진 조폭들과 분명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

5.18 시민군 출신자들이 그동안 정권의 감시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 직업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 당한 채 우리 사회의 하층민으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옛 5.18망월묘지(현 민족민주열사묘역). ⓒ광주인 자료사진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옛 5.18망월묘지(현 민족민주열사묘역). ⓒ광주인 자료사진

지금이라도 이들 잊혀진 시민군들이 우리 사회의 건전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특별할 노후 대책 없이 살아온 이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연금 등을 지급함은 물론,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직업 기회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제 구두선으로 5.18정신을 외칠 것이 아니라, 5.18을 자신의 경력 포장이나 출세 발판으로 삼은 인사들이 물러남은 물론, 지역 건달, 밑바닥 노동자, 소외된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시민군의 슬픔과 어려움을 떠안는 범사회적 대책이 하루빨리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문흥식으로 상징되는 추한 5.18 유공자의 모습을 불식되고, 고질적인 소외와 기회의 박탈로 인해 시민군 출신들은 건강한 시민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박몽구 시인은 5.18 구속부상자회 회원. 전남대 영문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77년 월간 『대화』지로 등단하여, 『칼국수 이어폰』, 『황학동 키드의 환생』, 『단단한 허공』 등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한국크리스찬문학상 대상 수상. 계간 《시와문화》 주간. (재)한국출판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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