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었다. 온종일 지루하게 내린 비로 우울하다.
‘함평 5.18은 어떻게 왜곡되었는가?’를 접하는 순간 음산한 이끼가 가슴에 싸~하니 깔린다.

일제 앞잡이가 독립투사가 되고, 독립군 토벌대가 애국자가 된 슬프고 추악한 지난 역사의 기시감이 슬쩍슬쩍 스친다.

5.18 광주항쟁은 돈과 명예와 권력의 젖줄이 아니다. 광주의 자유와 인권과 정의를 지키기 위한 피 울음이었다. 당시의 기억 왜곡과 상황 알리바이 조작으로 개인의 치적이나 집단의 공으로 돌려 신분 세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광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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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도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구역 철거건물 붕괴 참사에 5·18 구속부상자 회장이 연루되고 정관계 밀약이 거론되면서 밥맛을 잃었다.

1980년 5월이, 광주 정신 계승이, 학살과 피로 얼룩진 도청과 금남로가, 아들의 주검을 끌어안은 유족의 허망한 눈빛을 기억한다면 5.18 광주를 그렇게 만만히 봐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다.

5월 광주가 거룩한 역사로 등재되면서 광주는 희생당한 시민군의 승리로 기록되었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광주는 누구의 것도 아닌,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희생당한 모두가 주인이다.

그런데 오늘의 광주는 빛을 잃어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낯설고 말 꺼내기 주저하면서 드러내기 힘든 추억이 되어버렸다.

한 다리 건너면 이웃이고 또 한 다리 건너면 선후배인 까닭에 싫은 소리 못하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동안 광주는 퇴락하고 초라해져 갔다.

기회주의자들과 패배주의자들은 긴장과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항쟁의 그늘 밑으로 어중이떠중이 모여들어 나이롱뽕을 치며 술에 찌들어 가고 5.18 광주의 무덤은 쥐들이 곳간을 드나드는 화수분이 되어버렸다.

ⓒ광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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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을 견뎌오던 5.18 광주에 신물이 난 건가? 죽창가를 부르던 그 날카롭던 눈빛과 새벽공기처럼 차갑던 정신은 어디로 다 떠났는가?

광주를 지키지 못한 우리 모두에게 치열한 반성과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오프닝의 ‘함평 5,18은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이야기가 사족처럼 길어졌다.

필자는 5.18을 소재로 한 영화 ‘임을위한행진곡’ ‘낙화잔향’을 연출한 감독이다. 지금은 세 번째 5,18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함평 5.18 왜곡을 접하면서 더 늦기 전에 5.18 광주항쟁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남기고 싶어서다.

논쟁의 시작은 2018년 함평문화원 원장 K씨가 발행한 함평군 설화 <호남가 첫고을 의향 함평>이란 설화집 책자가 발행되고서다. 전라남도 도비 5천만 원 함평군민 혈세 5천만 원을 지원받아 1억 원을 들여 만든 설화집이다.

그런데 설화집에는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이 고장 출신 고(故) 지춘상 박사의 연구 업적이 고스란히 수록되면서 표절 시비 발단이 된다. 다른 사람의 결과물을 손 안 대고 코를 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설화집에 실린 함평 5.18 역사 왜곡은 물론 5.18 역사를 설화의 범주에 취급했다는 데 있다. 설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상상의 이야기로 사실의 역사와 개념이 전혀 다른 분야다.

‘사단법인 내 고향 함평천지회’ 측은 함평문화원 원장 K씨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쟁점으로 떠올랐다.

양 측의 가장 큰 쟁점은, 함평문화원 원장 K씨의 5,18 광주항쟁 당시 함평에서 벌인 집회가 함평군이 지원한 관제 시위였다는 ‘사단법인 함평천지회’ 측의 주장과 함평군민의 자발적인 5.18 항쟁 지지의 시민군 항쟁이었다는 원장 K 씨의 주장이다.

1980년 5월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 ⓒ5.18기념재단 누리집 갈무리
1980년 5월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였다. ⓒ5.18기념재단 누리집 갈무리

개인의 기억과 경험은 얼마든지 무협이 됐든 소설이 됐든 영화가 됐든 자유다. 역사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사용할 수 있다지만 역사 서술만큼은 과장하거나 숨기거나 해서 기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개인이 왜곡된 기억과 당시 상황의 알리바이 조작으로 역사라는 거대한 무게에 기록을 얹는 문제는 별개다.

그것도 전라남도와 함평군민 세금으로 만들어진 책자라는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개인의 검증되지 않은 기억이 역사책으로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청소년들과 학자들과 후대의 역사교육으로 활용된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고쳐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 역사를 기록하는 데 신중하고 엄격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K씨의 기억과 경험은 조선 시대 실록에 기록된 이야기였다면 변방에서 우국충정에 우러난 거룩한 이야기로 가문의 영광일 수 있겠지만 80년 5월 당시를 기억하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또한 함평의 시민군 증언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사단법인 내 고향 함평천지회’ 측이 밝힌 K씨가 함평 5,18을 왜곡시키고 얻은 몇 가지 사안들을 나열해본다.

함평문화원이 발행한 책자에 자신의 민주투사로 변신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 것.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행발불명자 묘비. ⓒ광주인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행발불명자 묘비. ⓒ광주인

전라남도 5.18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올해 5,18 민주화운동 41주년 기념 행사위원장이 되어 기념식을 치르기도 했다.

함평 뿐 아니라 광주와 전라남도 지역의 5.18 항쟁의 잘못된 역사를 방치하면 거짓이 진실이 되는 역사를 살아가게 된다. 독립군의 업적이 폄훼되고 제대로 된 애국자로 대접받지 못하듯이 광주의 진정한 5.18 전사들이 언제 뒷전으로 물러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집 앞 전봇대에 쓰레기가 쌓여 쓰레기 적치장으로 변하기 전에 빨리 쓰레기를 치우고 그곳에 무단투기 단속 경고 푯말과 광주의 눈들이 감시하는 CCTV를 설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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