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미술관] ‘혁명은 순정이다’ 목판화가 박홍규 초대전
[오월미술관] ‘혁명은 순정이다’ 목판화가 박홍규 초대전
  • 범현이 문화전문 기자
  • 승인 2021.06.15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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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과 동학군 연작, 혁명가 김산, 음악가 정율성 등 전시
6월 4일부터 6월 30일까지 오월미술관에서 열려

지난 4일부터 6월30일까지 목판화가 박홍규 작가의 전시가 오월미술관의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다.

이번 초대전에서는는 박 작가의 2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녹두장군과 동학군 연작시리즈 40여 점 중 일부와 한국 근현대사를 통과하면서 혁명가로 살았던 김 산과, 정율성 음악가에 대한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박홍규 목판화가. 지난 4일부터 6월30일까지 광주 동구 오월미술관에서 동학군 연작과 일제시대 혁명가를 담은 박 작가의 기획 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오월미술관 제공
박홍규 목판화가. 지난 4일부터 6월30일까지 광주 동구 오월미술관에서 동학군 연작과 일제시대 혁명가를 담은 박 작가의 기획 전시전이 열리고 있다. ⓒ오월미술관 제공

작가는 “농부가 되고 싶었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으나, 농민운동을 전위에 두어 그림을 버렸다.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 그림은 역사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되었다.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호출했다.

농민운동 현장은 숨 가쁘게 치열했다. 고추수매, 수세투쟁, 한미FTA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현수막이 필요했고 걸개그림도 걸어야 했다. 작가가 몸담았던 부여농민회뿐 아니라 전국농민회의 열기에는 ‘뺑기쟁이’가 필요했고, 이 모든 시위현장의 선전은 작가의 몫이 되었다.

농부로 살고자 그림을 버렸으나, 다시 농부로 살기 위해 그림이 필요조건이 되었다. 기꺼이 도구가 되었다.

‘녹두장군’ 판화는 정체성의 표상이었다. 각 분야의 운동권 사무실에 걸려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녹두장군’은 작가로 하여금 ‘동학’에 관한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명인 『혁명은 순정이다』는 작가의 정체성의 재확인을 뜻한다

그동안 우리가 교과서로 알았던 동학혁명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그림을 토해 알 수 있다. 농부로 이뤄졌던 동학혁명군들의 일상과 동지애,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과 염원 등이 작품 안에 절절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작품 설명 글.

『그림으로 읽는 동학농민혁명』

'전녹두'- 박홍규. ⓒ오월미술관
'전녹두'- 박홍규. ⓒ오월미술관

전봉준. 이 사내가 빠진 우리의 근현대사는 어찌 되었을까. 오척의 작달만한 키로 19세기 말 격동의 존선반도를 들었다 놓았다했던 사람.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격정적으로 뜨겁게 온 몸을 던진 혁명가.

부vlgis 봉건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시댜=o를 갈망하며 꿈꾸었던 사람. 거센 외세의; 침탈에 정면으로 바람 앞에 맞섰던 사람. 조선백성들은 그를 전녹두라 부르며 사랑했고, 아낌없이 생사고락 운명을 같이했다.

청수한 얼굴과 정채있는 미목, 엄정한 기상과 강장한 심지를 가진 이 위대한 대영걸 전봉준이 빠진 우리의 현대사는 맹탕일 뿐이다.

그가 신새벽 눈 내리는 배들 평야를 뜨거운 입김 불어가며 가고 있다. 초 저녁에 살며시 기어든 어느 사랑방에서 밤새 호롱불 아래 정세를 나누고 밀담을 주고 받다 뜬 눈으로 새벽길을 나서는 이 사내는 무슨 생각으로 눈길을 뚫고 가고 있을까?

그의 어깨 위에 조선 백성의 운명이 걸려있음을 이때는 알았을까. 그는 준비된 혁명가였다.

『후천개벽도』

전주 화약 이후 호남은 집강소 통치가 시작되었다. 집강소는 우리 역사 최초로 민중이 국가권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립의 민주주의를 실천했던 기구다.

집강소 폐정개혁 12조항은 조선백성들에게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같은 환희와 축복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천개벽도』는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이 되는 세상, 후천개벽 대동세상에서 환하게 웃음짓는 백정, 여성, 과부, 기녀, 아이, 농민 등을 새겨넣었다.

그 찬란했던 해방세상도 단지 몇 개월로 끝났다. 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왔다.
 

『동학농민혁명군. 장흥부 덕도를 탈출하다』

장흥 석대들 전투는 혈전이었다.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남쪽으로 퇴각하며 옥산촌 전투와 월정전투를 치른다. 장흥전투는 1주일간의 승리와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의 32일 간의 가장 긴 토벌 기간으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일본군들의 추격으로 흩어졌던 농민군 500~600명이 대거 덕도로 운집하자 16세 소년 윤성도를 비롯한 덕도 주민들은 야밤을 이용해 남해안 주변 섬으로 모두 분산, 피신시켰다.

『동학농민혁명군. 장흥부 덕도를 탈출하다』는 전투에 패한 동학농민군이 절망과 불안 그리고 다음 투쟁에 대한 결기를 다지며 배를 이용해 탈출하는 장면이다.

이후 이들은 한 명도 붙잡히지 않았고, 덕도 주민들 또한 토벌 과정에서 모두 무사했다한다. 조선강점 이후 이들은 아마도 의병투쟁으로 무장 항일투쟁으로 섬에서 혹은 어느 산하에서 이름도 없이 산화해갔을 것이다.

‘의병의 절반은 비류_농민군’이라는 당대의 기록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농민군의 덕도에서 조직적 탈출은 농민전쟁의 패배가 아닌 투쟁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완의 동학농민혁명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진행형이다.
 

『아름다운 청년 김 산(1905~1938)』

'아름다운 청년 김산'- 박홍규. ⓒ오월미술관
'아름다운 청년 김산'- 박홍규. ⓒ오월미술관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평북 용천 출생. 일본, 만주, 상하이, 베이징, 광둥, 옌안 등을 누비며 중국 공산혁명을 통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신흥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졸업한 뒤 상하이로 가 이동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다.

1924년 고려공산당 베이징 지부를 설립하고 1925년 중국대혁명에 참가하였다. 1930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37년 중국의 옌안에서 님 웨일즈와 만나게 되었고 님 웨일즈는 이 만남의 성과를 담아 1941년 미국 뉴욕에서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를 출간했다.

1938년 중국공산당 사회부장 캉성에 의해 ‘일제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으나 1983년 중국 공산당은 김산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하고 명예와 당원 자격을 회복시키는 복권을 결의하였다.

이 작품은 27세 때 감옥에서 찍은 김산의 강인한 모습으로 김 산의 실제 이미지이다.

그는 공포를 모르고 독립심과 완전한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견해는 명확했으며, 또한 그것은 이론과 경험 양쪽에서 주의 깊게 추론을 한 후에 나온 것이었다.

그는 추종자가 아니라 지도자로서 사물을 고찰하였다. 그는 조선혁명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이것은 아주 당연하게 느껴졌다.

비록 겉으로는 예의가 바르고 세상사에 무관심한 듯이 보이지만, 그 저변에는 힘이 있었다. (p.42) 42

_ 님 웨일즈(1907~1997)아리랑 중 일부 발췌
 

『정율성』

'연안송'- 박홍규. ⓒ오월미술관
'연안송'- 박홍규. ⓒ오월미술관

정율성(1918-1976)은 광주 출신으로 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약산 김원봉은 일본군 전화 감청요원으로 정율성을 활용하였다.

정율성은 틈틈이 상하이 음악학원에 다니며 음악공부를 계속하던 중, 의열단을 떠나 연안의 중국공산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중국의 아리랑이라고 하는 『연안송』과 『중국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 행진곡 등을 작곡했다. 중국 건국 100대 인물로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더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광주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국제 음악제가 매년 열리고 있으며, 생가 복원 등 기념사업회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정율성은 해방 후 북한 지역으로 들어가 『인민군행진곡』 등 음악활동을 계속하다 다시 중국으로 들어온다. 문화대혁명 시기 고난 이후 1976년 사망하여 현재는 팔보산 혁명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대둔산 전투』

'녹두꽃은 영원하리'- 박홍규. ⓒ오월미술관
'녹두꽃은 영원하리'- 박홍규. ⓒ오월미술관

동학 농민군, 대둔산에서 최후의 항전을 했다. 당시 동학군은 일본군에 의해 거의 진압된 상황이었지만, 접주급 등 동학군 핵심간부 등 26명은 항복이나 해산을 거부하고 대둔산 자락의 미륵 바위(형제바위)로 들어왔다.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군에 대항하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살아남은 일부는 대둔산에 들어가 1895년 2월 18일까지 마지막까지 항거하다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전원 바위벼랑에서 모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대둔산에 동학 농민혁명군의 최후 항쟁지가 있다는 사실은 지난 199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번역, 간행함으로써 세간에 알려졌다.

문석봉의 『의산유고』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은 1894년 11월 초 우금티에서 패전한 동학 농민군 50여 명이 대둔산 절벽 위에 3채의 집을 짓고 화승총으로 항전을 계속했고, 1895년 2월 18일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으로 진지가 함락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학 농민군 대둔산 최후항전』은 지난 100년 동안 묻혀있다가 1994년 서울대 신용하 교수에 의해 최초로 공개됐다. 대둔산 마루 삼선계단에 가기 직전에 ‘대둔산 동학군 최후 항전지’ 표지가 있다.

1999년, 원광대 사학과 조사단(단장 신순철: 申淳鐵 교수)은 대둔산 능선에서 집터 3곳을 비롯해 석굴 2곳 등 농민군 항전 유적과 유물이 발견했다.

대둔산 능선의 해발 600~750m 지점인 속칭 석두골이다. 원광대 조사단은 항전지에서 60평 크기의 방어진지와 돌로 쌓은 축대와 성채 등을 확인했다.

또 동학군의 활동상황을 추정할 수 있는 주거지와 석굴(2기), 식사를 준비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아궁이 터 등이 발굴됐으며 또한 길이 53㎜의 탄피도 출토됐다.

서기(AC) 70년 로마군에 의해 끝까지 항전하다 960명이 순국한 이스라엘의 마사다(Masada) 요새와 한국의 대둔산 동학 최후 항전지는 흡사한 점이 많다.

첫째, 두 곳 모두 최후의 항전지라는 점. 둘째, 두 곳 모두 전원 순국, 자결한 점. 셋째, 두 곳 모두 해발 600~700m의 산 정상에서 오랜 기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점이다.

다만, 이스라엘은 ‘마사다 유적’을 세계적 명소로 가꾸었고, 이스라엘인들을 정신적으로 규합하는 성스러운 곳으로 승화시켰다.

대둔산 동학군 최후 항전지는 더없이 소중한 우리 지역의 애국적 문화유산이다. 비록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였지만 새로운 희망의 세상을 향한 민중들의 염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동학은 한없이 낮은 세상을 원했다. 천지를 개벽하여 높은 곳에 오르길 원한 것이 아니다. 땅이 요동치고 하늘이 뒤집히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 관계가 요동치고 뒤집혀서 고르게 낮고 평평해지는 것을 바랬다. 대동 세상. 천지 만물이 사람이요, 사람이 만물의 일생이라. 바야흐로 생명사상의 새로운 싹이었고 뿌리였다.

『혁명가 스물두 살 이소사』

박홍규 목판화가. ⓒ오월미술관
박홍규 목판화가. ⓒ오월미술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은 한반도의 남서쪽으로 밀려 장흥의 동학군과 합류하여 3만이 넘는 대오를 이뤘다.

패배가 자명한 전투의 끝자락에 장흥 일대를 점령하고, 장흥부사 박헌양 등 장졸 96명을 전사케 한 장녕성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둔다.

일본군 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이 쓴 토벌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 중에는 이 전투에서 ‘부사의 목을 내친 사람이 여인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대목이 있다.

『이소사』라는 그녀의 이름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정부 토벌군이었던 이두황의 ‘우선봉일기’였다. 이두황이 1895년 1월 남소사랑에게 보낸 편지에는 거괴(巨魁) 체포자 이소사가 소모관에게 허벅지 살을 베이는 문초를 당해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숨을 헐떡이는 지경에 이르러 위태하므로 나주로 호송이 불가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다음 해 나주에 있는 일본군 감옥에서 심문 직전 옥사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에 관한 당시의 모든 기록은 그녀를 죽이는데 가담한 사람들에 의해 남겨졌다. 당시 일제의 신문이었던 <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 자에는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라고 적혀있다.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회를 소집하여 오지 않았던 다른 세상을 꿈꿨었지만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보름이 넘도록 최후의 항전을 한 뒤 무참한 살육 끝에 혁명의 막을 내렸다.

최근 발견된 일본병사 쿠스노키의 『종군일지』의 기록에 의하면 장흥의 건산이라는 산등성이를 눈처럼 하얗게 가득 채운 동학농민군들에 대한 묘사가 있다. 무명옷으로 겨울 추위를 버텨가며 지는 싸움에 임하고자 했던 그들과 『이소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동백꽂 대님』

'말목장터 감나무-파랑새는 온다'- 박홍규. 2014. 63 =90cm  목판화. ⓒ오월미술관
'말목장터 감나무-파랑새는 온다'- 박홍규. 2014. 63 =90cm 목판화. ⓒ오월미술관

여인네에게 업힌 시신은 머리가 없다. 몸통도 덮여 있다. 버선 대님 동백꽂만 붉다.

1894년 갑오년 동짓달 장흥 탐진강과 석대들에서는 몇 만의 동학군과 민보군이 싸웠다. 동학군은 민보군에 이겼으나 왜병에 졌다.

동학군이나 민보군이나 전쟁에 나간 아버지, 아들, 연인에게 여인들은 자신들만의 바늘질로 수를 놓아 만든 버선 대님을 묶어 주었다.

목이 잘리고 불에 타더라도 버선 대님으로 아버지, 아들, 연인을 찾았다. 장흥 석대들 전투에 대해 조사하던 작가는 촌로들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죽음 후 거둬들인 버선 대님이 몇 가마니였다'며 통곡이 남쪽 바다를 덮었다는 것이다.

바라볼수록 눈물이 솟는다. 심지어 붉은 동백 대님을 들쳐업은 여인의 표정은 세상 모든 것을 얻은듯 평화롭고 깊다. 이 여인이 바라고 붉은 동백대님이 죽음과 바꾼 세상은 어디에 있을까.

여기까지 오는데 곡절과 부침도 많았다. 하지만 끝내 놓을 수 없었던 것은 ‘작가정신’과 ‘전녹두’에 대한 애정 즉 순정이다. 농부로 살면서 바라보았던 그림 속 세상은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 그대로 투영되었다. 싸움에 나선 농부는 동학군과 다를 바 없이, 살기 위한 투쟁이었다.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는 전시장을 찾는 관람자들과의 대화시간도 갖는다.

 

 박홍규 작가 약력

1959 전북 부안 生

1985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2014 차라리언더바 릴레이 개인전_ 전녹두 , 어서 오게나

2013 국회초대전_ 빈집의 꿈

2012 박홍규이기홍 2인전_ 지금. 여기. 리얼리즘(서신갤러리. 전주)

3회 개인전_ 新농가월령도_ 서신갤러리. 전주)

2011 전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전 회화부문(전북예술회관. 전주)

개인전_겨울 여의도(서신갤러리. 전주)

고 정광훈 의장님 추모 그림 제작

2000 전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전 만화부문(전북대 삼성문화회관. 전주)

1999 개인전_ 들에서 여의도까지 (우진문화회관. 전주)

1996~2000 전북문화저널 편집위원 및 만평연재

1986~ 농사와 농민운동

그 외 힘전, 우리가 서야할 그곳에서전, 동북아와 제3세계미술전, 쌀전 등 기획단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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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의 글

1894년 부패한 조선봉건사회를 뿌리째 흔들어 근대사회로 넘어가게 한, 가장 치열했던 민족민중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을 오롯하게 작업해 온 작가입니다.

삶, 그 자체가 동학혁명군과 다를 바 없으며, 운명과 희망마저도 130여 년 전 동학군들과 끈끈하게 연대하는 농부화가 입니다.

천지가 꽃들이 만개하는 찬란한 시절에 우리는 패배하고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는 동학혁명군을 만나러 갑니다. 더 나아가 우리 앞에 다시 살아난 조선의 혁명가인 김 산과 연안송 작곡가인 정율성도 만납니다.

부디 걸음 하셔서

새벽이 올 때까지 날 세운 칼맛과

먼 길 오신 귀한 분들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오월미술관 관장 범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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