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들어라.

글 많이 썼다. 욕도 많이 먹었다. 지금 오래 사는 것이 아마 욕을 많이 먹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렇게 글을 쓰고 나면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욕이다.

나름대로 변명을 늘어놓는다. ‘먹고 살자니 별수 없지 않으냐.’ 과연 먹고 살 수 없어서 욕먹을 글을 썼는가.

지금까지 살아 온 세월의 절반을 확 떼어버리고 싶은 인생을 살았다고 하면 지금은 보람 있게 산다고 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 평가는 다를 것이다. 다만 양심의 소리만을 듣고 산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양심의 소리는 무엇인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 SNS 갈무리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 SNS 갈무리

제대로 정신 박힌 사람이 읽으면 정신병자 아니냐고 할 정도로 고약한 글을 쓰면서 찬사를 들으면 우쭐했다.

세상 참 더러워서(지금 생각하면) 칭찬 들었던 그 글을 지금 보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다. 그럼 왜 그 당시는 그걸 못 느꼈을까.

깊은 밤 문득 잠이 깨어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인가.

정신을 차리고 집중한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다. 더 집중해 기울인다. 작지만 선명하게 들린다.

“이 개자식아. 그걸 글이라고 썼느냐. 넌 ‘양심’도 없느냐.”

어! 양심? 지금 양심이라고 했는가. 숨을 멈추고 내가 쓴 글을 되새긴다. 글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소리도 작아진다.

그와 반대로 잘 들리지도 않던 작은 가슴속에 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제 그 소리가 귀를 꽉 채운다. 숨이 가빠진다.

아. 아. 내가 저 글들을 썼단 말인가. 그럼 네가 안 쓰고 어느 개뼈다귀가 썼느냐. 이제 분명하다. 나는 글을 안 쓰고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양심의 소리

가슴속 저 구석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숨어 살던 양심이 제소리를 낸 것이다. 그 소리가 내 귀에 들린 것이다. 양심의 부활이다.

지난 6월 12일, 백범기념관에서는 ‘신 복지포럼’ 서울발대식이 열렸다. 전국 곳곳의 도시에서 열린 신 복지포럼 발대식의 말미를 장식한 서울 행사는 백범기념관이라는 의미를 더해 더욱 뜻이 깊었다. 나는 상임고문으로 격려사를 했다. 영광이다.

내 격려사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후일담이 들린다. 왜 눈물을 흘렸을까. 난 정치인이 아니다. 벼슬 욕심도 재물 욕심도 없다.

노무현·문재인 두 분을 같은 시기에 만났고 그분들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숨어 지내던 내 양심을 살려낸 분들이다.

양심의 소리가 살아나 부끄럼 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다. 내가 노 대통령을 돕던 얘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제 내가 돕는 내 인생의 마지막 지도자는 이낙연 의원이다.

어느 누구를 만나 왜 이낙연을 돕느냐는 토론을 해도 자신이 있다. 신뢰와 정직이다. 지금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최고정점에 이르러 있다.

이 불신이 사라지지 않고는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 바로 이 나라의 희망을 심기 위해 나는 이낙연 의원을 돕고 있다.

격려사에서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좀먹어 오던 거짓과는 영원이 이별을 했고 이제 정직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고 했다. 내 생각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다. 너무 기쁘다.

이미 말했지만, 양심이란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양심은 작은 목소리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양심은 죽지 않는다.

국민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잘 들리지 않는 듯 작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희망의 소리며 내 삶을 지켜 줄 이 나라를 제대로 세우는 유일할 길이라는 것을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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