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기운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 4월, 갑작스럽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5월 1일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있을 <좋은 빛, 좋은 공기>라는 영화의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GV는 광주 여성영화제, 광주 독립영화제 때 몇 번 경험이 있었던 터라 하겠다는 답을 하고 보니 임흥순 감독의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작년 <9회 광주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그때 영화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는 러닝타임이 115분이었는데 5분이 줄어든 110분의 작품으로 좀 더 촘촘하고 탄탄하게 편집되어 4월 28일 개봉을 했다.

영화의 타이틀인 좋은 빛(Good Light)은 대한민국 남쪽 도시 광주를, 좋은 공기(Good Air)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상징한다. 제목만으로는 어떤 내용일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광주’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뭔가 탁! 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스치듯 떠오른다.

그런데 ‘부에노스아이레스라고? 왜?’ 남쪽 도시 광주와 타국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에 대해 정열적인 몸짓으로 탱고를 추는 댄서의 이미지만을 떠올렸던 나의 무지함은 영화를 보고 그들의 아픈 역사를 알아버린 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또 다른 숙연함으로 다가왔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두 도시, 아픔의 역사, 독재 군사정권에 맞서 싸운 이들의 처참한 이야기,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절규, 그러나 또 다른 희망!

이 모든 서사를 임흥순 감독은 미술과 영상의 경계를 허물고 ‘아트멘터리’로 승화시켰다.

프레임 안의 이야기 <좋은 빛, 좋은 공기>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는 드론. 영화의 첫 장면이다. 프레임 안에는 구 광주교도소 5·18 민주화 운동 암매장 추정지 발굴 현장에는 기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보이지만 카메라의 셔터 소리만 요란할 뿐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짧은 침묵을 뚫고 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적막했던 프레임 안에 울려 퍼진다. 1980년 그날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들, 아버지, 동생에 대한 가족들의 생생한 증언이 이어진다. 그리고 뒤를 이어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의 증언이 잇따른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 광주는 신군부 세력에 의해 지금까지 7천여 명의 시민들을 잃어야만 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역시 독재 정권이 자행한 국가 폭력으로 인해 1977년부터 1983년까지 3만여 명의 시민들이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슬픈 기억을 간직한 두 도시의 사람들이 토해내는 증언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두 도시의 상이한 풍경이 하나의 프레임으로 중첩된다.

영화는 거울, 안녕, 눈까마스(Nunca Mas), 이름도 남김없이, 쑥갓이라는 다섯 챕터로 나눠 거울에서는 똑 닮은 두 나라의 학살의 역사를, 안녕에서는 기억의 공간의 복원과 발굴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눈까마스(Nunca Mas)는 당시의 처참했던 기억들을 잊지 않고 증언해야 하는 이유들 에 대해, 이름도 남김없이에서는 오월어머니집과 오월 광장어머니회의 현재의 투쟁에 대해, 마지막으로 쑥갓에서는 자연이 갖는 정화 능력처럼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대하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임흥순 감독은 전작인 <비념(2012>에서 제주 4.3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강상희 할머니의 이야기로 제주 곳곳의 4.3 항쟁에 대한 기억과 애도를 담아냈으며, <위로공단(2014)>에서는 노동자로 살아온 자신의 가족(어머니, 형수, 여동생)을 보며 느꼈던 감정들을 예술로 승화시켜 한국 작가 최초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임감독은 여성의 언어와 시선, 여성의 생각을 스크린에 담으려 노력했으며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도 광주의 ‘오월어머니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증언에 집중하며 그날의 상흔과 아픔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녀들의 항쟁, 광주 오월어머니집의 ‘518 진상규명’과 ‘구 광주도청 복원 투쟁’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오월광장 어머니회의 실종된 자식을 찾는 ‘오월광장 침묵시위’를 영상에 담아냄으로써 자연스럽게 과거의 ‘학살의 공간’이 현재의 ‘투쟁의 공간’이 되고 그 미래의 ‘기억의 공간’이 될 것이라는 ‘공간’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유해 발굴과 공간의 복원을 위한 노력의 현장을 카메라는 담담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어떤 공간은 누군가에게는 묻혀야 하는 공간이 되어 기억을 원하는 자들에 의해 다시 복원되어야 하지만 어떤 공간은 지금도 남아 계속해서 항쟁하게 하는 사명감을 주는 구심점이다. 영상 속 공간 이미지는 하나의 운동 이미지로 치환되어 광주 시민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의 원동력의 에너지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촬영 중 2년간 행한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청소년 워크샵을 통해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영화 첫 씬인 하늘을 나는 드론, 청소년 워크샵 중 VA를 통한 당시 그날의 기억을 재현하고 경험해 보는, 조금은 과거의 기억들에 관한 이미지들의 나열과는 다소 이질적인 미래적 장치들일 수도 있지만 이를 통해 영화는 학살의 기억을 앞으로의 세대에게 어떻게 전이(轉移)시킬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동시에 현재적 대안을 제시한다.

“정말 아버지가 너무 그때 당시에는 정말 싫었어요. (...)근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고통이 끝날 줄 알았어요. (...) 아버지가 괴롭히고 했던 것들이 어린 저에게 트라우마로 그게 남아있었어요.

청문회 때 사실은 민주화 운동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가정이, 한 가정이 무너졌다, 보상보다는 국가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배상을 받아야 하는게 아니냐...”

영화는 518이라는 거시적이고 공적인 역사를 다룸에 있어 개인들의 가정사에 얽힌 미시적인 것들을 들여다보며 학살의 참혹함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통해 가정의 참혹함을 들여다본다. 518을 경험한 부모 세대와 경험하지 않고 부모 세대에 의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자식 세대의 이야기까지 섬세하게 들여다봤다는 점에서 새롭다.

또한 임흥순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518의 거대 담론을 자연의 소리와 자연의 이미지를 이용한 아트멘터리와 중첩해 관객들이 518에 좀 더 편안히 다가갈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연출력이 돋보인다.

프레임 밖의 극히 ‘사적’인 이야기-나와 518

ⓒ포털 다음 누리집 갈무리
ⓒ포털 다음 누리집 갈무리

5월 1일, 그날은 새벽부터 내린 봄비에 몹시 스산하고 서늘했다. GV는 <은주의 영화>의 작가인 공선옥 작가와 임흥순 감독 두 분을 모시고 진행됐다.

추위에 떨어서인지 아니면 하고픈 말과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해서인지 GV가 끝난 후에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도는 518에 관한 상념들.

정치색이 짙은 영화를, 정치적인 언설을 배제한 채 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GV 때 스크린 안의 내용만을 가지고 논해야 할지, 아니면 스크린 밖의 역사적, 정치적 언설을 논해야 할지, 조금은 우려했던 일이 역시나 일어났다.

관객석의 질문은 다른 영화들의 GV 때 와는 달랐다. 영화에 관한 질문은 서너가지가 나온 후 침묵이었다. 이후 518에 대한 자성(自省)의 목소리들...역시 518 영화는 광주 시민들에겐 518 그 자체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의 머릿속에는 518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나와 518, 나는 얼마나 518에 대해 알고 있는가.

어디를 가던 고향을 묻는 것은 당연지사다. “어디 출신이세요?” 그럴 때 마다 나는 “광주요, 광주 토박이예요.”라고 답하곤 한다. 광주 토박이, 그러면서 실상 광주에 대해선 잘 모르는...

내 몸으로 느낀 518은 태어나서 딱 두 번이었다. 두 번 다 존경하는 은사님이신 유재연 교수님 덕분이었다. 2007년? 8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행사’.

유교수님은 1998년부터 일본의 우타고에(일본의 노동자, 시민 노래패)와 518 민주화 운동 기념행사의 연결 고리가 돼 주신 분으로 2019년까지 지금껏, 그날도 ‘우타고에’와 함께 셨다.

교수님을 뵈러 갔다가 지금의 문화의 전당으로 바뀌기 전이니 구 도청의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고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건물이 주는 음산함과 고독함은 행사장으로 들끓고 있는 바깥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뭔가 야릇한(?) 기분이었다.

2009년 3월, 유교수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본에서 손님이 왔는데 같이 동행해 줄 수 있냐고. 3월 영화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 중이었던 나는 송별회도 겸해서 교수님을 뵐 생각에 흔쾌히 응했다. 다카하시 구니스케, 전직 아사히 신문기자, 광주 518에 대해 글을 쓰고 싶으셔서 직접 광주를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70세가 넘은 연세에. ‘일본 사람이 518에 대해?’ 순간 깜짝 놀랐지만 그것도 잠시, 셋이서 함께 장성, 임곡 518 관련자들을 만나고, 윤상원 열사 집에 방문, 담날 광주공원, 조선대, 화순 주남마을, 운주사, 그리고 동학 농민 운동의 고창까지, ‘나 광주 사람 맞아?’라고 할 정도로 나보다 더 518에 대해 잘 아시는 일본 분이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남마을을 알았고(그때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주남마을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침묵했다), 윤상원 열사 집을 처음 방문했으며(윤상원 열사가 쓰던 방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으며 당시 어머님이 눈물이 흘리셨던 것 같다), 동학 농민 운동과 518 민주화 운동의 연결 고리에 대해 논하시며 광주의 민주화 운동은 동학 농민 운동의 뿌리에 그 근원이 있다면서 왜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말씀하시는데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바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영화공부를 하기 위해 모인 우리 학교 학생들은 지도교수 때문에 유독 유럽, 미국, 영국 학생들이 많았다. 한국 학생은 다 서울 출신이고 나 혼자 광주 출신이었다. 다들 나에게 “비엔날레? 518?”을 물었다. 그러나 난 단지 맞다는 말만 할 뿐 더 이상의 말은 이을 수가 없었다. 왜? 잘 알지 못했으니까.

나는 518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다. 왜? 518이 일어났을 당시 너무 어렸다. 우리집은 구 시청(계림동) 바로 앞 도로변에 있었다.

뛰놀고 싶어 대문 밖을 나가 시위대 뒤에 쫄쫄 따라가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를 따라 외치는 아이를 다시 잡아다 끌고 오는 게 일이었던 아빠는 내가 밖에 나갈까 항상 조마조마했고 엄마는 만삭의 배로 문만 열면 보이는 시체 더미가 끔찍해 집 안에만 있었다고 한다.

전대사대부중을 다닐 적 국민학교 때까지 반공 포스터를 만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던 나는 전경이 불쌍했고 대학 시위가 있을 때면 학교 안으로 최루탄이 들어와 수업을 못하기 일쑤, 조기 하교에 마냥 신났지만 최루탄의 매움이 싫어 시위하는 대학생들이 미웠고 등교 때 전대 정문 앞 시위하는 대학생 중 교생선생님과 마주칠 때면 신나서 손을 흔들었던 철부지였다.

당시 계림동 성당을 다니던 나는 우연히 본 비디오에서 군인에 의해 피 흘리고 죽어가는 사람들, 체육관 같은 곳에 관들이 쭉 나열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럼에도 그땐 그 비디오가 뭔지 몰랐다.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아무도 518에 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리고 IMF 세대. 사느라 바빴다.

GV가 있기 전, 한겨레 칼럼에 글 하나가 소개됐다. 광주에 사는 이주자로서 518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현지인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담긴 글이었다.

그렇다면 난? 난 이주자도 아니고 임흥순 감독과 같이 이방인도 아닌데 난 왜 518을 외면했던가? 완벽한 타자로 행동하진 않았나? 거기에 조금 변명해 보자면 우리는 518에 대해 배운적이 없는 세대이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음으로 침묵하기에 익숙해 있었고 518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이 맞는지, 상처 입은 그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518은 단지 운동권 학생들의 전유물처럼만 느껴졌다. 나의 이런 발언들이 너무 방관자적인 발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나와 같지는 않겠지만 나의 이 글에 공감하는 세대도 있지 않을까.

GV 때 임흥순 감독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광주 지역민이 아닌 이방인, 또는 타자로서 광주 518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부담감은 없으셨는지?” 임흥순 감독은 말했다. “저는 경청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이 말만이 또렷이 기억난다. 경청인, 그래 나도 518에 관해서는 지금껏 경청인이었다.

임흥순 감독과 별 다를게 없는 경청인, 그래서 518에 관해 답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해 본 적이 없으니. 그러나 지금의 세대들은 다르다. <좋은 빛, 좋은 공기>에서 워크숍에 참여했던 학생들도 하나같이 “518에 대해 배워서”라고 말한다.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조카도 며칠 전 5월 18일에 학교에서 518에 배웠다며 눈물이 날 뻔했다고 나에게 말한다.

ⓒ포털 다음 누리집 갈무리
ⓒ포털 다음 누리집 갈무리

그런데 지금껏 내 입으로 518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해 본 적이 없다.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철저히 외면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말할 것이다.

광주를 위해, 광주 518의 진실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아직도 고통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말하려 한다.

“내 소원은 인자... 우리 아들 뼈라도 찾아서 묻어주고 가면 좋겄는디...그것을 내가 죽기 전에 찾아질랑가... 나 죽어버리면 인자 그걸로 끝나제..누가 얼마나 찾아 댕기겄소...”

“아직도 처벌받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것, 진실을 밝히고 죄지은 자들을 단죄하기 위해 투쟁 해야 할 것이 많은 지금, 518의 진실이 밝혀지고 유골이 발굴되어 어느 노모의 애절하고 피맺힌 절규가 현실로 이루어질 때까지 이제는 나도 518에 대해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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