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EBS에서 <학교가는 길>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시선이 멈췄다. <학교가는 길>은 서울 강서지역의 공립 특수학교인 ‘서진학교’ 신설을 둘러싼 차별과 배제의 논란을 고스란히 담은 내용이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공존의 삶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특히 학교설립을 요구하며 무릎을 꿇은 장애인부모들의 절절한 모습 앞에 “너희가 떠나면 되지”를 외치는 지역주민들의 광경은 슬프기까지 했다. 그 목소리에 일전의 도움실 선생님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ㅇ반 ㅇㅇ는 수업시간에 끼어들기를 너무 많이 해서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다던데 선생님 수업시간에는 어때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실은 그 아이 때문에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 아인 밝아도 그대로 밝은 학생이 아니었다. “싫어하는 애들도 있는데, 그 아이만을 위해 교실에 보내면 안 되지 않나요!”라는 항의를 받기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대화 끝에 “그분에게 통합교육의 취지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방법을 잘 모르겠어요”라며 고충을 털어놓으시니 참으로 착잡했었다.

​교사들은 누구나 자신이 가르친다고 학생들에게 전부 이해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임없다는 비난을 듣더라도, 선행 학습 없이 새로 배우는 내용이더라도 받아들이는 차이는 교실에 엄존한다.

이 차이는 모든 교사들이 수업의 수준을 어디에 두고 진행해야 할지 원죄처럼 안고 가야 할 고민이다. 차이를 고려한 수업의 수위 조절은 배움의 교실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협동수업을 구상하기도 한다.

​중고등학교 때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발육상태가 사람마다 다른 성장기다. 대체로 가르치려는 욕심에 초점을 두느라 그 차이는 무의식적으로 놓치기 쉽다.

지적인 측면은 그 차이가 더 큰 데도 쉽게 확인하지도 의식하지도 못할 때가 많다. 어쩌면 평준화 교육을 외치면서 그것을 교육과정의 틀 안에 집어넣으려는 생각도 황당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짧은 생각이다.

​차이의 대전제에 동의하지 않고, ‘싫어하는 학생들’을 핑계 삼아 통합교육이 가져온 수업상황의 어려움을 밀쳐내려는 교사를 만나면 그래서 아프다. 강서 지역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레 집단이기주의나 지역이기주의라는 사회현상 앞에서 민주주의란 뭘까 자문하게 만난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되지 않던가.

단언컨대 차이의 무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이 되곤 한다. 진심으로 차별을 막는 일은 어떤 차이도 차별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함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실에서 공존하고 있는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싫어하는 학생’을 핑계 삼는 이 상황은 민주주의 사회가 전제하고 있는 차이를 편의적으로 끌고 간 민낯이다.

우리 교육계가 내건 민주시민육성이라는 슬로건에 어울리지 않은 반민주적 의식을 전하는 일상의 단면은 이렇게 많다. 이는 학교가 담아야 할 민주주의가 작은 일상에서 어떻게 꽃피어야 할지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세족식을 했다며 허세적으로 자랑하는 엉뚱한 동정심임을 넘어설 때 가능하다.​

교육활동을 하는 교실에서 부지불식간 모순된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다. 수업목표를 집중시키기 위해, 자신의 성향 때문에, 교실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차이의 존중을 무너뜨리고 순식간에 차이를 차별로 몰고 가기 쉽다. 어쩌면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처럼 일사분란하게 대응한다면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 시간의 학습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100%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어떤 수업도 그 시간 내내 다름의 공존 속에서 차이를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진행될 수도 있다.

교사의 수업은 거기까지밖에 책임질 수 없다고 학생 탓을 할 수 없다. 그렇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 현실에 놓인 차이 속에서 더 많은 이해를 만들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통합교육을 가로막는 가장 큰 이유는 약자가 누릴 권리를 배려하는 차이의 존중이 없어서 일어나기도 하지만 일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 준비가 안 되어 생긴 것이다.

노영필 교육평론가
노영필 교육평론가.

결국 일반 교사의 자기중심의 권리를 지키려는 준비 안 된 편견이 도움실 선생님이 맡아야 할 일쯤으로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장애인식개선이니 민주주의라는 거대 담론 말고 생활 속의 속성을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누구나 편하자는 쪽으로 관성력을 갖지 않는가.

그 편의성의 관성력에 지배되는 잘못된 자유를 외면하고 책임과 권리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일상의 속성을 떠나 통합교육만 외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 안의 독선과 그릇된 이기심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장애와 공존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통합교육을 성공시키는 일은 사소한 민주적 인식 속에 숨어 있는 1센치의 생각 차이에서 시작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다름은 어떤 일을 두고 더 잘할 수도 더 못할 수도 있을 뿐이다. 그것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통합으로 가는 길, 함께 <학교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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