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인간관계가 참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럴수록 철없던 시절의 친구가 더욱 그립다. 조건 없이 주고받던 우정, 마음 졸이던 고민을 두고 느낌과 치우침을 따지지 않았던 사이가 마냥 좋았었다.

어른이 되고 난 후의 인간관계와 달리 어릴 때 친구는 어른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깊은 속내까지 공유했다. 그 느낌 그대로 소통할 수 있었던 친구이기에 영혼까지 통하는 편한 존재였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도 어릴 적부터 만나온 친구와의 추억을 꺼낼 때면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스마트 시대를 사는 아이들에게서 우정의 성장통이 만든 이중고를 본다.

요새 아이들은 스마트폰이 손에 없으면 멍하니 앉아 있다. 옆에 사람이 있어도 눈길을 주기보다는 혼자 감당하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과 함께 한 결과일까?

그 속에서 언어를 익히고 스마트폰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면서 게임을 한다. 사람보다 먼저 온라인상의 관계를 먼저 익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아이들이 사람관계의 소중함에 눈뜨기 시작할 때는 언제쯤일까?

아이들의 관계맺기는 어른들과 다르다. 수직적인 관계보다 수평적인 관계에 더 익숙하다. 세대가 다른 부모에게 말투부터 존댓말의 꼬리가 잘려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이런 문화에서 상하좌우로 얽히는 인간관계를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사실 인간관계의 요령은 타인과 갈등을 겪으면서 터득된다. 갈등이 꼬이더라도 만나지 못한 채 온라인에서 주고받은 소통은 더 심각한 결과를 만들곤 한다. 꼬인 감정일수록 만나서 풀어야 제대로 풀린다.

얽힌 감정은 진정 어린 표정과 몸짓을 보고 말할 때 봄눈 녹듯 해소되지 않던가.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흔히 일어난다. 차마 직접 하지 못한 채 마음에 담아 둔 불편한 이야기를 들어준 친구가 고스란히 당사자에게 옮겨버려 난처한 상황은 종종 일어난다. 그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와 일상으로 이어진 친밀함이 꼬여 잘못 풀리면 자칫 학교폭력으로 커진다. 친구를 괴롭힌 행동은 1년을 훨씬 넘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발견되지 않았었다.

누가 봐도 사이좋은 친구였다. 밥도 같이 먹고 집에 찾아가 자면서 어울리기도 했으니 부모조차 알 턱이 없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참다못한 피해 학생이 담임에게 호소했다. 장난처럼 시작된 폭력이 상처가 나도록 강도가 쎄져서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왜 진즉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친하게 지내 좋아서 하는 표현이라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부부가 헤어지지 못하고 폭력을 참고 사는 이유와 비슷한 꼴이었다.

폭력과 장난을 구분하지 못한 결과다. 어른들은 학교 폭력의 원인의 25% 정도가 장난인 것을 잘 모른다. 원격수업을 해도 정서적 폭력은 증가하고 있는 이유다.

소통할 통로도 부족하고 해결책을 도움 받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찾지 못한 채 고립된 아이들에게서 쉽게 일어나는 모습이다.

최근 학교 내 상담교사가 배치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만약 담임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부담스러운 관계였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왜 말하지 않았어.”의 추궁으로 아이에게 잘못했다고 물아세워서는 안 된다.

요즘 아이들은 생각보다 외로운 세대다. 받은 상처를 해소할 인간관계가 부족하다. 안으로 곪고 있는 상처를 하소연하고 위로받을 곳이 없는 세대다.

부모들은 바쁘고 의지할 어른들도 주변의 형제들도 없다. 고작 놀 수 있는 공간은 인터넷뿐이다. 그런 광경을 두고 공부하지 않고 엉뚱하게 인터넷이나 하는 행동으로 단정하고 질책하면 안 된다.

이렇게 온라인 속에서 인간관계를 배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미 외로운 그들에게 인간적인 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삭막한 세대라고 말해서는 안 될 이유다.

모두 어른들이 만들었다. 그 탓이다. 인정에 굶주리게 해놓고 메말랐다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자세히 보면 인간적인 결핍에 목말라하는 호소임을 눈치채자.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다. 친구와 자칫 꼬이면 고립의 강도는 훨씬 커진다. 고립은 더 큰 절망을 불러올 수 있다. 가끔 무거운 침묵으로 자신을 열지 못하는 학생들을 만날 때 걱정이 몇 배로 는다. 그 침묵 안에는 엄청난 위기의 독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노영필 교육평론가.
노영필 교육평론가.

그런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공감하는 동조자가 필요하다. 그런 정황도 모른 채 자칫 부모들은 늘 정답만 제시해 엉뚱한 코드 읽기를 할 수 있다.

시행착오를 줄여준다는 명분을 내심 깔지만 아이에게 당장 필요한 감정의 위로가 아니라면 낭패다. 아이를 대상화한 채 부모 자신의 감정만 추스를 수 있다는 맹점을 생각해야 한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아이들의 마음속에선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친구같은 마음 나누기로 상대해주는 사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교사는 지식의 절대 강자, 인격적 롤 모델, 인간적 감화의 선망에서 이탈된지 오래였을 수 있다. 사람이 고프고 사람 속에 사람의 외로움을 채우고 싶었다면 말이다.

그 얼굴을 읽어야 한다. 우리 세대와 다른 양상의 성장통을 넘어설 수 있도록.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