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께서 무인자동시스템이 무섭다며 겪으신 어려움을 털어놓으셨다.

편의성만 생각하던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기계가 흉물일 수 있다. 내가 불편하게 느끼지 못하면 그 고충을 털어놓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카페, 영화관, 패스트푸드 가게, 병원, 주차장 공공시설물들 앞에 무인자동시스템이 수도 없이 늘어서고 있다. 어느 때부턴가 생활 속에 너무 깊이 들어와 있는 무인시스템, 이제라도 의식해볼 일이다.

코로나19로 세상의 변화가 더 빨라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상대적으로 지구가 좁아진 느낌도 든다. 가물거리는 오래된 기억이지만 국산품 애용을 강조했던 적이 있다.

자유무역시대의 개방화 압력으로 사라진 지 오래된 구호다. 그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있는 영어식 표현이 그 속도감을 실감케 할 뿐이다.

한때 상호로 내건 외국어 표기 간판들을 우리 말로 바꾸자고 한 적이 있었다. 옛 이야기다.

최근에는 개방화의 위력으로 외래어가 한글의 우수성보다 우위의 가치로 취급되고 있는 건가 싶다. 간판 표기 정도가 아니다. 젊은 세대가 찾는 곳은 거의 영자 표기의 범벅이다.

‘주문하는 곳’하면 될 텐데 ‘오더’다. ‘어린이 동반금지’하면 될 것을 ‘노키드 존’이라고 쓴다. ‘포장주문’이 아니라 ‘테이크 아웃’이다. 심지어 시내버스 노선 번호에도 영어가 등장한다.

예를 들자면 끝도 없다. 어떤 곳은 아예 영어로 ‘order’나 ‘no kids zone’이다. 그나마 밑에 한글을 붙여 쓰면 요행스런 친절이다.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하려다 보니 오히려 차별을 불러와 불편을 초래하고 있는 현실이리라. 읽지 못하시는 어른들은 아예 출입을 막는 셈이다. 영어표기가 위고 한글은 아래에 써진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한글이 영어에 짖눌린 형국이니 말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순위를 다투는 외국어상도 아닌데 말이다. 왜 이런 세태가 일반화되고 있을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무인자동시스템이 확산되면서 불편한 사람도 늘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의식한 것이 부끄럽다.

소외를 이야기하고 차별을 이야기할 때 문제의 심각함은 이렇게 엉뚱하게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많이 등장한다.

예컨대 글을 읽지 못하는 할머니와 ‘무등산 신발가게’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면 어떤 상황이 생길까?

한글을 읽지 못하는 할머니가 약속한 신발가게를 찾을 때 얼마나 불편할까를 생각해보면 영어를 읽지 못하거나 뜻을 모르면 그분들에게 다가올 고통은 사뭇 끔찍하다.

할머니가 찾아야 할 가게가 한 곳이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신발가게가 여러 곳이라면 어찌 찾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거리가 먼 곳에 서로 다른 신발가게가 있다면 그 답답함은 상상조차 안 된다. 영어표기도 마찬가지다. 주위에 도움을 청할 사람조차 없다면 꼼짝없이 공포에 포위될 것이다.

이런 문제는 자동화무인시스템 앞에서 더욱 심각하다. 이런 현상을 전문용어로 ‘디지털소외현상(KIOSK)이라고 한다.

공공장소에 설치된 무인 정보단말기의 터치스크린을 통해 안내받거나 정보를 얻는 무인시스템, 키오스크는 더 확산될 전망이다.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행정절차와 상품정보, 시설물의 이용방법 등을 제공하는 무인 종합정보안내시스템을 앞다퉈 설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영필 교육평론가.
노영필 교육평론가.

누구나 배우면 못 할 일이 없겠지만 배우지 않아 사용할 줄 모르면 철저히 소외된다. 세계화 추세로 어르신들이 갈수록 소외되는 시대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편리함의 화두 이면에 영어로 불편하고 무인시스템 기계로 불편해진 세상이다. 게다가 대면 접촉을 피하면서 영업을 할 수밖에 없으니 비대면환경이 그 고통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인건비를 줄이자면서 등장한 배경이 불가피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보완이 필요하다. 기계가 편의성을 가져왔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소외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놓친다면 또 다른 차별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행정기관이 보완해야 할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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