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필의 숨결] 웃픈 소동의 주인공은 나다
[노영필의 숨결] 웃픈 소동의 주인공은 나다
  • 노영필 교육평론가
  • 승인 2021.03.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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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다. 동아리활동 시간 준비가 공중부양 상태다.
주말 내내 걱정으로 부담감이 컸던 모양이다.

아무리 뒤져도 담당부서의 무슨 지침이 있었을텐데 내가 갖고 있는 정보가 없다. 금요일 받았던 “동아리 시수 배정표를 참고하셔서 원격수업 준비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은 이해되지 않은 난수표였다.

기존 방식이라면 자기가 설강한 프로그램으로 참여한 동아리에 들어온 명단을 받아 학생들과 계획서를 작성해 운영하면 되었다. 코로나19로 집합 형태를 최소화시켜야 한다는 지침이 혼란의 출발이다. 단발적인 정보제공과 코로나19 방역지침, 그리고 놓친 정보가 원인이다.

되짚어보니 내 잘못이 많았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점, 배정된 반의 활동 주제를 공유하지 못한 점, 과거방식에 얽매여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점, 개별 자료를 재구성해 적응력을 찾지 못한 점 등이 원인인데도 밖에서 탓을 찾은 것이다.

부서 역시 과거와 차이, 구성원들의 변화를 의식해 맥을 짚었으면 좋으련만 바빠서 빠뜨린 모양이다. 일을 안 한 것이 아니다.

낱개로 던져진 가이드라인을 받은 내가 종합해서 이해하지 못한 순간, 없는 가이드라인처럼 취급한 내 탓이 크다. 거기다가 어느 반도 수업 수 시간 전까지 e학습터에 오픈되어 올라온 프로그램이 없었다.

배정된 반에 수업을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서 무척 당황스러웠다. 어느 반에선가 먼저 올라오겠지, 올라온 자료가 있으면 눈치껏 요령을 추리하고, 그 유사품을 만들 수 있겠지 싶었다. 동아리활동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았는데도 상황은 오리무중이었다.

수습을 위해 찾아 나섰다. 담당부서에서 설명한 내용은 더 혼란스럽다. 회의를 했다고 설명했다. 변방에서 근무하는 나로선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 속으로 은근히 부화가 치밀었다.

회의라니 같은 실에서도 방송을 들은 적이 없다고 확인됐고 메신저를 받은 적도 없단다. 회의에서 내린 결론은 “투입된 교사가 알아서 올리기로 합의했다”고만 설명했다.

갈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다. 담당 선생님은 모이자고 안내를 했는데, 많은 선생님들이 모이지 않았을텐데 나만 불편을 호소했다면 멋적은 일이다.

그래도 내 이기심은  담당자가 탓하는 감정노출보다 수고롭더라도 사후수습을 위해 정리된 안내가 더 필요할 일이라고 불평하고 있다.

“알아서 한다”는 맥락없는 지침앞에 나만 극도로 혼란스러워했고 몇 사람은 진짜 “알아서 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나름의 정보를 가지고 자기 질서를 만들고 그 결과로 알아서 한 셈이다.

나만 정리하지 못한 먹통이 된 채 나만 온통 무능한 꼴이었다. 부끄럽게도 해결을 위해 조용히 방법을 찾은 게 아니고 시끄럽게 떠들고 다닌 셈이니 말이다.

한쪽에서 누군가 그랬다. “소통 소통”이라고 말했다. 맞다. 누군가의 잘못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느낀 것은 사안 앞에서 구성원들이 눈치껏 알아서 하는 문화가 무섭다는 혼란이 머리를 채워왔다.

누군가는 대응하고 누군가는 대응하지 못하는 시스템의 혼란이 중심에 있다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 것. 기존에 근무했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적응경험이 있어서 당황하지 않은 것도 놀라웠다.

나만 다른 학교의 관성에 지배되어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흔히들 학년실에 있어야 학교 적응력이 높다고 말한다. 학생들을 일선에서 맞닥뜨릴 상황이 많아 금방 수습책을 찾을 수 있는 현실감 있기 때문이다.

노영필 교육평론가.
노영필 교육평론가.

내 머리 속에는 잔상처럼 남는다. 왜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고들 느꼈다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을까? 그 혼란을 부추기는 시스템을 바로잡아야 서로 윈윈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의문이 크게 다가왔다.

그냥 알아서 각자도생하는 방식이었을까? 눈치껏 살아남는 방식, 이 매너리즘이 조직의 생명력을 가장 갉아먹는 강력한 좀같은 역할을 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기존 생리 뒤에 코로나19까지 겹쳐 만든 혼란이 더 크게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맘편하게 정리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혹시 전체를 보는 통찰력이 필요하다면 나는 그 혼란을 막을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사소(?)한 사건 속에서 나의 헤프닝과 동료들의 발빠른 적응력의 차이를 통해 또 한번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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