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한국 이민자 가족의 삶으로 다뤄내는 보편적 가족 이야기 -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

영화의 첫 장면은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있는 데이빗(앨런 김)의 클로즈업된 얼굴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쇼트에서 카메라는 앞서 가고 있는 트럭의 뒤꽁무니나 인사이드 미러로 비치는 모니카(한예리)의 얼굴을, 또는 차창 바깥의 풍경 등을 보여주는데, 이때 쇼트가 전환될 때마다 어떤 때엔 데이빗의 시선에서 또 어떤 때에는 인물의 시선과 일치하지 않는 위치에서 대상을 바라본다.

주인공의 얼굴로 시작해 마치 그의 시선마냥 차 뒷좌석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카메라. 비록 오프닝 시퀀스가 오로지 데이빗의 시선과 일치하는 쇼트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나 <미나리>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이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에도 영화는 시선의 주체를 관객에게 끊임없이 확인시켜 준다.

특히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영화는 컷 어웨이를 통해 시선의 주체를 드러내는데, 이를테면 순자(윤여정)가 한국에서 고춧가루와 멸치를 바리바리 싸온 걸 보고 모니카가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을 말할 수 있겠다.

이 장면은 화면 한 편에 벽이 배치되어 있고 다른 편에는 두 인물이 있는 방을 좁은 면적으로 보여주는데,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 이들을 엿보고 있는 것처럼 찍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리액션 쇼트에는 방 바깥에 선 데이빗을 보여줌으로써 가족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는 주체가 그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 외에도 카메라는 문틀 너머로 인물을 찍거나 비교적 낮은 위치에서 인물을 올려다보는 등 아이의 시점에서 가족의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나 인물의 시선이 곧 데이빗의 시점이라는 도식은 영화 후반부에서 깨지게 된다. 제이콥(스티븐 연)이 수확한 농작물을 보관한 창고가 순자의 실수로 불타 없어지고, 그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다음 가족들이 거실 한 가운데에서 잠들어 있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자동적으로 5인 가족 중 누가 빠졌는지를 셈하게 된다. 거실에 누워있는 사람 중 순자만 없다는 사실과 함께 그녀는 어떻게 된 걸까 생각이 드려는 순간, 영화는 부엌에 앉아 잠든 가족을 멍하니 바라보는 순자를 보여주며 방금 전 쇼트가 순자의 시선과 일치하는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데이빗의 시선이 종종 드러나던 영화에 유일하게 다른 주체의 시선이 허락되는 순간이다.

생각해보면 순자는 아칸소라는 공간에서 유일한 타자다.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녀는 제이콥과 모니카처럼 병아리의 암수를 감별하러 부화장에 나가지 않고, 앤(노엘 조)과 데이빗처럼 자발적으로 교회에 가지도 않는다.

여기에 데이빗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보통의 그랜마와는 다르게 쿠키 만드는 법도 모른다. 그녀는 다른 가족 구성원과는 달리 아칸소라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일련의 경제적 또는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또는 못하는) 존재로, 미나리를 심은 냇가만이 그녀가 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나설 수 있는 공간이다.

순자가 잘 자란 미나리를 보며 수확하는 동안, 데이빗은 물가 건너에 뱀을 보고 돌을 던진다. 그런 데이빗에게 순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이라며 말린다.

관객은 보이는 것만 감추거나 쫓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데이빗의 생각을 이전 장면에서도 본 적이 있다.
 

데이빗이 잠자는 사이에 이불에 실수를 하고나서 침대 밑에 속옷을 숨기는 장면이나, 제이콥과 모니카가 싸우자 앤과 데이빗이 전에도 해본 것처럼 싸우지 말라(Don't fight)는 글자를 눌러쓴 종이비행기를 그들 사이로 날리는 장면을 말이다.

그러나 감추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데이빗이 침대 밑에 숨겨놓은 속옷이 얼마 가지 못해 모니카에 의해 발견되는 것처럼, 타지에서 가족이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제이콥과 모니카가 일시적으로 눌러둔 갈등도 종국에는 폭발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일들이 기적처럼 찾아온 직후에.

<미나리>에서 인물 간의 갈등이나 인물이 바라던 일은 개인의 능력 바깥에 놓여있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각자의 자리에서 잘해보려 노력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성과는 기대만 못하고 그들은 지쳐갈 뿐이다. 개인의 능력 밖에 있는 건 악재 말고 기적도 마찬가지다.

기적은 그 본뜻대로 개인의 능력이 아닌, 어떠한 서사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채로 데이빗의 심장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관객은 데이빗이 순자 품에서 잠들고 난 다음날 그의 상태가 전과는 달라졌다는 걸 짐작할 뿐(데이빗이 매번 잠자리에 하던 실수를 그날 아침엔 하지 않는다), 그것이 데이빗 심장의 건강과는 직결되진 못한다.

차라리 순자의 말마따나 어렸을 땐 약할지 모르나 자라면서 낫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어디서든 알아서 잘 자란다는 미나리처럼, 일의 좋고 나쁨을 떠나 일어나게 될 일은 결국 자연스럽게 발생한다는 것이 <미나리>에 담긴 순리이다.

다시 거실에 잠든 가족을 바라보는 순자의 장면으로 돌아와서. 이 장면을 두고 이질적이라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여럿이 될 수 있다. 시선의 주체가 데이빗에서 다른 이로 이탈했다거나, 봉합에 실패한 가족이 어떻게 갑작스레 유대를 이루고 있는지 서사적 개연성을 건드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장면의 이질감을 품어가며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그것이 순자라는 가족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타자의 시선으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순자의 실수로 제이콥의 창고가 불에 타고, 그녀는 가족을 떠나려 했지만 같이 살자는 데이빗의 말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서로 다르지만, 그래서 앞으로 살다보면 갈등이 있을 건 어쩌면 불 보듯 뻔하지만, 그럼에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족임을 인정하는 장면이다.

같이 살자는 데이빗의 말이 있었기에, 순자는 집으로 돌아오고 가족은 그들이 아칸소의 새 집에 이사 온 첫 날 제이콥의 말대로 거실에서 함께 누워 잠이 든다. 갈등의 봉합 실패에도 여전히 가족일 수 있는 기적. 데이빗의 순수한 요청에 담긴 힘이 <미나리>에 기적 같은 순간을 허락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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