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원형 고향 진도... 문학들 시선집 펴내

신념의 생은 푸르다. 그 푸른 길을 지키며 걷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박현우시인은 시 보다는 사람의 곁에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

그래서 강산이 세번 바뀐다는 침묵의 시간 후에 박현우의 시인의 시들이 세상에 나왔다. 시인은 꽃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가시밭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말이 가슴에 남아 있었다.

박현우 시집 '달이 따라오더니 내 등을 두드리곤 했다' 표지 그림. ⓒ문학들
박현우 시집 '달이 따라오더니 내 등을 두드리곤 했다' 표지 그림. ⓒ문학들

시는 시인을 닮고 시인도 시를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살아온 만큼 시를 쓴다는 말도 있다. 최근 시집 <달이 따라오더니 내 등을 두드리곤 했다>(문학들)를 펴낸 박현우 시인과 그의 시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의 고향은 진도다. “철선에 기대어/물보라 이는 진도 벽파항”을 등지며 “새 운동화 끝을 조일 때/아득히 멀어졌다 고향은.” “선술집 창가에서/멀리 바라본 하늘가/둥근 달이 따라오더니/내 등을 두드리곤 했다”(「달이 따라오더니 내 등을 두드리곤 했다」)

흔히 고향은 삶의 원형이라고 한다. 고향에는 부모와 일가친척이 있고 한몸처럼 자란 이웃이 있고 내일을 바라던 꿈이 있다. 고향이 익숙하고 아늑한 세계라면, 마음을 다잡아 끈을 조여 맨 “새 운동화”, 그러니까 고향 밖의 삶은 낯설고 아픈 세계다.

고향을 떠난 박 시인은 광주에서 대학을 나왔고, 1980년 5월 항쟁을 겪었으며,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신산한 세월의 부침과 간극 사이에 이번 시집의 시가 자리한다.

“뼈 부스러기를 들고/저만치 선산이 내려다보이는/원포리 선착장에 다녀온 후/이른 아침 부은 눈으로/더 초라해진 나를 봅니다.”(「원포리 메꽃」).

혈족의 뼈 부스러기를 고향 바다에 뿌리며 더 초라해진 자신을 떠올리거나 팥죽집에서 “노모께 팥죽을 떠먹이는/백발의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어머니 생각에 “내 가을은 눈물 빛이다”(「내 가을은 눈물 빛이다」)라고 노래한다. 그뿐인가. 대학 시절 신은 ‘나’의 고무신을 고향집 토방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노모에게 “아니고 엄니, 무슨 신줏단지라고/저걸”(「검정 고무신」) 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거나 길을 가다 들려오는 옛 함성의 노래에 “익숙한 가락은 몸이 먼저 움직이지”라며 상처와 사랑의 금남로를 되새기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그의 시에 추억과 아쉬움과 애절함의 정서만이 넘칠 것 같지만, 아니다. 갈치 몇 도막을 안주 삼은 술자리에서 “슬며시 간을 보는 것들”에게 그는 술잔을 건네며 한 마디 던진다. “그런다고 바다를 안다고는 말하지 마라” “온갖 양념 버무려진 토막 난 의식보다/등가시를 바르고도 남은 살점을 지탱한/큰 가시의 중심에 머무는 맛을 말하자”(「갈치에 대하여」)라고.

박현우 시인. ⓒ문학들
박현우 시인. ⓒ문학들

그는 어느 날 거울을 닦는다. “나를 보는 너는 내가 아니다/지울수록 선명한 너의 맑은 눈/더 흐려진 내가 너를 닦는다”(「거울을 닦다가」).

그는 단정하는 시인이 아니라 반성하는 시인이다. 그 반성과 겸허와 포용의 시선 위에서 숲의 절정은 더 이상 초록이나 단풍이 아니다. 문명의 그늘에서 연명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캬, 저만큼 소나무 밑에 쪼그려 앉아/그윽한 눈길을 주는”(「맹감나무에 찔렸다」) 길냥이다.

김준태 시인은 “박현우 선생의 시는 그가 살아온 세월을 잘 빗질한 듯이 어디 한군데 헝클어짐이 없다. 그의 고향 바다에 철썩철썩 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하늘의 달빛도 받아 아늑함을 준다.”고 시평을 내놨다.

박현우 시인은 전남 진도 출생으로 조선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 보문고에서 국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9년 아내인 이효복 시인과 부부 공동 시집 <풀빛도 물빛도 하나로 만나>를 펴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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