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총기회수를 톺아보며

“우리도 애국 좀 합시다! 당신들만 애국자요!” 이 말은 전교조 초대 위원장이었던 윤영규선생이 5공 청문회 광주특위 증인으로 나와 했던 말이다.

내용인즉슨 518 당시 총으로 무장한 노동자들(넝마주의로 추측)에게 당신들 때문에 폭도로 몰려 다 죽게 생겼다며 총기 회수를 요구했는 데 그들이 거부하면서 이와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이 총기를 회수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갈무리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이 총기를 회수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갈무리

계엄공수부대의 학살 만행에 맞서 광주시민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자연발생적인 무장, 그 무장이 누군가에게는 폭도가 되는 길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애국의 길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6.25와 빨치산을 제외하고 419에서도 6월항쟁에서도 그리고 촛불정국에서도 결코 민중들이 총을 든 적이 없었다.

오직 518 광주 민중들만이 무기고를 털고 총으로 무장했다. 그것도 준비된 혁명조직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총을 든 것이다.

아무 죄 없는 부모 형제가 총칼에 죽어가는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기는 매 한가지, 어차피 죽을 바에야!’ 당시 광주시민들의 피를 토하는 심정은 예비군 무기고로 향하게 했고 그 만큼 공수부대의 만행이 잔악무도했다는 반증이다.

1980년 광주 금남로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진압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광주 금남로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진압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아마도 518 묘역을 찾는 참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오월열사는 윤상원 묘일 것이다. 너무도 많이 알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지만 5월 항쟁에서 보여준 윤상원 열사의 투혼은 결코 노래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다.

5월 22일부터 화순 장성 나주 인근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투쟁을 벌인 덕택에 계엄군은 광주 외곽으로 쫓겨났고 잠깐의 해방 광주는 '무기 회수'를 놓고 치열한 내부 투쟁이 전개된다.

전남도청 부지사, 목사, 신부, 변호사 등 이름있는 명망가들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는 학살계엄군에게 돌려주자며 무기를 회수했고 발포 책임자 처벌, 보복금지, 피해보상 등 7개 요구사항을 들고 계엄군을 찾는다.

그러나 계엄군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무조건 무기반납’ 뿐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다.

1980년 5월 27일 당시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던 시민군들이 계엄군에 체포돼 끌려나오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 27일 당시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던 시민군들이 계엄군에 체포돼 끌려나오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이에 반해 또 다른 한편에는 아스팔트에서 싸워온 투쟁파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총기 회수를 굴욕적인 항복이라며 거부했다.

이 투쟁파의 대부분이 노동자 민중들이었고 윤상원열사 또한 투쟁파의 일원이 되어 들불야학 노동자들과 함께 전열을 가다듬는다.

결국 5월 26일 무기 회수와 반납을 추진한 수습대책위는 도청 광장에서 시민들의 불신을 받고 쫓겨나게 되고 투쟁파 중심의 새로운 항쟁지도부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리고 도청의 마지막 항전은 윤상원과 투쟁파들만의 몫이 되며 5월 27일 17명의 시민군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다.

반면 도청에서 철수한 무기회수파는 모두 살아남게 되며 일부가 군사재판에 회부 되지만 곧 사면된다.

물론 마지막 도청을 함께 지키지 못하고 살아남은 것에 괴로워한 사람들도 있고 평생을 죄책감에 살아온 사람들도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된 시민들이 망월동 묘지에 매장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그러나 무기를 들지 않아도 죽고 무기를 들어도 죽는 학살현장에서 무기회수가 과연 옳았는지, 도청의 마지막을 지킨 윤상원열사들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까지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광주항쟁의 무기회수 문제, 이 불편한 진실들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광주는 늘 계엄군의 만행에 대동단결 하나였다고 고립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게 싸운 저항의 도시였다로 채워진다.

그러나 ‘총기 회수’ 문제는 뜨거웠던 5월 항쟁에서 가장 치열한 생사를 가르는 결단의 문제였다.

만약 모든 무기를 회수하고 무장을 포기한 채, 계엄군에게 투항했다면 우리는 광주항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 한국 민중들만이 아니라 전세계 민중들에게 지금 같은 찬사와 울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2020년 5월 옛 전남도청 전경. 5.18광주민중항쟁 최후의 항쟁지 엣 전남도청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면서 처참하게 파손돼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광주인
2020년 5월 옛 전남도청 전경. 5.18광주민중항쟁 최후의 항쟁지 엣 전남도청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면서 처참하게 파손돼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광주인

‘무장봉기의 패배는 곧 죽음이다.’라고 한다. 마지막 도청의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총구에 난자될 것임을 알았고 그렇게 죽어갔다.

광주가 다 죽게 되었고 운동권의 싸가 말랐는가? 역사는 도청의 윤상원들을 승리자로 기록하고 있으며 산 자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랐고 운동권은 전국으로 확대되 87년 6월항쟁의 조직적 밑바탕을 이룬다.

광주시민을 살린 진정한 애국의 길, 총기 회수였는가? 아니면 결사 항전이었는가? 당신이라면 어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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