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문 [전문]

성평등 세상을 바라는 시민이 정의로운 세상을 여는 시민에게

배)이상헌 사건 담당 검찰시민위원회 위원님들께 드리는 글 -
 

정의롭고 공정한 시민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시는 검찰시민위원회 위원님들께 먼저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성평등교육과 배이상헌을 지키는 시민모임’입니다. 전국 수 백명의 시민사회 활동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스쿨미투를 왜곡하는 행정폭력에 맞서고 성평등교육을 지키기 위해 모였습니다.

배이상헌 선생님이 직위해제 된 지 300일이 넘었습니다. 곧 풀릴 일인 줄로만 알았지 한 교사와 그 가족의 목을 잔인하게 옭아맨 채 이 사건이 이토록 질기게 이어질지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해 11월 11일 광주광역시교육청 앞에서 '배이상헌 선생의 직위 해제 철회와 시교육청의 행태 규탄 기자회견' 중에 배이상헌 교사(오른쪽에서 두번째) 가 발언 하고 있다. ⓒ광주인
지난해 11월 11일 광주광역시교육청 앞에서 '배이상헌 선생의 직위 해제 철회와 시교육청의 행태 규탄 기자회견' 중에 배이상헌 교사(오른쪽에서 두번째) 가 발언 하고 있다. ⓒ광주인

(수치심을 느낀 학생이 있다는 이유로) 교육과정상 시행된 성평등 교육을 성범죄로 단죄하는 일은 (수술에 위축된 환자가 있다는 이유로) 정통한 수술법에 근거해 외과 처치를 한 의사를 강도로 처단하는 것처럼 부조리하고 몰상식한 일입니다.

우리 시민모임이 바라는 정의는 결코 정교한 논리로 헤아려야 비로소 보이는 정의가 아니라, 의사의 칼과 강도의 칼을 구분할 만큼의 논리와 상식만으로도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정의입니다.

하기에 배이상헌 선생님의 혐의가 정의의 저울에 오르는 순간 그의 죄는 증발할 것이되, 이 자리까지 그를 몰아세운 행정폭력의 죄는 엄중한 책임의 벽 앞에 서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정의를 향해 나아갈 검찰시민위원회의 판단을 응원하기 위해 이 사건의 몇 가지 중요 사항을 환기한 후 이 사건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과제가 주어져 있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배이상헌 선생님을 범죄자 취급하면서도, 무엇이 죄이고 이 죄를 처벌해서 앞으로 어떤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고 있지 못합니다.

배이상헌 선생님은 거의 신고 당하자마자 수사의뢰 되었습니다. 교육청은 소명 기회를 주기는커녕 무슨 혐의인지 말해 줄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행동했습니다. 범죄가 끔찍하고 명백할 때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조치에 이은 단죄도 신속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300일이 지난 지금까지 누구도 ‘배이상헌은 어떤 죄를 지었고, 그를 처벌함으로써 앞으로 어떤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명쾌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간 교육청이 붙인 꼬리표는 ‘성범죄’였는데, 경찰은 ‘아동학대’로 바꿔 달았을 뿐입니다. 다만, 이 기간 자체가 배이상헌과 그 가족들에겐 혹독한 처벌의 기간이 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둘째, 처벌의 이유와 근거가 모호한 사이 우리나라 도덕(성평등) 교육은 꽁꽁 얼어붙고 있습니다.

2020년 4월 전국도덕교사모임에서 전국의 도덕교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압도적 다수(응답자 85%)가 ‘수업 목적상 충분히 사용 가능한 자료’이며, 설사 ‘부적절하더라도 사법적으로 풀면 안 된다’고 답했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전국 도덕교사 대다수가 배이상헌 사건 이후 ‘비슷한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거나,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교과서를 최소한으로만 다루겠다’고 마음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공교육의 심각한 붕괴입니다.

한편, 도덕 교사들이 성윤리, 성평등 수업을 할 때, 가장 어려운 점으로 ‘성담론談論을 공개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한 거부 정서’를 꼽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셋째, 전국의 내로라하는 여성학자를 비롯한 각계 지성인들이 이 사건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전국 시도교육감 협의회 의장인 김승환 전북 교육감은 “교육과정 속에서 발생한 일이라면 일단 교사를 보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업권은 교사의 권한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이 사건에 대해 일갈한 바 있으며,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해당 교육청 관계자들이 얻고자 하는 건 제대로 된 성평등 교육인가, 아니면 민원인에 대한 성실한 대응인가? 그럼 대체 교육은 누가 어디서 하나? 묻지 않을 수 없다” 고 지적하면서 ‘거꾸로 가는 광주시 교육청’이라 비판했습니다.

최근에는 김누리 교수가 배이상헌의 직위해제로 “한국의 성교육이 직위해제 당했다”면서 “배이상헌이 명예롭게 다시 교단에 돌아오는 것에서 (올바른 성교육이) 출발해야 한다”고 장휘국 교육감의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

이 사건 관련 형사적 판단을 머뭇거리는 동안 각계각층 - 여성학자 강남순 교수, 성폭력상담소 부소장 김혜정, 윤조원 교수, 역사학자 백승종 교수 등 –의 비판의 목소리가 쌓여 넘쳐흐르는 상황입니다.

이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넷째,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건 발단이 된 영화를 만든 감독 엘레노어 프리아 감독은 한국 언론에 보낸 편지에서 학생들에게 “폭력을 알려준 사람과 싸우지 말고 세상의 폭력과 싸우자”고 호소한 바 있으며,

프랑스 최대의 중등교사 노조(SNES-FSU) 역시 배이상헌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뜻을 강력하게 표명한 상태입니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한 국제 서명 운동에 전 세계 각국의 시민활동가 111명이 참여한 바 있습니다.

성교육 후진국, 인권 후진국, 행정 후진국의 멍에를 벗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본 사건이 명쾌한 논리로 정리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우리나라 최대 교사노조인 전교조가 투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입장 발표가 있었고, 전교조 최고회의인 전국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 175명의 참여로 이 사건 관련 특별결의문을 발의 중입니다. 이 정도 규모가 사전 발의에 참여한 것은 전교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배이상헌 사건이 더이상 교육 갈등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막고, 공교육의 기반을 흔들지 않도록 검찰 당국의 신속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지난해 말, 광주시교육청 산하 시민참여단에서는 광주시 교육감에게 ‘스쿨미투 권고안’을 전달한 바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권고한다는 것은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으라’는 요구입니다.

하지만, 광주광역시 교육청은 ‘검찰 조사 중’이라는 핑계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사회는 광주 교육청의 폭력 행정에 한번 놀란 바 있고, 이제는 어리석을 정도로 고집스러운 불통 행정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검찰이 이 같은 광주시 교육청의 무책임 행정, 불통 행정, 폭력 행정의 보호막이 되어선 안 됩니다.

게다가 광주광역시 교육청이 저지른 행정폭력은 ‘성평등 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불평등한 사회를 가속화하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성 불평등, 성 엄숙주의를 풀려는 수업 언어조차 광장에서 내쫓는 일은 결국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여성의 성, 청소년의 성을 억압하고, 대상화하고 착취하라는 명령으로 종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N번방의 괴물들이 탄생하도록 방임하는 짓이기도 합니다.

귀 위원회의 결정은 ‘성, 성교육,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권고가 될 것이며, 이에 대한 사회적, 교육적 논의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모쪼록 이 사건에 겹겹으로 얽혀 있는 부조리를 풀어서 검찰 시민위원회가 정의의 물꼬를 트는 데 중요한 결정을 내려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2020. 5. 27.

성평등교육과 배이상헌을 지키는 시민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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