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이야기>

  신라시대의 정원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거의 없다. 문무왕 14년(674)조의 ‘궁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다’는 안압지 관련 기사가 전부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391년(진사왕 7년), 500년(동성왕 22년), 634년(무왕 35년) 조 등에 보이는 백제의 궁궐 정원 조성 기록과 대비된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경주에서 원지(苑池·정원 연못)가 잇따라 발굴되면서 신라도 백제 못지않은 정원을 조성한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2004년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동편 외곽의 '황룡사지 전시관(皇龍寺址 展示館)' 건립부지내 유적에 대한 발굴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원지와 축대, 배수로, 정원의 외곽 담장, 우물 등 중요 유적과 금동판불(金銅板佛) 등 각종의 중요 유물이 확인되었다.

 유적이 분포하는 지역은, 자연지형의 고저에 따라 통일신라시대에 원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쌓은 석축 축대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유적의 성격도 구분되는데, 대체로 남쪽은 원지와 관련된 전각(殿閣) 등 건물지와 청동기시대의 집터 등이 확인되며, 동북편으로 원지, 서북편으로 건물지가 밀집 분포하고 있다.
 
  원지 내에는 2개소의 인공 섬과 호안석축으로 구성된 연못 유구를 비롯하여 그에 따른 出水口, 배수시설, 담장, 출입시설 등이 있고, 건물지가 밀집된 서북편에서는 담장으로 구획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1∼2채와 그에 따른 마당, 보도, 배수로, 우물 등이 단위를 이루어, 당대의 가옥 구조를 규명할 수 있는 학술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연못의 전체면적은 325평으로서 안압지 면적(4,737평) 약 1/15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북쪽의 큰섬은 112평 면적의 부정형이며, 남쪽의 작은섬은 둘레의 원형이고 57평의 면적이다. 호안석축 상단에서 바닥까지의 최대 깊이는 1.6m에 이른다.

 이렇듯 자연지형에 순응하여 조성한 축대를 포함한 원지는 뛰어난 조형성과 예술성을 내포하고 있다. 축대 상층의 전각에서 연못을 바라볼 때, 작은섬 주위의 남쪽부분에는 미적 감흥을 배가시키기 위하여 대형 석재의 사용과 함께 怪石 등의 조경석을 집중 배치하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조망이 쉽지 않은 큰섬 주위의 북쪽에는 소형 냇돌로써 질박하게 축조하였다. 연못 내부에는 각종의 건물부재(초석, 와당 등)가 매몰되어 있어 축대 위에 전각 등의 건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나 오랜 세월 경작 등에 따라 부지가 깍이고 평탄화하여 확인이 쉽지 않다.
 
  이 원지는 7세기 초·중반에 만들어진 안압지와 용강동 원지보다 축조시기가 앞서는 것이라고 한다. 출토된 토기편과 와당 등 유물들이 6세기 후반이나 7세기 초반에 제작된 점으로 미뤄 원지의 축조시기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작은 정원이지만 이 유적에서는 또 화려하고 세련된 솜씨가 돋보이는 문양의 기와와 금동판보살좌상(金銅板菩薩坐像), 금동신장상(金銅神將像), 압수배(鴨首杯·오리머리 손잡이 잔) 등 1,330점의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정원의 품격을 말해준다.
 
  발굴조사단은 이 원지 유적이 분황사 동편에 잇닿아 있는 점을 주목하여,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創建)된 국찰인 분황사와 관련된 ‘사원’(寺苑)으로 추정했다. 또 원지의 규모, 호안 형태 및 축조 방법, 섬 등을 비교해 안압지를 동궁의 부속건축물인 궁원(宮苑)’으로, 용강동 원지를 귀족층의 대저택에 있는 ‘택원(宅苑)’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직 정원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신라 最古 정원의 성격이 드러나기까지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
 
 연못터에서 출토된 목편들의 수종을 조사하여본 결과 소나무, 주목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사철나무, 팽나무, 멀구슬나무, 노간주나무, 진달래속의 나무 등이 확인되었다. 근래에 들어 고고학적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역사유적공원의 조성이 보편화 되고 있다.

 그러나 종종 이러한 유적공원의 조경이나 造園에 사용되는 수목이 고증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복원되는 경우를 본다. 자연 그대로이거나 사람의 손으로 꾸미고 가꾸었거나 간에 나무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나름대로의 사연을 갖고 있으며,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의 유적에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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