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말에 화를 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상대방의 말이 자신에게 억울함을 불러일으킬 때다. 둘째는 상대방의 말이 맞을 때다.

지난 3월 11일 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법원에 출두한 전두환이 기자의 질문에 화를 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90세에 가까운 노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에너지 넘치는 샤우팅이었다.

전두환이 화낸 이유는 억울하거나 기자의 말이 맞아서일 것이다. 전두환이 자신의 주장대로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그래서 그가 정말로 억울했다면 그는 하루라도 빨리 광주법원에 출석해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려 했을 것이다.

ⓒ광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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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만 한 괴로움도 없으니 말이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억울함을 참지 못하며 자신이 억울한 일을 겪으면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행동한다.

전두환은 어땠나? 광주법원의 출석요구에 수차례 불응한 전두환은 골프를 치러 다니면서 아프다는 핑계를 내세워 재판 출석을 꺼려왔다. 이렇게 따져본다면 전두환은 광주법원 출두 당시 기자가 던진 질문이 맞는 말이기에 화를 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전두환은 유죄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전두환은 악마다. 악마는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안 느끼는 것이 아니다. 못 느끼는 것이다. 악마에게 악행이란 해가 지면 세상이 어두워지듯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가 진다고 잘못을 느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 체 여전히 각하 행세를 하며 40년을 살아온 전두환은 그래서 적어도 40년 동안은 악마다.

광주는 전두환을 브랜딩해야 한다. 브랜딩의 포커스는 ‘풍자’와 ‘성찰’이다. 전두환과 그를 지지하는 일종의 수구세력들은 앞으로도 반성을 못 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악행인지도 모른 체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

지난 3월11일 전두환씨가 광주지법에 출석한 후 법원을 빠져 나오자 시민들이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광주인
지난 3월11일 전두환씨가 광주지법에 출석한 후 법원을 빠져 나오자 시민들이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광주인

이에 맞서 싸우려면 웃음이 필요하다. 싸우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극심한 일이다. 그래서 분노와 같은 부정의 감정으로 싸우면 쉽게 지친다. 해학과 풍자라는 웃음의 코드를 바탕으로 싸워야 오래 싸울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악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기질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악한 기질은 끊임없이 관리해줘야 할 대상이지 개도할 대상은 못 된다. 전두환을 모델 삼아 우리 안의 악성을 발견하고 관리하는 일이 앞서 언급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작동시키는 동력은 극과 극의 대립과 모순으로부터 나온다. 선과 악의 대립도 이에 해당한다. 전두환과 같은 악은 세상을 작동시키는 동력의 일부이기도 하기에 전두환을 없앨 수도 없다. 전두환을 성찰의 자양분으로 삼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전두환에게 대화를 시도하거나 화를 내는 일은 사치이자 무지다. 우리는 악마와 대화하거나 화내지 않는다. 통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두환을 성찰의 자양분으로 삼는 정도일 것이다.

전두환 브랜딩은 또한 전두환에 대해 끊임없이 이슈를 제기하는 방법이다. 당장에 전두환을 법적으로 처벌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니 못하기에 우리는 전두환을 끊임없이 괴롭혀야 한다.

그가 여전히 각하 행세를 하는 것처럼 우리의 괴롭힘도 꾸준해야 한다. 그래야 5·18민주화운동의 망자나 유족 그리고 광주사람들의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후손들에게는 그나마 정의에 가까운 역사를 물려줄 수 있지 않겠나.

전두환 브랜딩의 가시적 실체 구축을 위해 필자는 광주에 전두환 박물관 건립을 제안한다. 전두환이라는 인물에 관한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접근 즉, 사실에 입각한 자료 전시와 전두환을 희화화한 예술 작품의 전시가 전두환 박물관의 콘텐츠가 되었으면 한다.

사실에 입각한 자료 전시는 우리가 전두환과 같은 인물이 되지 않기 위한 성찰을 위해 필요하다. 전두환 희화화는 전두환 괴롭히기의 연장 선상이라 할 수 있다.

법이, 제도가, 논리가, 이성이, 권력이, 자본이 하지 못하는 일을 예술은 할 수 있기 마련이니까. 예를 들어 전두환 박물관 입구에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사죄하는 전두환 로봇을 만들어 세우면 여러모로 의미 있지 않겠나.

ⓒ광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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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기억의 도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자신들의 만행을 잊지 않기 위해 도시 곳곳에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하는 기념조형물을 설치했다.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과감없이 드러내어 과거의 잘못을 끊임없이 뉘우치기 위해,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베를린은 도시 전체를 홀로코스트 박물관으로 꾸렸다.

광주라고 못 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가해자인 베를린과 달리 광주는 피해자이지 않은가. 전두환 박물관 건립은 결코 과한 안목이 아니다.

** 윗 글은 (광주아트가이드) 114호(2019년 5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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