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1일 역사적인 첫 열차의 출발시각은 새벽 5시 25분. 재깍재깍 움직이는 시계의 초침은 마치 우주선의 ‘발사카운트다운’을 연상시키듯 긴장과 초조,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가히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이란 별칭이 붙은 프로젝트답게 수많은 사람들이 12년 장구한 세월에 매달려 피와 땀과 열정을 바쳤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온 국민이 기대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책임감과 중압감은 조종간을 잡은 손에 땀을 고이게 만들었다.

아직도 잊지 못할 첫 열차 운행 감격

ⓒ코레일 누리집 갈무리
ⓒ코레일 누리집 갈무리

이윽고 출발시각이 되었다. 길게 기적을 울리고 서서히 조종간을 올렸다. 취재진과 정부 인사, 철도관계자의 환송을 받으며 400미터 길이의 육중한 열차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이내 가속이 붙었다.

새벽, 서울의 정적을 뚫고 어둠에 잠긴 한강을 가로지른 열차는 순식간에 영등포를 지났다.

광명역에 멈춰 승객을 더 태우고 마침내 새로 건설된 고속신선에 진입했다. 관제실에서 무전이 왔다. “첫 열차 운행 축하합니다! 안전운행 하십시오.”

다시 숨을 고르고 전방을 주시하며 가속레버를 최대 출력위치로 힘껏 밀어 올렸다. 긴장의 순간이 이어졌다. 과연 정해진 순서대로 무사히 시속 300킬로미터를 돌파할 수 있을까?

그동안 수많은 시험주행을 통해 내공을 다졌지만 지금은 객실에 수백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실제상황이다.

광주송정역에 들어서는 KTX. ⓒ광주인
광주송정역에 들어서는 KTX. ⓒ광주인

초조함 속에서도 눈길은 계속 속도계를 향했다. 297,298, 299……, 드디어 속도계의 지침이 정확이 300에 들어맞았다. 그럼에도 열차는 아무렇지도 않게 질주를 계속한다.

KTX가 개통된 지 올해로 열다섯 돌을 맞는다. 하지만 첫 열차 운행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나처럼 열차를 운행하는 기장이라면 누구라도 꿈꿨을 첫 열차 운행! 돌이켜 보면, 그 순간은 내 인생사의 황금률에 가까운 행운이자 터닝 포인트였다.

첫 운행을 무사히 마치자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서산대사가 남긴 명구였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땐 어지러이 걷지 마라. 네가 남긴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이 된다.”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시작된 한국 철도의 가혹한 역사

추석 귀향 열차 풍경. ⓒ코레일 사보 갈무리

지금부터 약 200년 전 철도의 등장은 세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단축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근대도시의 출현과 새로운 노동형태 그리고 여유로운 여가 생활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은 사람과 화물을 가장 편리하고 빠르게 운반했으며, 근대적인 삶과 정신, 정보와 문화를 세계 방방곡곡으로 실어 나르고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기차가 다니기 시작한 지 채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아 거대한 세계적 연결망과 교역의 네트워크가 구축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도가 삽시간에 세계의 축소, 근대의 완성이라는 위업을 이루어 낸 것이다.

철도는 근대 자본주의 형성과 발전의 견인차였다. 자연히 제국주의 열강들은 철도 부설권을 놓고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며 철도 건설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불행히도 우리 철도는 19세기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 지배도구로 시작된 슬픈 역사를 안고 출발했다.

국내 첫 철도인 경인선(1899)이 일제가 강화도조약에 따라 개항한 제물포항에서 서울로 가는 육상통로를 확보하려는 군사목적으로, 경부선(1905)과 경의선(1906)은 러일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참수송로 확보차원에서 속전속결로 건설된 철도들이다.

이 철로들은 과거 지방과 한양을 잇는 조선시대 9대 간선로를 고려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내려온 민족의 이동 동선을 철저히 무시하고 오로지 일제의 편의에 따라 건설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엔 호남선(1914), 경원선(1914) 이 잇달아 개통됨으로써 한반도를 X자로 관통하는 전체 철도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철도는 조선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광물자원을 일본으로 수탈해가기 위한 식민지 물류정책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이후 철도를 통한 조선민중의 수난은 말로 다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참혹했다. 대륙침략에 나선 일제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징병이나 징용, 혹은 위안부로 끌려갔으며, 전국에서 생산된 많은 물자가 기차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 열차 풍경. ⓒ코레일 사보 갈무리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피난 열차 풍경. ⓒ코레일 사보 갈무리

이렇듯 한국 철도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따른 인적, 물적 수탈수단이란 깊은 상처를 안고 달려왔다. 그렇지만 학자들 사이에선 그늘이 있으면 양지도 있다며 지나간 역사를 긍정하는 담론을 펴기도 한다.

비록 일제가 건설했지만 국토의 70퍼센트나 되는 산을 넘고 도처에 흐르는 강을 가로지른 철도 덕분에 지역 간의 문화와 의식격차가 해소됨과 동시에 기차가 실어 나른 신문명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자칫 ‘식민지근대화론’에 힘을 실어줄 수 있어 수용하기에 조심스러운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철도는 1960~198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로의 인구이동과 대량의 물류수송을 가능케 해 산업화와 도시화에 기여한 공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우리 철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식민지 시대 민족 수난을 불러 온 도구라는 불명예와 근대화, 산업화를 앞당긴 문명과 진보의 상징이란 영예가 두 가닥 레일처럼 팽팽하게 균형을 이룬다.

고속철도 개통의 역사적 의의

그 사이 우리는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이루었고, 한국 전쟁이란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하고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 세계 일류국가로 발돋움했다.

그 쉽지 않은 여정에서 우리 철도가 한몫 단단히 했음은 물론, 고속철도 개통 이후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편익을 국민 모두에게 선사하고 있다.

KTX개통 열다섯 돌을 맞는 올해 2019년은 3.1운동 1백주년을 기념하는 해지만, 이 땅에 기차가 다니기 시작한 1899년으로부터 꼭 120년, 즉 2주갑(周甲)을 맞는 역사적인 해이기도 하다.

이 뜻 깊은 한해를 보내면서 15년 전 고속철도 개통이 주는 철도사적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4월 1일 전국에 속도혁명을 일으킨 고속철도 개통은 우리나라 철도역사에서 가장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 이유는 과거 일제의 식민지배도구란 질곡의 역사를 가진 우리 철도가 그들의 손때 묻은 철도에서 벗어나 비로소 광복을 이룬 ‘철도의 광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존철도의 대부분이 일제의 손에 의해 건설됨으로써 ‘일제잔재’적 요소가 강한 반면, 고속철도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우리 자본과 기술로 만들어진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철도다.

ⓒ코레일 누리집 갈무리
ⓒ코레일 누리집 갈무리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발전상이 눈부시듯 그동안 고속철도의 발전상도 눈부시다.

처음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을 시작으로 2015년엔 호남선과 동해선, 2017년엔 철도교통의 오지였던 강원도까지 KTX가 다니게 되었으니, 바야흐로 KTX는 전국을 빛의 속도로 이어주고 현대인의 삶을 스마트하게 바꾼 신기술의 아이콘이 되었다.

KTX개통 15년을 회상하는 이 순간, 앞으로의 KTX에 더 큰 꿈을 실어본다.

당장 북으로의 끊긴 철길을 달려 통일의 초석을 마련하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통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여 거기에 부가가치로 딸려오는 우리 국민의 꿈과 행복까지 실어 나를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KTX는 오늘도 희망을 품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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