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유대인을 잡으러 온 나치군이 당신의 현관문을 두드린다. 당신은 유대인 이웃이 숨은 곳을 고자질했을까, 아니면 협력도 배신도 하지 않은 채 창문 너머로 불구경이나 하는 방관자가 되었을까? 혹시 용감하게 발 벗고 나서서 이웃을 다락방에 숨겨주거나 국경을 넘게 도와주었을까?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섰을까? (인용,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데이비드 뱃스톤, 나현영 역, 알마, 2010, 25쪽)

1980년, 백주 대낮에 총검을 든 군인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 중이던 학생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행인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있다. 당신은 그들의 만행을 피해 도망쳐오는 이들의 행방을 고자질했을까, 아니면 창문 너머로 불구경이나 하는 방관자가 되었을까?

지난 16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5.18망언 왜곡 광주시민궐기대회'. ⓒ광주인

혹시 용감하게 발 벗고 나서서 시민을 향한 무자비한 폭행을 멈추라고 외쳤을까? 당신이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1980년 대다수의 광주시민들은 세 번째 선택지인 ‘혹시’를 택했다. 그 ‘혹시’를 택한 결과는 끔찍한 보복과 학살, 그리고 폭도라는 누명이었다.

누명의 외투는 날카로운 붉은 가시로 지어져, 수많은 가시에 찔려 울부짖는 피투성이 광주는 더럽고 흉측한 빨갱이 괴물로 각인되었다. 다른 지역 시민들에겐 소름끼치는 기피 대상,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왕따가 된 것이다.

누명을 벗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혹시’를 다시 선택한 이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끈질기게 이어진 민주화 요구가, 대규모 민중항쟁으로 폭발한 1987년의 6월 항쟁이, 마침내 광주의 진실을 보게 해 주었다. 25년 만이었다.

ⓒ광주인

광주의 누명을 공식적으로 벗겨준 건 김영삼 정권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은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그게 한계였다. 자기 손으로 자기 손가락을 자를 수 없듯 군부독재 정권과의 연정으로 태어난 김영삼 정권은 학살 책임자의 사죄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했다.

광주 5.18관련 희생자의 복권과 피해보상이 법적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가해자의 처벌은 솜방망이로 그쳤고 책임소재 규명은 유야무야 되었다. 광주전남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김대중 정권은 정치보복이라는 프레임에 걸려들지 않으려 진정어린 사과를 받기도 전에 용서를 말했다.

사과 없는 용서의 결말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학살자 집단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유포하고 혐오와 배제의 언어로 피해자들을 조롱하면서, 당시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기념식에서 그날의 아픔을 전하는 노래조차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급기야는 학살의 주모자였던 자가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참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갔다.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일제의 심장부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이 터진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날, 그 후손들이 세운 대한민국에서 최대 야당의 일부 의원들은 그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대신 역사적 평가가 이미 끝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재규정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광주인
ⓒ광주인

저들이 아베와 다를 게 뭔가? 피해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종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꽃뱀에 다름 아니라는 식의 여론몰이를 해대는 아베 정권과 무엇이 다른가?

왜 광주는, 왜 호남지역은 보수우익을 표방하는 정당에게 그리도 매정하게 구느냐고 묻지 말라. 우리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한 일본을 좋아하기 어렵듯, 5.18 학살을 경험한 이들로선 그 주체적 행위자들을 옹호하는 정권에 호감을 갖기 어렵다.

진심으로 잘못을 사과하더라도 용서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 피해를 과장하여 보상금을 뜯어내는 세금도둑이라느니, 북한군 개입에 동조하여 폭동에 가담한 좌파 빨갱이니 하는 등의 왜곡에 앞장서는 행태를 보며 어떻게 호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진 솔내음문학연구소장(소설가).
이진 솔내음문학연구소장(소설가).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만약 또 그런 쿠데타가 발생한다면 어찌 될까? 1980년에는 광주였지만 다음에는 대전이 될지 인천이 될지 대구가 될지 누가 아는가?

광주가 요청한다. 개헌 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3.1운동과 4.19의거,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에 분명하게 밝혀 달라! 국가권력에 의한 국민의 희생이 더는 발생하지 않도록, 부도덕한 국가권력에 기생하여 부화뇌동하는 자가 선조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민주 가치에 더는 먹물을 뿌리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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