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섬진강 매화는 일상에 지친 도시인들의 발길을 부산하게 끌어들여 한사코 묶는다. 화엄사 길목 산수유도 질 새라 화들짝 질투어린 고혹을 뽐내고 있다. 동백은 또 자기가 먼저 피었다며 수줍은 내주장을 하기 바쁘다. 꽃의 바쁜 손짓을 보고서야 비로소 봄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내 시간감각은 늘 접촉 반사적 뒷북치기의 지각을 면치 못한다. 

 나의 꽃에 대한 시각은 내내 이런 식이었다. 가령, 상사화에 관한 시를 쓸 때는 붉은 피나 불, 나체 등, 꽃과 동떨어진 표현이 대부분이어서, 시에는 꽃도 시인도 없고 왜곡된 상징의 빙의에 끌려 다니는 일방적 타성뿐이었다. 하나의 엄연한 꽃을, 그 눈부신 정염과 고혹을 불러 함께 놀지는 못할망정 웬 억하심정으로 전쟁이나 혁명, 상사병, 실연과 안질 따위의 상투적 은유를 덧칠하기에 급급해온 것이다.
 
 그것은 꽃에 대해서나 자신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어줍잖은 내 시를 읽어주는 독자들에게  엄청난 결례였다. 차라리 범죄였다. 그토록 힘들여 핀 꽃을 최소한 그보다 더 아름답게 묘사하는 게 자연의 노고에 대한 예의이고, 각박한 세상의 피로와 무료를 잠시 꽃으로 씻는 싱그러운 시선들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꽃씨 하나 심지도 가꾸지도 못한 주제에, 저희들끼리 저절로 눈부신 대자연의 축제를 일부러 희화화하고 비틀고 재를 뿌렸으니, 아무리 창조적 상상력 운운하며 독자들과 시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나누기 위한 불가피한 전략이었다고 변명해도 여전히 자연을 훼손한 원천적 죄는 남을 수밖에 없다.

 창작을 빌미로 인간의 한계로는 감히 근접할 수 없이 심오한 자연의 조화로운 언어를 파괴하며 무궁무진한 진선미의 내재율을 훼손하는 엽기와 파격은, 아무리 기발한 흥미를 유발하여 일시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끈다해도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혼탁하고 피곤하게 할 뿐이다.

 부질없는 참견으로, 사물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갈고 닦은 본연의 미학을 일거에 난도질해 버리는 언어적 살해는 시인이나 작가가 가장 경계해야할 패악이다. 미와 추에 대한 해석은 언어의 소관이 아니라 직관과 침묵의 소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언어의 마술사들이 사물과 언어의 경계를 헤매다 언어도단의 늪에 빠지고 말았던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생의 대부분을 추상적이고 공허한 언어의 남발 그리고 그 뒷수습에 허비해왔다. 그리고 인형이나 애완동물을 갖지 못한 어린 시절 놀이에의 연습이 부족했기에 자라서도 놀이에 서툴고 소홀하고 인색하기만 했다. 멀쩡한 들것을 화분 속에 가둔다는 게 뭣하고 꼬박 꼬박 물을 챙겨 먹일 자신도 없어서, 난 한 분 맘놓고 치지 못한 탓으로 꽃과 진지하게 통정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생화와 조화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이었다. 산에서는 집을, 집에서는 또 산을 밝히다가 집도 산도 다 놓치고 마는 떠돌이 중처럼, 일도 놀이처럼 하는 새를 보면서도 놀이조차 일이라고 꾸역꾸역 해온 어리석음이 내 만성 피로증후군의 병상일지였다. 그리하여 ‘꽃 보기’는 분명 놀이인데도, 일로 착각하여 모진 오해와 모욕을 가한 것이다.

 사방에 널려 있는 꽃과 놀다보면 아름다움과 향기에만 취하려해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을 잊은 탓이었다. 오늘만 해도 별로 눈여겨본 적 없는 사방의 꽃망울들이 무심코 지나치려는 발길을 붙들고는 제 꼴이 어떠냐고 묻는다. 우선 눈에 밟히는 대로 곱다고만 했다. 다음엔 바짝 다가서서 아무 말 말고 흠씬 코를 묻어야겠다.

 인도의 성인 크리티슈나는 “망고나무 밑에서는 맛있게 망고만 따먹으라” 고 했다. 괜히 나무나 열매, 또는 주변 여건에 대해 연구한다고 씨름하다가 급기야 꿀맛 같은 망고를 놓치고 마는 어리석음을 경계한 실존적 메시지이다. 그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꽃을 두고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꽃 앞에서는 꽃에 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을. 꽃에 대한 구구한 잡설은 한사코 꽃구경을 방해할 뿐이다.

 

김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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