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하면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초원의 빛’과 ‘꽃의 영광’이 떠오른다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문득 부렙 남바(Nambar, purev, 37세), 그가 생각난다.

‘아시아문화예술인 교류초청산업’으로 광주에서 6개월간 체류했다가 귀국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물론 그는 이 사업이 아니고도 두 차례 한국을 와본 적이 있다.

한번은 개인적으로 동대문시장의 허드렛 가게에서 날품을 팔았고, 또 한 번은 지지난해에 한국-몽골예술가 교류프로그램에 참가자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니까 부렙 남바가 한국을 세 번쯤 방문한 셈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전통적인 사회주의리얼리즘이 퇴조하고 젊은이들 중심의 모더니즘이 기승을 떠는 몽골의 젊은 시인의 읊은 시낭송만으로도 독특한 운율이 있어 구비문학의 전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음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 부렙(오른쪽에서 세번째)씨의 가족과 광주 민예총 방문자들. ⓒ줌뉴스  
 
또한 하루 종일 지평선만 보이는 앞을, 달려도 달려도 광활한 초원과 코발트빛 하늘이 전부였던, 가끔씩 ‘게르’라고 불리는 몽골 전통 천막집과 양떼들만이 하나의 점으로 솟아올랐다가 아련히 사라질 뿐인,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하나의 심연이고, 우주의 근원에 대한 경외감이고 그로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게 하는 어떤 까닭모를 이유 같은 감정이 내 이성을 압도해 버렸다.

그렇게 나는 그에게 쉽사리 제압 당해 버린 기억이 있었다. 때문에 1960년대 후반의 광주시 전경 같은 사회주의 몽골의 울란바트르대학 출신인 그가 자본주의 대한민국을 보고서 품었던 환상을 넌지시 내비치기도 했던 그때만 해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할 수 있었다.

그의 조국은 대한민국보다 삼십년 정도 늦은 경제라고 하니 어렴풋이 짐작도 가는 대목도 있었으나 모른 체 하는 것이 그를 모독하지 않는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인편으로 그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나는 체한 것처럼 명치끝이 먹먹했다. 이유인즉 울란바트로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던 일행의 말로는 그가 일테면 ‘코리아드림’을 구체적으로 꿈꾼다는 것이었다.

교사인 그의 아내는 물론 다섯살 난 아들에게까지 김치 먹는 습속과 한국의 풍속을 속속들이 익혀주면서 아예 작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몽골에서 시인하면 우리나라 저녁 9시 뉴스의 모두의 순서처럼 시낭송을 방영하고, 몽골 대통령 또한 시인출신이다. 그만큼 시인은 추앙하고 존경스런 대접을 받았다.

굳이 이런 현상을 즐비하게 늘어놓지 않더라도, 그를 만났던 일행이 옥색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부력이 느껴지는 몽골의 녹색 초원에서 3.0의 시력을 유지하고 살 사람은 부렙 남바, 그 자신이라도 일러주었다고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한다.

프레스기계에 손목이 날아가도 산재보험커녕 체불된 임금도 못 받고 공장에서 쫓겨나야만 하는 그래서 불법체류하게 된 외국인 노동자들이 출입국보호관리소에서 갇힌 채 화염에 타 죽은 이 대한민국에는 부렙 남바, 당신 같은 시인이 꿈꿀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라고 단호하게 덧붙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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