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입체·평면을 넘나드는 작가 김 진 화

쾌적하다. 새로 마련한 작업실에서 여름을 맞는다. 대추나무, 호두나무, 앵두, 보리수 나무와 지난겨울을 함께 보냈다.

새 순을 틔워 봄을 맞았고 다시 무성해진 여름의 이파리는 작업실 마당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작업하다 잠깐 마당으로 내려와 헝클어진 머리와 함께 상추를 뜯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삶은 마당 한쪽에 둥글둥글 말며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과 같이 보였다. 숭덩한 덩이를 만나면 그것을 껴안고 촉수를 뻗어가며 살아가는 것, 그림을 만나 삶의 촉수와 더듬이를 설치·입체·평면에 작동하고 있는 작가의 삶과 닮아보였다. 1년 열 두 달을 꿈꾸는 식물학적 몽상으로 살면서 꼭 그만큼을 작업으로 풀어내고 싶어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지난 시간은 현재를 있게 해
 

김진화 작가. ⓒ광주아트가이드 제공


무슨 말로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까. 작업실에 다녀온 후, 지난 시간의 작업을 들춰본 후 혼란스러웠다. 식물과 조류, 밤하늘과 별들을 통해 작가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귀 밖에서 웅웅거릴 뿐, 분명한 언어의 표현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작가의 내면적 언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듣고 있다는 것. 거름망을 통과한 색채와 소리, 빛의 언어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

유년시절을 나무와 식물들 속에서 보냈다. 작업 안에 식물과 나무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작가는 “부모님의 직업이 조경수를 키워내는 일을 하셨으니 어린 나의 시간은 언제나 식물들과 함께 일 수밖에 없었다.”며 “자라면서, 어른이 된 지금도 식물을 가까이 한다. 그들의 숨소리와 발자국들이 작업 안에서 또 다른 언어로 재탄생되고 표현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즐겨하는 이유다.”고 이야기를 들려준다.

큼직한 여러 모양의 창들도 다수 등장한다. 작가는 “창(窓)을 좋아한다. 창은 이곳과 저곳을 가름하는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안과 밖을 구분하기 보다는 작업 안에서 현실과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도구와 존재로 즐겨 차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맞다. 우리가 현재에 있으면서 존재와 사라짐을 구분하는 것은 창이다. 사라지는 곳에서 바라보는 창은 존재를 나타내고 존재에서 느끼는 창은 레테의 강 저 편이다. 어쩌면 창은 시공간에서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기보다는 연결해주는 다리역할을 능히 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창 안에서 바라보는 저곳은 자유로울 것 같지만 창살 밖에서 바라보는 이곳이 더 치열한 사람살이 같은.

마침내 휴식이 필요할 때

앞만 보고 달려왔다. 색채로 이루어진 몸 안에 푸른 호수가 출렁이고 있는 것을 느낀다. 몸의 호수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작업 안에서 보여주는 공작새도 수많은 새들 중의 하나이다. 화려한 꼬리를 부채처럼 펴서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린다.

공작새의 울음소리는 고라니보다 더 크고 멧돼지 보다 극악해 현대인의 욕망을 대신한다. 혼자 있을 때 우는 울음. 우아하게 꼬리를 부채꼴로 펼쳐 보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지만 사실은 보여주는 그것만이 전부일 뿐 작가가 공작새를 통해 표상하고 있는 것은 현대인의 자화상일 것이다.

입체와 설치, 평면을 넘나든다. 평면인 듯 하지만 레이어(layer) 된 입체다. 하나인 듯하며 표면을 덮고 있는 여러 막을 사용한다. 몸통이 없는 날개는 비현실적으로 파닥거리며 창 너머 그림자처럼 페가수스는 날아오른다.

평면에 담을 수 없는 한정적 이야기를 넘어 레이어로 표현된다.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일 것이다. 하얀 캔버스를 바라보면 심장이 터질 듯이 흥분된다. 그래서 입체와 설치, 평면을 넘나들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변곡점에 다다른 것일까. 점점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공간이 늘어간다. 할 말을 토해내던 시간이 지나가고 안으로 삭히며 함축된 은유로 현재의 상태를 이야기 한다. 숨 막히도록 창의 안과 밖, 하늘과 별, 달, 식물과 나무에게 이야기를 걸던 작가는 단순하고 절제된 몸짓으로 사람을 향한다.

‘쉼’이다. 푸른 하늘아래 빨랫줄에 옷 하나 걸어놓음으로 자신을 이야기하고, 걸어진 옷은 단순한 소도구인 빨래만이 아닌 흔들림의 몸짓으로 거기 바람이 있음을 알게 한다. 여전히 현대인의 표상인 공작새는 등장하지만 공작새는 화려한 꼬리만이 있을 뿐 얼굴은 비어 있다.

즐거운 나날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본 밀레의 ‘만종’에 가슴이 뛰었던 것처럼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작업에 여전히 두근거리는 현재다.

** 윗 글은 <광주 아트가이드> 104호(2018년 7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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