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나전칠기 역사

1986년부터 양림동에 똬리를 틀었다. 몇 년 전부터 ‘문화’가 양림동을 들썩이며 들고나는 사람들이 많아져도 변함없이 최 명장은 제자리에서 작업 중이다. 

상시 전시 중인 작품들 뒤편으로 언제든지 작업을 할 수 있는 공방이 자리하고 최 명장은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제 시간에 출근하고 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다.

작품과 상품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나전칠기라는 점이다.

전통의 현대적 해석
 

최석현 광주공예명장. ⓒ광주아트가이드 제공


화려하다. 옻칠냄새와 더불어 반짝거리는 작품들이 전시장 안에 가득하다. 화려한 색의 옻칠을 한 통형칠기들이 눈길을 잡아끈다. 나전칠기로 만들어진 병풍은 품위와 우아함을 가지고 있고, 크고 작은 의걸이장과 책상과 다탁은 화려함 속에서 소박하게 빛을 낸다.

최 명장은 “2011년에 늘이란 명제를 내걸고 갤러리 문을 열었다. 그동안 작업한 생산물 등이 창고에 쌓여있는 것에 착안해 오며가며 누구나 전시장에 들러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며 “공예의 한 장르인 나전옻칠갤러리로 1호점이 될 것이다. 별 일이 없는 한 공방에서 작업을 하는데, 전시장을 향해 투명 유리문을 설치해 두었다. 누구든지 나전옻칠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고 공방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늘이 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양림동에 ‘문화’의 향기는 미미했다. 2011년 이후 양림동은 근대역사마을로 거듭났고 문화중심 마을이 되었고 현재는 갤러리와 소호상점들, 이장우 가옥을 둘러 싼 크고 작은 카페들이 문을 열어 펭귄마을과 어우러지며 볼거리들이 다양해졌다. 최 명장은 양림동이 문화마을로 자리매김하는데 있어 씨앗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고집스럽게 버텨왔다. 최 명장이 그동안 천착한 작업은 나전칠기였다. 부의 상징이었던 나전칠기 옷장들이 주거의 변화와 함께 티크와 붙박이장으로 바뀌어갈 때도 자개를 마당 한가운데 산더미로 쌓아두고 자신만의 길을 올곧게 걸어왔다.

최 명장은 “할 줄 아는 것이 나전칠기밖에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눈과 손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멈추지 않고 오다보니 현재가 되었다.”고 말을 잇는다.

최 명장의 빼어난 작업에는 ‘통영칠기의 탄생’과 ‘조선시대 관복함’이 있다. 신창동 유적 발굴과정에서 통형칠기가 출토되었고 2000년 전의 목공기술과 옻칠이 세상에 나왔다.

최 명장은 “초기 철기시대의 경제활동과 당시의 목기제작 기법과 옻칠기술을 함께 보여주는 통형칠기는 충격이었다. 당시 출토된 통형칠기는 몸통과 바각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몸통은 전체적으로는 원통형이지만 바닥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지다 다시 넓어지면서 입술이 약간 바깥으로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바닥판은 나이테가 둘러진 가로면의 목재를 둥글게 깎아 만들었다.”며 “통형칠기의 복원은 철저한 학문적 고증을 통한 작업으로 이어졌으며 복원품 제작은 옻칠을 하기전 통형목기를 만드는 과정과 옻을 칠하는 과정으로 구분했다.”고 복원과정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마침내 복원과 재현 그리고 대중화

마침내 복원했다. 출토된 통형칠기와 같은 오리나무를 사용하고 다양한 손칼을 이용해 중심부를 파내고 몸통에 바닥판을 끼워 넣은 후 3단계의 옻칠과정을 거쳐 완성이 되면 칠기 표면의 흠집은 옻 액과 찹쌀 풀을 섞어 만든 접착제를 바른 후 건조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

‘조선시대 관복함’ 재현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던 나전칠기 관복함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고서 안 관복함을 찾아내고 관복함에 그려진 나뭇가지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은 채 완벽함을 목표로 결국은 재현에 성공했다.

최 명장은 “복원도 재현도 대중들에게 외면 받는다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전칠기의 우수성은 역사가 증거 한다. 옻칠은 이미 전방위로 필요성을 인식하는 단계이고 나전 역시 최고의 공예분야로 인정받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실생활의 쓰임새일 것이며 대중들에게 필요성으로 녹아드는 일일 것이다. 오래된 나전칠기의 역사가 생활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것처럼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것을 찾는 일이 4차산업의 일환으로 인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 윗 글은 <광주 아트가이드> 104호(2018년 6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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