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름 뿌리다 두 멘토에게 배운 무언의 가르침

일요일 아침 여섯 시,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난 나는 아파트 창문 밖 풍경을 살폈다. 도심의 야트막한 야산엔 푸른 봄기운이 막 퍼지려 하고 있었건만 하늘은 심술궂은 표정으로 찌뿌둥했다.

겨우내 손맛을 보지 못했던 손이 근질거려 경련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한때 문인낚시회를 이끌었던 「오발탄」이 이범선처럼 나 역시 낚시에 푹 빠진 나였기에 물고기들의 입질이 활발해지는 이 무렵엔 낚시 갈증이 특히 심했다.

나는 허름한 낚시 복장으로 챙겨 입은 뒤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인 채 신발을 신었다. 그때였다.

“벌써 일하러 영암 가려고?”
 

김용국 정광고 교사.

잠귀가 밝은 아내는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영암 무화과 밭에 처남 형님과 함께 퇴비를 뿌려야 한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광주에 직장이 있는 처남 형님은 농사일이 서투른 우리 부부를 위해 주말을 이용해 일을 거들어 주셨고, 우리는 일꾼 삯을 지불했다. 처남 형님은 성실했고, 마무리를 깔끔하게 해놓는 야무진 일꾼이었다.

“그럼 빨리 서둘러야제. 오후엔 장성 가서 밭에 거름도 뿌려야 헌께.”

나는 신발을 신느라 구부정한 자세로 짐짓 태연한 척 대답은 했지만, 나의 낙이 산산조각났다는 사실에 마음속은 께름칙했다. 나는 먼저 무화과 밭에 가서 장비를 챙겨 놓고 처남 형님을 기다린다는 핑계를 대고는 겨우 집을 빠져 나왔다.

처남 형님은 오전 열 시쯤 무화과 밭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잘만 하면 한 두 시간은 낚시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영암으로 차를 몰았다.

나는 전부터 봐두었던 무화과 밭 근처에 있는 수로에서 낚시를 하기로 했다. 그래야 최대한 빨리 일손을 도울 수 있고, 또 가까운 만큼 조금이라도 더 낚시할 시간을 벌 수 있어서였다.

아침 안개를 뚫고 한 시간여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잿빛 하늘 아래 안개 낀 냇가는 수묵처럼 포근했고 고요했다. 상쾌한 공기를 폐 깊숙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내가 낚시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상쾌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서다.

오늘은 내가 약한 내림낚시를 해보리라. 바늘과 찌를 냇물에 담갔다. 물안개에 포위된 다리 위로 이따끔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 사위는 고요했다. 십여 분쯤 지났을 때 찌가 위 아래로 움직였다. 낚싯대를 채보니 팔뚝만 한 메기가 나왔다.

또 얼마 안 있어 붕어 녀석이 달려 나왔는데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삼십일 센티미터의 월척이었다. 이렇게 조락무극의 경지를 즐기다 보니 어느 새 해가 남쪽에 이르렀다.

‘아뿔사!’

부랴부랴 낚싯대를 접고는 물고기들을 방생한 후 얼른 차에 올랐다. 무화과 밭에 이르니 부지런한 처남 형님은 이미 굵은 땀을 흘리며 퇴비를 뿌리고 있었다. 심은 지 세 해가 된 무화과 나무는 어느 새 밑둥치가 어른 주먹보다 굵게 자라 있었다. 올 여름이면 맛있는 무화과 맛을 볼 수 있고 일부는 내다 팔 수 있으리라.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합류해 삽을 들고 작은 수레에 퇴비를 푸고는 이를 무화과 나무 사이사이를 돌며 뿌렸다. 허리가 뻐근해지기 시작한 오후 한 시 반경에 이르렀을 때 가는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인자, 장성으로 가세.”

처남 형님의 말에 따라 장성 시골로 차를 몰았다. 신북 가까이 왔을 땐 성긴 빗방울이 더욱 잦아졌고, 장성으로 갈수록 굵어졌다. 허리가 아픈 나는 낚시를 하며 쉬고 싶은 강한 유혹에 빠졌다.

“아따, 비가 이렇게 온디 으뜨고 거름 뿌리겄어요?”

“글긴 허네. 잠깐만.”

처남 형님은 집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뿌릴 거름 포대를 이미 잔디밭에 부려놓은 아내는 거름 뿌리는 시기가 중요하다며 꼭 거름을 뿌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형님 비가 이렇게 온디 으뜨고 거름을 뿌린다우. 나중에 뿌립시다.”

잠시 생각하던 잔꾀 부리는 일이 없는 처남 형님은 일단 장성으로 가본 후 판단하자고 했다. 동의했다. 장성으로 갈수록 빗방울은 더욱 굵게 흩뿌렸다. 나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이 쾌재는 장성에 도착했을 땐 다시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늘을 흐렸지만 빗방울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세 시경 장성에 도착했다. 집에 들러 분무기와 휘발유를 챙겼다. 나는 경운기를 다룰 줄 모르기에 운전은 처남 형님이 했다. 잔디밭으로 향했다. 마을 뒤편에 자리한 잔디밭은 작년에 아버지께서 내게 물려준 터였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우리 부부가 일궈야 했다.

그런데 초장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분무기의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시무룩한 하늘이 결국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제법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빗속에 고장난 분무기의 시동을 걸려고 몇 번이나 시동줄을 당겼으나 엔진음은 번번이 단발에 끝났다.

전에 아버지와 함께 거름을 뿌리곤 했었지만 분무기의 시동이 걸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시동은 항상 아버지께서 걸어주신 터라 나도 작동법은 서툴렀다. 처남 형님도 이런 분무기는 다뤄 본 적이 없어서 작동에 서툴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짜증이 나서 말했다.

“아따, 형님 이래가지고 무슨 일을 허겄어요. 그냥 작파허고 갑시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마도 내 말을 따랐을 터지만 성실성이 몸에 밴 처남 형님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 처남으로서 돈 받고 일은 해주지만 시골일은 때 놓치면 안 되는 법이네. 맘 단단히 먹고 일해야 허네.”

시골일을 취미쯤으로 여기는 나에 대한 따끔하고도 지당한 충고였다. 나는 그 순연한 충고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처남 형님은 나의 무안함을 풀어보려는 듯 얼른 말을 뱉었다.

“우리가 뭘 잘못 조작헌 거는 아니여? 쩌 집에 가서 한번 물어보세.”

‘쩌 집’이란 잔디밭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 즉 백여 미터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한 집을 가리켰다. 그 집은 구릉을 사이에 끼고 우리 마을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어 자주 왕래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우리는 우비 위에 분무기를 매고는 그 집으로 향했다. 마당에 들어선 나는 현관을 향해 소리쳤다.

“거, 누구 지겠소?”

곧바로 현관 문이 열리고 한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아따, 누구쇼이?”

내가 우비를 벗고 인사를 드리자 나를 알아보시고는 반갑게 맞아주셨다.

“형수님, 잘 계셨제라우. 분무기가 작동이 안 돼 혹시 이 댁 형님이 잘 아시는가 해서 왔어라우.”

“워매, 어찌까. 잠깐 사과밭에 갔는디 쫌만 기다리쑈이. 내가 얼른 오라고 전화헐란께.”

형수님의 전화를 받은 일가 형님은 오 분도 안 돼 급히 돌아오셨다. 나는 일가 형님의 일을 망친 것 같아 미안했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일가 형님은 우리를 측은한 눈빛으로 보고는 분무기를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고는 시동줄 옆 작은 버튼을 서너 번 누른 후 시동줄을 당기라는 도움말을 던지고는 직접 시동을 걸었지만 좀체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나는 미안하여 농기계 수리센터에 맡길 요량으로 분무기를 들고 마당을 나오려 했다. 그때 일가 형님이 분무기를 좀 자세히 보겠다며 공구함을 꺼내 오더니 다시 요리조리 살폈다. 점화플러그도 몇 번인가 꺼내 닦기도 하고, 스펀지도 꺼내 공기주입기로 오물을 털어내기도 했다.

일가 형님은 삼십여 분에 걸쳐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분무기를 살펴봤다. 도시의 삭막함에 이미 인정미까지 푹 삭아버렸던 나는 면목이 없었다. 시동 거는 법만 알려고 했는데 이처럼 남에게 수고로운 일을 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아따, 형님 됐어라우.”

나는 분무기를 뺏다시피 매려고 했으나 일가 형님은 좀만 더 손보면 될 거라며 다시 빼앗아 기어코 자신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얼마 후 시동줄을 당기자 드디어 분무기가 윙하는 커다란 엔진음을 냈다. 일전에 듣던 엔진음은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었으나, 지금은 원기를 돋우는 힘찬 응원의 소리였다. 나도 모르게 박수가 나왔다.

“아이고, 형님 고맙습니다이. 바쁜 시간 뺏어 불고 참 면목이 없습니다이.”

“아이고, 뭘 이런 걸 가지고. 참, 많이 지체됐을 건디 우리 분무기도 가져가서 함께 뿌리소. 그러믄 금방 뿌릴 거여.”

“아따, 이것도 고마운 디 그러실 것까진 읍서라우.”

“곧 어두워질 텐디 빨리 뿌려부러야제. 밭도 넓던디. 아, 글고 거름 뿌릴 때 초보들이 꼭 거름 푸대 따는 칼을 안 가져 오드랑께. 이것도 챙겨가이.”

일가 형님 말대로 칼도 챙기지 못했다. 농사 초보 티를 톡톡히 내고 말았다. 처남 형님도 다음 주엔 시간이 안 됐기에 오늘 거름을 다 뿌려야만 했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분무기와 커터 칼을 챙겨 나왔다.

더욱 굵어진 빗방울을 맞으며 거름을 뿌렸다. 일은 해가 서산에 숨어버리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끝났다. 어둑어둑한 밭둑에 세워둔 경운기에 장비를 챙겨 마을로 돌아갔다.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마음이 후련하고 뿌듯했다.

이런 기분을 선물한 이들은 나보다 서너 곱절은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처남 형님과 열 일 마다하고 자신의 일처럼 나서 인정을 베풀어 주신 시골의 일가 형님이다. 아마도 이 둘은 내 인생 항로의 중간 거점을 되돌아보도록 자성의 기회를 마련해 준 멘토가 아닐까.

시절에 맞춰 해야 할 일은 꼭 하라는, 사람에 대한 따뜻함을 베풀라는 무언의 가르침. 이를 통해 그들은 내가 가야할 덕목의 길을 환기시켜 주었다.

귀가 길 차안에서 이 무언의 가르침들이 평범한 두 사람을 통해 깨닫게 된 사람이 가야 할 길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팔 할이 이 두 가르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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