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상 심사 두 번째 상영작은 작품 “령”이었다.
공포물은 여름용 상업 장르로서 대중의 시대적 취향을 읽어내는 기획의 힘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장르라는 점에서 한해 공포물의 경향은 충무로의 기획력뿐 아니라 시대상을 반영하는 하나의 척도로 읽을 수 있다.

筆者는 이 영화를 끝까지 보는데 공포영화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했고 적지 않은 인내 또한 필요했다.
각 개인의 보기 나름인 공포영화는 무섭다고 생각하며 몰입하면 정말 무서운데 마음속으로 한번 “뭐야? 이 딴 어설픈 걸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라고 편견이 생기면 영화 속으로 깊게 빠져 들 수가 없어 재미없게 느껴질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편의 영화가 탄생하려면 기획 때부터 완성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자본과 보이지 않는 숨은 노력들이 들어가는데 끝까지 봐줘야지라는 심사위원으로서 아니 영화인으로서의 사명감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중도에 휴게실에 나와 버렸을지도 모르는 작품이었다.

筆者는 작품 “령”을 4개의 큰 스퀀스를 가진 한국에서의 공포영화의 한계에 도전해보려는 실험영화 정도로 기억하고 싶다.

개봉 전엔 2004년 여름을 겨냥하여 김하늘이 첫 공포영화에 출연한다는 영화로 화제를 모았고 왕따가 흔한 요즈음 왕따를 다룬 원한 맺힌 귀신, 여기에 빙의(혼이 바뀌는 현상)를 소재로 추가했고 후반부 이야기의 비밀에 대한 반전 또한 있다며 꽤나 화제를 모은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게 한건 공포영화의 스토리가 아니라 갑자기 귀를 자극하며 관객을 놀래키는 음향효과로 정말 짜증스러움의 극치였다. 
 
이 작품의 대략 줄거리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대생 지원(김하늘분)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과정에서 연이어 친구들의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 역시 죽음의 위협을 경험한다는 내용의 미스테리 성향의 심령공포물이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술래를 알 수 없는 죽음의 숨바꼭질...살고 싶다면 기억하지 마라!”

첫 번째 시퀀스는 친구에 대한 기억이다.
기억이란 버스에서 우산을 두고 내린 거라 생각하며 자신만 술래를 모르는 술래같은 사회학과 2학년 민지원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그게 나였다. 기억은 없지만 행복해지고 싶어서 민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살기로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유정이라는 친구가 찾아온 뒤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나는 지금 많이 혼란스럽다. 번째 시퀀스는 악몽에 관한 기억이다. 일 밤 이상한 꿈을 꾼다. 낯선 공간의 낯선 사람들을... 꿈속의 나는 아무 기억이 없다. 하지만 느낄 수 있다. 이건 악몽이다. 꿈속에 나타난 그 사람들은 누굴까? 그 곳은 어느 곳이었을까? 도대체 그들은 왜 나를 괴롭히는 걸까?

   
세 번째 시퀀스는 물에 관한 기억이다.
귀신이 보인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고 내 눈에만 보이는 그것. 귀신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다.

물에 흠뻑 젖은 여인. 그 여인이 나를 따라 다니는 것만 같아 두렵다.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왜 대상이 나일까?

네 번째 시퀀스는 죽음에 관한 기억이다.
은서, 유정, 미경 친한 친구들이 모두 죽었다. 죽은 친구들 주변에는 정체불명의 물이 있었고 경찰은 사인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왜 실내에서 끔찍한 익사체의 모습으로 죽은 걸까? 머리속이 너무나 복잡하다.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닐까? 참을 수 없이 무섭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만 술래를 모르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게 끝났다며 허탈하게 집으로 들어서는 지원에게 엄마는 “무엇이 끝났다는 거야? 이제 시작인데....네 몸에서 나는 생선 비린내가 얼마나 역겨운지 알아?” 라며 돌아본다.

영화가 끝났다.98분의 영화 중 중간에 빠져 나간 사람들이 꽤나 있었고 끝이 났을 때 무료로 입장한 일반 관객들은 빠른 걸음으로 영화관을 빠져 나갔다.그러나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지막에 떠오르는 스탭들의 이름과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도움을 주신 분들과 기업들 정도는 스쳐가는 중에라도 기억해 주는 것이 기본 예의이며 상식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마지막 1분의 인내가 한국 영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면을 통해 여러분에게 심심한 부탁의 말씀을 올린다.

대종상 심사에 “령”을 연출한 김태경 감독은 감독상과 신인 감독상, 각본상 3개 부문의 후보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물론 10개의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도 좋다. 영화에 있어서 감독의 감정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의 많은 부분에서 김태경 감독의 고심한 흔적과 아픔과 노력들을 곳곳에서 느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흔적만 남기고 넘어간다. 밋밋하기 그지없는 여주인공 지원(김하늘분)의 옆에만 따라 다니는 들러리 주인공 남자 준호(류진분)의 무기력한 캐릭터. 영화는 혼자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감독은 과감히 본인이 아닌 전문 시나리오작가를 영입하여 캐릭터는 물론 전체적인 뼈대를 수정했어야만 했다.

필자는 언제부턴가 충무로에 혜성같은 신인감독들이 나타나면서 감독, 각본 000라는 자막을 많이 보게 된다.
심지어 원안, 감독, 각본, 각색 4개 부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안하무인격의 감독도 본 적이 더러 있었다.
물론 작가적인 역량도 있고 연출의 역량도 빼어난 감독들 또한 많다. 하지만 영화의 큰 틀을 짜는 로 하우를 가지고 있는 작가에게 감독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몇 몇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공동 각본에 또는 공동 각색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감독들의 영화 또한 53편의 대종상 후보작 안에 부지기 수였다.

말 하건데, 영화가 종합예술임을 감안하면 이렇게 한 치의 배려들과 아량이 없는 작품치고 또한 이런 思考의 감독치고 제작자들을 골병들게 하지 않는 감독 못 봤고 그런 영화가 대박치는 일 또한 극소수일 뿐이다.

모든 영화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축제의식과 참여의식이다. 그런 영화제의 심사를 관장하는 심사위원은 엄정할 수밖에 없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영화판을 지켜 나아가는 단 한 명의 스탭진이라도 축제 무드에 더 많이 동참 시키려는 배려차원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잘 연출한 감독이 각본상, 각색상까지 욕심내는 무 경우하고 몰상식한 현상들은 앞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게 筆者의 생각이다. 권투에서 선수가 링에 오르면 대부분의 칩세컨들은 어깨에 힘을 빼라 요구한다. 가볍게 뻗어 쳐야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야구 또한 그렇지 않던가? 던지는 투수든 배트를 휘두르던 타자든 간에 힘을 뺄 때만이 진정한 노히트 노런이 나오고 홈런이 나오고 2루타가 나오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운 감독이 욕심 없이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스탭진을 구성했더라면 감독, 각본 또는 각색부분까지 3개 부분을 휩쓸 수 있을만한 작품들도 감독상만 주어지기 때문에 제작사는 그만큼의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 작품으로 10개 부문의 상을 받는 경우는 있지만 모든 영화제의 20개 부문의 시상에서 개인 혼자서 감독, 각본, 각색 3개부분의 상을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해먹는 경우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 “령” 은 한국 공포영화의 고유성, 한국사회에서 감지되는 독특한 공포감을 기다리는 관객들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이런저런 이유로 비 내리는 충무로에서 아쉬움이 많은 영화로 사라지고 말았다.

문성룡님은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이사이며 한국영상작가교육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영화일꾼입니다. 지난해에는 대종상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광주시문화예술대상을 수상했으며 스크린 쿼더 축소반대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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