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Václav Havel Airport Prague) : 여행을 마무리하며

차노휘님의 <길 위의 인생- 체코.헝거리 편>을 이번 23회를 끝으로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들과 지난 37일간의 여행기를 현지에서 생생하게 써주신 필자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휴게실에서 여행기를 쓰고 있는 필자. ⓒ차노휘


인천으로 향하는 체코 항공기 18시 30분 보딩타임을 기다리는 탑승구 B8 휴게실에 앉아 있다. 보딩패스 한 시간 남짓 남았지만 휴게실 안에는 사람이 몇 없다.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 터미널1은 터미널2와 달리 보안수속이 달리 진행된다. 면세점을 거친 다음에 각 탑승구 입구에서 보안 검색을 한다. 한국인 단체 여행객이 모여서 카운트 체크인을 했다. 

그들은 아직까지 쇼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대적으로 조용한 휴게실 창가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그때 쏴아! 하며 갑자기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3층 높이인 휴게실 한 면은 전부 유리다. 밖은 계류장이지만 먼 곳에서 오색 빛이 찰랑거렸다. 오색 빛깔 빗줄기가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다. 엎드려 통곡하고 있다는 표현은 순전히 주관적인 내 표현이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37일 간의 여행을 마무리 하는 것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무사히 여행을 마무리한 것에 대해 자족하고 있었다. 

여행 중 팽팽한 긴장감이 나를 감싼다. 길을 잃지 않아야 되는 등,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마무리할 때 즈음이면 무사한 것에 감사한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기다릴 때가 그래서 제일 행복하다.

무엇보다 나를 만족하게 한 것은 체코든 헝가리든 좋은 인상만 가지고 귀국한다는 점이다. 헝가리를 갈 때 나를 혹독하게 몰아쳤던 RyanAir. 같은 항공사로 프라하로 와야 했다. 

David 아버지가 선물한 1.8리터 화이트 와인까지 있었다. 액체 1리터가 넘으면 어김없이 걸려서 버려야했다. 그래서 나는 추가비용을 지불하더라도 화물을 미리 부치기로 했다. 

하지만 카운터 직원이 비싸다고 그냥 들고 가라고 급구 만류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 사정을 설명했다. 아주 중요한 와인이라 꼭 가지고 가야한다고. 여직원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종이를 주면서 맞은편에서 계산하고 오라고 했다. 

계산하려고 하는데, 내 뒤에 서 있던 승객이 나에게 와서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만 여자인 듯했고 영어가 능숙했다. 추가 비용을 받는 직원은 포린트로만 계산이 가능하다고 아래층에서 환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추가 비용이 40유로 더 나왔는데 유로로 계산하면 안 된단다. 여차, 귀찮아서 한번 RyanAir 카운터 직원과 승객을 믿기로 했다. 내 짐은 11.5kg. 무게 초과였다.

부다페스트 공항은 액체보다는 샴푸나 치약 같은 점성 있는 액체를 집중 단속했다. 아마도 테러 방지를 위한 폭발 위험 액체에 속한 듯했다.

와인은 무사통과 했지만 삼푸와 린스는 버려야했다. 치약은 꺼내서 주의 깊게 보더니 다시 넣어주었다. 단속하는 직원들이 꼼꼼하게 물건을 점검했지만 승객에 대한 배려는 끝까지 지켰다. 

정중하게 물었고 돌려주었다. 뭔가 이상한 것이 발견되면 잠정적 범법자로 생각하며 차갑게 대하는 다른 항공사 직원과 달랐다. 무엇보다 David 아버지의 정성을 가지고 갈 수 있어서 좋았다. 이들의 배려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보안수속을 마친 게이트에서 또 한 번 RyanAir 직원의 배려에 감격했다. 체코 탑승구 입구에서처럼 짐 규격을 재는 것이 아니라 수하물 보관 택을 캐리어에 붙여줬다. 

기내 사물함에 넣지 말고 수하물로 보낼 테니 도착해서 찾으란다. 공짜다. 멍해 있는 내게 이해했냐고 묻는다. 아, 이렇게 다른 서비스라니.

공항이 작아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것을 상쇄하듯 일일이 친절함으로 대응해주었다. 면세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공항 직원들이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었다. 심지어 Palinka를 어디서 사야하는지 물어도 동행해서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프라하에서 무사히 아침을 맞이했고 자주 갔던 바츨라프 광장 근처 Cafedu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나름 이별을 준비하고는 프라하 공항에 도착했다.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 공항 터미널1에 들어섰을 때 늘 그렇듯 전광판을 주시했다. 인천으로 향하는 체코 항공기 체크인 카운터와 탑승구 번호를 알아야 했다. 

눈이 좋지 않은 나는 폰으로 찍어 확대해서 보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했다. 흐리게 나왔다. 삭제 버튼을 눌렀다. 기분이 이상해서 폰 갤러리를 봤더니 그동안 찍어놓았던 사진 앨범을 통째로 삭제하고 있었다. 

취소버튼을 부르고 고개를 들어 공중을 봤다가 다시 폰을 보니 앨범이 통째로 날아가 있었다. 이런!

컴퓨터였으면 휴지통에서 다시 복원을 누르면 될 거였다. 잠시 만감이 교차한, 아니 멍한 상태가 흘렀다. 

작년 여름 생장피드포르에서 순례자 여권을 만들 때 기부금을 내고 가져왔던 가리비를 올봄에 산티아고 순례를 간다는 K에게 주었다. 

K가 말했다. 네 소중한 기념품인데 나한테 줘도 되니? 나는 아주 미련 없이 말했다. 기억이 있잖아요, 생생하게 걸었던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기억. 나는 사진이나 기념품보다는 그 순간 그곳에서 그것을 했다는 데에 의미를 둔다. 

현장에서 미련 없이 집중하면서 생생하게 몸으로 느끼려고 노력한다. 사진은 한낱 껍데기를 저장하는 이미지일 뿐이라고. 별 거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내게 위안을 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도 그렇지만 폰 속에서는 아직 정리하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의 사진이 몽땅 있었다. 다른 사진과 달리 정리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폰 속에서 사진을 클릭해서 상세 정보를 보면 날짜와 시간, 장소가 나온다. 

스페인 시골길이라 구체적인 장소는 명시되지 않지만 ‘주’ 정도는 표시된다. 순례길 체험을 다 완성하지 못해서 나는 저장된 기록을 참고하려 했다.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서 삭제하면 상세정보도 없어진다.

멍한 상태로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지만 몇 초뿐이었다. 한쪽에서는 개운함이 차고 올라왔다. 이 기분은 뭘까. 아직 글을 완성하지 않은 게으름에 대한 통쾌한 복수일까. 찍어놓기만 했지 다시 보지 않은 것을 이 기회에 정리하라는 뜻일까.

나는 매번 여행을 다녀와서 집에 도착하면 뭔가를 버렸다. 집안에 살림들이 많은 것만 같았다. 일 년에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들, 입어보지 않은 옷들, 음식을 담아 보지 못한 그릇들. 

꼭 필요한 몇 가지만 두고 생활하면 안 될까. 사람 한 명한테 딸린 물건들이 많았다. 일상에서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여행길에서 가방이 가벼워야 움직일 수 있듯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그래야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었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도 언젠가는 떠나야했다. 그렇다면 여행도 일상도 매 순간 미련 없이 행동해야 했기에 그 둘은 내게는 여행이 일상이 되었고 일상이 여행이 되었다. 

길 위에서는 둘 다 비중이 같았다. 일상이라는 여행을 떠나는 내게, 그 누군가가 ‘RESET’을 시킨 것이다. 이제 비웠으니 다시 채워 넣으라고.

비는 그치지 않고 더 세차게 내렸다. 먼 곳의 오색 빛깔이 빗줄기와 엉켜들었다. 떠남을 슬퍼하는 ‘빛 빗줄기’라면, 그렇다면 슬픔은 찬기 품은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이미 기억과 이별을 하고 있었다. 그 많은 기억들 중 빨리 잊히는 것도 있을 것이고 잊히지 않아 나를 웃게 만들거나 울게 만들 것도 있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했다. 

오롯한 내 것이니깐. 내가 소유했고 계속 소유할, 이미 가슴에 자리 잡은 그 따뜻한 이미지들을 말이다.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