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길 위의 발자국

엘리자베스 워치 타워 전망대에서 헝가리 국기를 배경 삼은 David. ⓒ차노휘


David는 Normafa에 가면 눈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내가 처음부터 눈 타령을 했으니 그도 마음 한구석에는 부다페스트에 눈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의 집에 갔을 때도 눈이 오다가 말았다. 하지만 부다페스트는 어디에도 눈 올 조짐이 없었다. 나는 다음날 오후 프라하로 가야했다. 그곳에 가려면 일찍 그를 만나야 했다.

그러자 그는 8시 30분에 만나자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는 아침잠이 많았다. 작년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아침잠이 많아서 우리 일행과 헤어졌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너는 결코 그 시간에 오지 못할 거야.

내 계획 중 하나는 로마군의 주둔지 흔적이 남아있는 Aquincum에 가는 거였다. 그리고 Brodyhouse도. 감기 핑계로 게으름을 피워 몇 군데 놓쳤지만 그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못 가본 곳은 미련 갖지 않기로 했다.

다음 기회가 있겠지 싶다. 모든 게 다 귀찮으면 공항에 일찍 가서 커피 한 잔 마셔도 된다(나는 공항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다음날, 반대 방향으로 가는 트램을 탄 나는 되레 5분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인 역사에서 검은 모자와 검정 재킷 그리고 디자인이 독특한 검정 바지를 입고 서성이는 그가 보였다.

큰 키와 후리후리한 몸매는 검정 옷과 모자가 잘 어울렸다. 페스트에서 보던 익숙한 풍경과 달리 그곳 건물도 더 높은 듯 했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눈 덮인 Normafa 공원. ⓒ차노휘


Normafa는 부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너도밤나무가 많은 공원이다. 페스트는 주로 평지여서 부다와 기온차가 심했다. 고지에 있는 부다는 추워서 눈이 오면 잘 녹지 않았다. 나는 페스트 지역이 활동 무대였다.

David가 이곳에 오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눈 구경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21번 버스를 타고 Normafa로 올라가는 동안 눈 덮인 마을과 가로수, 먼 산을 볼 수 있었다.

버스는 눈 덮인 풍경을 달고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정원이 딸린 개인 주택들이 간간이 보였다. 그는 이곳이 부다페스트에서 제일 비싼 동네라고 했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며 언덕에 있는 Normafa 공원은 문화 행사나 동호회 모임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고 했다.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Normafa를 좋아하는 곳이지만 겨울이라 지금은 사람들이 뜸하다고 했다. 그는 이곳에 가끔 온다고 했다.

눈 덮인 공원은 썰매를 타는 아버지와 아들, 운동하는 사람,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 몇몇이 보였다. David는 손을 들어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약간 왼쪽으로 탑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저곳이 Elizabetb Watch Tower야. 삼십분 정도 걸어야 해.” 그가 말했다.
 

산꼭대기 왼쪽에 엘리자베스 워치 타워가 보이는 눈 덮인 Normafa 공원. ⓒ차노휘
엘리자베스 워치 타워. ⓒ차노휘


그는 탑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아닌 숲으로 나 있는 샛길로 들어섰다. 그곳이 더 흥미진진할 거라고 했다. 가파른 길은 나무 계단이었고 계단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틀 전 그의 집에 갈 때처럼.

숙소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는 서쪽 기차역은 유럽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맥도널드 체인점이 있었다. 역사 자체도 오래되고 고풍스러웠다. 그곳에서 Kecskemet까지 한 시간 이십분 기차를 타고 내려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로 오십분 달려야 David 동네가 나온다.

이틀 전, 8시 50분 기차에 탑승하고 조금 달렸을 때 시골 풍경 사이로 눈이 내렸다. 아, 떠나기 며칠 전에야 눈을 볼 수 있는 것인가. 감성적으로 변했을 때 하늘은 어두워졌고 눈은 곧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 달린다는 낭만은 날씨와 상관없었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기침을 삼켰다. 현지인과 함께 있다는 것은 매번 기차를 탔을 때 느꼈던 긴장감을 없애주었다.

목적지를 알리는 스피커에도 도착 시간을 계산하며 내릴 때를 기다리는 초조함도 없었다. 그가 내릴 때가 됐다고 말하면 일어서면 되었다.

중간지점인 케치케메트는 안익태 선생의 스승이었던 유명한 음악가 졸탄 코다이의 고향이라고 뒤에 David가 알려주었다. 시청과 시프라 팔로타(Cifra Palota) 건물도 유명하단다.

그곳 조그마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차창 밖으로는 포도밭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눈깨비로 흐려서 먼 곳을 볼 수 없었다.

조금 더 달려서 입구가 정갈한 조용하고 아담한 동네에서 우리는 내렸다. 그곳에서 마을길을 오 분 걸어서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그의 부모님 집에 도착했다.

앞서 눈 계단을 올라가던 David가 빙그르 미끄러지며 내 쪽으로 온다. 나는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받쳐준다. 아침 일찍 올라간 사람들이 눈을 밟아 눈 덮인 계단이 얼어 있는 곳이 있었다. 우리는 미끄럼 타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이럴 때 팔링카 한 잔 하면 어떨까? 추위도 확 달아나겠지?” 내가 말했다. “그럼, 딱 한 잔만! 너한테는 한 잔이 안 통할 거야. 못해도 세 잔이나 네 잔 정도는 마셔야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저곳을 걸어서 못 갈 수도 있어.”

“으응, 내가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그리고 너는 아니? 너네 아빠가 운이 좋았다는 것?” 그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감기만 걸리지 않았다면 와인 창고가 많이 비었을 거야, 그치?” 그가 맞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David 가족과 함께. ⓒ차노휘


그의 집안은 대대로 포도농장을 했다. 지금도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영어 이름이 찰스, 라며 찰스로 불러주기를 원하던 그의 아버지는 유쾌했다. 당신 결혼사진도, 자식들 어렸을 때 사진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하고 포도주를 마실 때 흥이 겨워선지 내게 지하 와인저장고를 구경시켜 주었다. 그곳에는 정말 오래된 세계 각국 와인이 있었다. 북한 뱀술부터 캘리포니아 포도주까지.

하지만 제일 마지막에 자랑한 것은 David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사온 와인이었다. 날짜까지 써놓고 기념했다. 그곳은 가족 역사 와인 저장고였던 셈이다.

그리고 늦은 점심을 먹었을 때 식전에 헝가리 전통주 Palinka(40도)를 마셨다. 식탁에 앉기 전에 서서 한 잔씩 따른 다음 원샷을 했다.

David는 물론 그의 어머니까지도 함께 했다. 원샷 한 잔은 식탁에 놓지 않고 걸어서 싱크대까지 가져다 두고서야 식탁에 앉았다. 나는 David에게 물었다. 왜 40도가 되는 팔링카를 식전에 마시냐고. 그는 에피타이저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지만 정확한 것은 모른다고 했다. 오래된 관습이라고 했다.
 

David 아버지와 지하 와인 저장고. ⓒ차노휘
하회탈을 쓰고 포오즈를 취해주는 David 부모님. ⓒ차노휘


나는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하며 걸으면서도 자꾸 웃음이 터졌다. 자꾸 그의 아버지가 생각나서였다. 찰스가 직접 만든 화이트 와인은 순수한 포도주 백퍼센트였다.

다른 와인은 맛을 내기 위해서 기술을 많이 부린다고 했다. 1998년 와인 등, 오래된 와인이 아주 쉽게 식탁에 올라왔지만 나는 찰스가 만든 와인이 더 좋았다. 그가 주는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것이 재미있었나보다. 그도 마시다가 좀 취한 듯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와인을 많이 마시면 머릿속 원숭이 두 마리가 싸운다고. 나야, 좀 오버를 하며 저는 원숭이 같은 것은 안 키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라고 맞장구쳤다. 그는 술을 깨기 위해 잠깐 바람을 쐬러 가더니, 곧 모두에게 정원을 산책하자고 했다.

그곳도 어둠이 일찍 내렸다. 조명 밝힌 정원은 돌로 모양을 낸 돌담, 차펠(chapel), 작은 연못 등을 부드럽게 비추었다. 겨울이어서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손수 만든 정원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David 부모님 댁 정원. ⓒ차노휘


그의 어머니가 스노우플라워를 정원에서 꺾었다. 그것을 식탁에 기념 삼아 꽂아두었다. 다시 화이트 와인으로 잔을 채운 우리는 화제를 바꾸었다. 남과 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찰스는 북한 김일성을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한테서 받은 기념품도 거실에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찰스의 한결같은 소망은 이번 평창 올림픽의 평화로운 마무리였다.

물론 남과 북이 함께 말이다. 몇 십 년 전에 공산국가에서 자유국가로 되었으니 과거에는 북한과 더 친했을 것이다. 이제는 한국과 더 가까우니, 한국에서 온 여자한테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는 한국에 올 생각은 있니?” 나는 Maor의 농담을 생각하며 물었다. Maor는 자주 농담을 했다. 내일 한국에 갈 것이라고. South가 아니라 North에 갈 것이라고. 그곳에 친구가 있는데 성이 Kim이라고. 그러면 나는 비꼬아준다.

“너는 좋겠다, 부자고 권력 있는 젊은 친구를 둬서 말이다? 그런데 그곳에 가면 네 목숨을 담보해야할 걸?” 그에 비해 농담이 거의 없는 David는 오랫동안 생각을 하며 말했다. 여행을 좋아해서 가고 싶은데, 아직 그곳 항공편이 비싸서 부담스럽다고 그리고 당분간 공부를 더 해야 한다면서 신중하게 말했다.

David 가족은 동양에서 온 외국인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환대해주었다. 일요일에는 아버지와 아들을 따라 성당에도 따라갔다. 한적한 동네의 소박한 성당이었다. 미사가 끝난 뒤 그는 일일이 성당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의 안부 인사를 나누고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미사 끝난 뒤 할머니 댁에서 점심식사 하는 게 일반적인 일정이란다. 나 때문에 점심식사는 하지 않았지만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작고 고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요리한 음식을 먹었다.
 

David 동네 성당. ⓒ차노휘


그의 어머니 음식 솜씨는 굉장했다. 무엇보다도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을 동양에서 온 손님을 위해 요리했다. 우리네 삼계탕과 비슷한 허슬레비(Husleves)를 먹었을 때는 묵어있던 감기가 달아난 느낌이었다.

국물이 너무 시원해서 귀국을 미루고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 이외에는 많이 먹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하니깐 두 번째 음식이 준비되어 있단다. 더 맛있단다. 감기가 달아날 정도로 뜨겁고 시원한 음식 보다 더 맛있는 것?

중국으로 유학 간 여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란다. 찰스까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더 배부르면 안 될 것 같아 허슬레비를 더 먹고 싶었지만 숟가락을 놓았다.

샴페인 한 병이 더 식탁에 올라왔고 그녀가 관심 있어 하는 그림 이야기로 화제가 이어졌다. 고전부터 현대회화 거장들, 헝가리 화가 미하이 뭉카치(Mihaly Munkacsy ; 1844~1900)까지. 동양화와 한국화도. 내가 부다페스트에서 들렀던 현대사진전 루마스 사진전도.

그의 어머니는 굉장히 그림을 좋아했고 딸이 중국 유학 중이라 동양에 관심이 많았다. 그림 코드도 맞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는 술 코드(?)가 맞아 식전 주 Palinka에서 샴페인 2병과 작별주까지 원샷을 해야 했다.

식탁에서 술(와인)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하지만 한국화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인터넷 검색을 해가며 한국화와 전통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날 데이빗 부모님께 하회탈(각시탈과 양반탈)을 선물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David와 그의 아버지까지 관심을 가졌고 원더풀이라고 외쳤다.
 

엘리자베스 워치 타워에 있는 열쇠들. ⓒ차노휘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차노휘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일본 문화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뒤를 중국이 잇고, 한국 문화는 실은 ‘보일락말락’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내게는, 먼 나라의 한적한 동네에서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여과 없이 함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면서 늘 드는 생각이 있다. 개인이 누군가에게 호감을 보이듯, 나라가 어떤 나라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을 때는 어떤 매력이 크게 작용할까.

물론 국가의 경제력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문화(예술)가 빠진 경제력은 영혼 없는 육체이지 싶다.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 생기가 없으니 매력이 있을 리 없다.

문화의 옷을 입고 살아서 펄떡거릴 때 그 육체는 빛이 난다. 그런 문화가 우리에겐 있을까.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알리고는 있을까. 뭔가를 알려야지 볼 기회도 평가할 기회도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나는 오르막 계단을 올랐다. David이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고개를 드니, 그의 등 뒤로 하얀 건물이 배경처럼 서 있었다. 벌써 도착했다. 그는 나를 기다려 탑 안으로 들어갔다.

이 탑은 엘리자베스가 부다페스트에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여 1908~1910년 동안, 2년여에 걸쳐 완공했다고 그가 설명해준다(영어 사이트에서는 Elizabetb Lookout Tower로 적혀있지만 David이 부르는 대로 Watch Tower라고 표기한다).

타워에서 바라본 전망은 안개 때문에 시야가 짧았다. 도나우 강도 볼 수 없었지만 백색의 그 풍경이 좋았다. 안개가 되레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3색 헝가리 국기가 펄럭이는 전망대에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로 기침을 하고 코를 풀었지만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타워 1층에 설치된 기념 동전 자동판매기 앞에서 말했다. “이 동전을 갖고 싶니?” 20포린트를 넣으면 엘리자베스가 그려진 동전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맙지만 나는 기념품을 챙기는 스타일이 아니야. 이미 내 가슴에 많은 것들이 소중하게 저장되어 있으니깐 괜찮아.”

그의 가족과 헤어지면서 일일이 포옹을 했다. 찰스는 자신을 생각하며 마시라며 화이트 와인 1.8리터를 따로 챙겨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직접 만든 쿠키와 초콜릿을 도시락처럼 싸주었다.

타워에서 내려와 산등성이에 있는 장작불이 활활 타는 간이 레스토랑에서 몸을 녹이면서 pastry와 커피를 먹을 때도 나는 그의 어머니 음식을 떠올렸다. “너네 어머니 음식이 그립다, 너도 그렇지?” 내 말에 그는 살포시 웃기만 했다.

그의 제안으로 식당 뒤에 있는 리프트를 타고 내려갈 때였다. 바람이 보호막 없는 몸을 때렸지만 온 몸으로 눈 덮인 산(부다페스트)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우리는 눈 덮인 풍경에 압도된 듯 말을 잃었다. 이제 숙소에 들러 짐을 가지고 공항에서 RyanAir를 타고 프라하로 가서 그 다음날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면 이번 여정은 끝난다. 부다페스트에서 인천공항까지 직항이 없다.

나는 마지막이 될 풍경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자꾸 뒤돌아봤다. 하지만 David에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 자체가 부질없어 보였다. 조만간 그와 그의 가족에게 보답할 일이 있겠지 싶었다.

나는 이렇게 부다페스트 마지막 여정을 David와 데이트를 하며 마무리 하고 있었다.

 

리프트에서 바라본 눈 덮인 풍경.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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