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황금빛 풍경

부다에서 바라본 풍경(페스트). ⓒ차노휘
세체니 다리가 있는 도나우 강. ⓒ차노휘


밤사이 하도 기침을 많이 해서 뇌가 흔들린 느낌이다. 고통스러운 반면 이 다음 증상은 뭘까, 혹시 피 토하는 것 아니야? 라며 은근한 마조히스트가 되는 나를 발견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링거 맞고 땀 흘리고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가뿐해졌다.

하지만 해질 무렵 작심하고 숙소를 나선다. 오늘이 어떻게 보면 부다페스트의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아서이다. 내일(토요일)은 David의 부모님 초대로 부다페스트에서 102km 떨어진 Orgovany로 기차를 타고 간다.

일요일 오후에 돌아와서 다음날 비행기로 프라하로 출발하니, 돌아다닐 시간이 없다. 어떤 여행객은 야경만 하루 보고 간다고도 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무던했다. 완전무장하고 길을 나섰다.
 

심플라(Szmpla Kert) 1층. ⓒ차노휘


며칠 전, David하고 그의 친구와 심플라(Szmpla Kert)에서 만났다.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유대인 거리를 젊은 예술인들이 터를 잡아 거주하면서 루인펍(Ruin Pub)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부다에 살고 있는 그들을 페스트 제7구역으로 불러들였다.

대부분의 루인펍은 페스트 지역의 중심부인 제7구역에 위치한다. 1850년대에서부터 1910년대까지 헝가리 중흥기에 지어진 100년 이상 된 주택 및 상가들이 밀집된 지역이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헝가리 유대인들이 밀집해 살았지만 홀로코스트 이후 그곳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관리가 되지 않아 공산 시절에는 도심 속 흉물로 전락했다.

1989년 헝가리 경제체제 전환 이후, 차츰 자라나기 시작한 헝가리인들의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2001년 심플러(Szimpler Kert)라고 불리는 최초의 루인펍을 탄생시켰다.

루인펍은 히피스러운 멋과 자유로운 분위기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현재는 22개의 루인펍들이 인근에 위치해 연간 수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 및 현지인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심플라(Szmpla Kert) 2층 Bar. ⓒ차노휘


심플라 입구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간판도 작았다. 좁은 입구 문을 열었더니 놀랍게도 또 다른 광장이 나왔다. 부다페스트 중앙시장만큼 큰 공간은 아니지만 골목보다 세 배 쯤 되는 공간에서 헝가리 특산품인 다양한 소시지와 야채, 치즈 등을 팔았다.

입구에는 1월 한 달 간 프로그램을 적은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거리에서 상품을 파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거리 뒤쪽으로 고만고만한 공간들이 있고 그 공간은 미로처럼 연결되었다. 곳곳에 정크 아트처럼 벼룩시장에서 사다놓았을 의자나 잡다한 물건들을 오묘하게 배치시켜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천장에 자전거가 매달려 있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없었다. 욕조를 아예 가져다가 소파 옆에 두고 의자로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의외로 욕조 의자는 인기가 많았다.

어지럽게 색칠되어 조명만 겨우 빛나는, 귀신 나올듯한 계단을 밟고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층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에서 사진을 찍고 그곳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재즈 연주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렸다.

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며 폐허 속의 작은 축제를 생각했다. 막 공부를 끝내고 온 듯한 David와 그의 친구도 이곳을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부다에 살고 있는 그들은 이곳이 처음이라고 했다. 현지인보다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인 듯했다.

제2차 대전과 현재 부다페스트 경제, 그리고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면서 맥주를 마셨다. 기침이 간간이 쏟아져서 화제가 끊겼다. 제대로 맥주 맛을 즐길 수도 없었다. 계속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어떡하지?

갑자기 David 부모를 만나야한다는 것이 부담 아닌 부담으로 돌아왔다. 부다페스트에서도 세 시간을 가야하는 곳이었다. 그의 부모는 영어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 심정을 전했다. 그러자 그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가 통역을 하면 된다고, 전혀 부담스러운 부모님이 아니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네가 정말 부담스럽다면 토요일 이전에 내게 연락을 해달라고 했다.

David는 그 뒤로 문자를 보내왔다. 서쪽 기차역에서 8시 50분 기차로 출발할 것이라고 점심 즈음 집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 마을 구경을 하고는 그 다음 날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점심을 먹고 다시 돌아오면 될 것 같다고 했다. 같이 갈 수 있으면 문자를 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심플라(Szmpla Kert)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차노휘


걷다보니 성 이슈트반 대성당에 도착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성당 앞에 먹거리 장터가 열렸다. 새해 전이어서 그런 듯했다. 지금은 광장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숙소와 가까운 거리라 성당 내부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기회가 많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부금을 내고 성당으로 들어섰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성당답게 내부는 웅장했다. 제단 뒤편에는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 미라가 봉헌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웅장하고 경건하고 아름다움에 그만 반해 버려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성 이슈트반 성당. ⓒ차노휘
성 이슈트반 성당 내부. ⓒ차노휘


성 이슈트반 성당에서 나와 세체니 다리 쪽으로 향했다. 야경을 보려면 부다 성이나 어부의 성까지는 올라가야 한다. 다리를 건너서 페스트에서 부다로 가야한다. 부다와 페스트 지역을 연결하는 여덟 개의 다리 중 유명한 다리가 세 개 있다.

지금 건너려고 하는 세체니 다리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하얀색의 에르제베트 다리 그리고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가설하였다는 녹색의 다리가 있다.

그 중에서 세체니 다리 역사가 가장 길다. 1839년부터 10년 동안 건설되었다. 하지만 1945년에 독일군이 다리를 폭파했다. 다리를 만든 지 100년이 되던 1949년에 재개통되었다. 지금은 도나우 강에 있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다리이다.

부다와 페스트 지역을 이어 주면서 지금의 부다페스트로 통합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리 앞뒤에는 4마리의 사자 조각상이 있기 때문에 ‘사자 다리’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다리 이름은 다리 건설의 주요 후원자였던 헝가리의 국민적 영웅인 세체니 이슈트반에서 따왔다.

나는 은은하게 빛나는 세체니 다리를 보면서 며칠 전에 만난 Maor를 떠올렸다. 수요일, 그는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로 왔다. 약속을 지켰다. 5시에 부다페스트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6시 즈음에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그의 문자를 받았다.

전통 헝가리 음식을 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이미 예약을 했다고 했다. 레스토랑 위치를 구글맵 링크까지 걸어서 보내주는 섬세함을 보였다. 심플라와 오페라하우스가 있는 중간이었다.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풀코스 요리를 주문하는 식당은 혼자가면 부담스러운(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연인이나 가족 단위 식당이라) 곳이었지만 귀국하기 전에 한번은 가봐야지, 라고 벼르고 있었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았을까, 예약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을 미리 예약까지 해놓다니.

Maor의 안목을 믿고 추천해주는 헝가리 코스요리를 시켰다. 아주 천천히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맛은 훌륭했고 종업원의 서비스도 만족스러웠다. 맛좋은 음식을 보니 술이 당겼다. 20유로를 주고 화이트와인을 주문했다.

그도 심하게 감기에 걸려 있었다. 비엔나는 감기 걸리기에 딱 좋다고 하니깐 그가 맞장구를 쳤다. 쇤브룬 궁전에 20유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는데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하더라고 투덜댔다.

비엔나는 모든 것이 비싸고 서비스도 형편없다고 했다. 그도 부다페스트가 좋단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열심히 비엔나와 부다페스트에 대해서 떠들었다. 그러다가 음악으로 화제가 이어졌다.

입구 쪽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오르간(정확한 이름은 모르겠다, 피아노는 아니고 속이 비추는 작은 오르간이라고 해야 할까)과 색소폰 등 3인이 1조가 되어 연주를 하고 있었다. 나는 연주자와 등지고 앉아 있어서 그들의 연주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느리고 애달픈 음악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마침 서부영화 고전 Once Upon a Time in the West가 연주되고 있었다. 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는 오래된 영화냐고 물었다. 1968. 아, 까마득했다. 너도 나도 태어나기 전 영화라고 했다. 음악에 얽힌 개인적인 사연으로까지 이야기가 흘러갔다.

몇 년 전이었다. 눈이 와서 꼼짝없이 술집에서 세 사람이 갇힌 적이 있다. 그 중 한사람이었던 B. L은 술에 취해서 자고 있었다. 눈이 와서 그런지 감성에 젖은 B가 죽을 때 듣고 싶은 음악이 있냐고 뜬금없이 물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는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Once Upon a Time in the West를 언급했다. 나는 B의 말을 듣고 나중에 영화를 찾아서 보았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을 담당해 내용보다는 사운드에 더 집중했던 영화였다.

생물학과 교수, 미래가 촉망되던 젊은 대학 교수였던 B. 학교 비리 근절에 앞장섰다가 잘렸던 그. 하지만 그 학교는 여전히 비리의 온상이었다. 얼마 뒤 다시 만났을 때 그에게 물었다.

지금, 그 상황이 되풀이된다면 그때처럼 비리 근절에 앞장설 것이냐고. 그 사건이 있는지 십년이 지난 시간이었고 그는 2년이 지나면 오십이 될 나이였다.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B는 대답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 곡은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였다. 독일 감독 롤프 쉬벨(Rolf Schubel)이 이 곡을 모티브 삼아서 영화로 제작하기까지 했다. 음악은 레죄 세레쉬의 작곡, 라슬로 야보르의 작사로 1933년에 발표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

1936년 헝가리에서 발생한 일련의 자살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사람을 죽게 만든다는 소문에다 ‘금지곡’이 되었다는 전설마저 덧붙여졌다. 흥행의 귀재들이 부다페스트로 몰려들었다. 미국에서는 1936년 말에 미국판 ‘글루미 선데이’ 음반을 출시했다.

하지만 정말 그 사람들의 죽음과 음악이 관련이 있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당시에 헝가리가(음악하고 관련 없이) 세계 자살률 1위 국가였다. 우연히 음울한 멜로디 음악과 잘 맞아떨어졌다.

Maor는 이 노래도 알지 못했다. 나는 세체니 다리를 언급했다. 세체니 다리가 배경으로 나와 더욱 유명해진 영화라고. 세체니 다리는 밤이 되면 더 아름다워진다. 380m의 케이블로 이어진 수천 개의 전등이 도나우 강의 수면을 비춘다.

나는 다리 한 중앙까지 걸어왔다. 혀 없는 사자가 양쪽을 지킨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사자상을 조각했다며 자부심에 가득 찼다던 조각가. 흠집을 발견하면 자살하겠다고 했다던 그.

어린아이가 묻는다, 아저씨, 왜 사자 혀가 없지요? 그래서 그 조각가는 자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화일 뿐, 검증된 것은 아니다.

세체니 다리는 그 위치상으로도 완벽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완벽한 공간 구성이 된다. 검은 강 위로 금빛 그림자가 드리우고 모든 것이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난다. 나는 다리 오른쪽으로 걷는다. 그쪽이 국회의사당의 야경이 더 아름답다. 나처럼 야경을 보기 위해 온 여행객들이 많다.

부다 성 아래까지 왔을 때는 푸니쿨라(산악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나는 예전처럼 걸어서 성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어두워서 그런지 달팽이처럼 둥글게 나 있는 돌바닥이 멀게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다. 잠깐, 예기치 못한 두려운 상황을 상상해봤다가 그냥 웃어버렸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웃다보니 기침이 터졌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물일수록 상처가 많다. 부다 지역의 남쪽 언덕에 자리한 부다 왕궁도 재건과 파괴가 반복되었다. 13세기 후반 벨러 4세가 처음 건축했다. 15세기 마차시 1세가 몽골 군의 습격을 받아 파괴된 것을 재건하였다.

다시 오스만투르크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17~18세기에 재건 및 확장 공사를 했다. 또 다시 헝가리 독립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대대적인 개축을 시작하여 1904년에 완공했다. 왕궁 건설의 기쁨도 잠시 제2차 세계 대전 때, 폭격으로 무너졌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왕궁보다는 박물관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전쟁의 흔적은 여전히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파괴와 반복의 연속적인 상흔들이.

화이트 와인을 각자 마지막 한 잔씩 남겼을 때 Maor가 말했다. 비엔나에서 어떤 친구를 만났다고. 그 친구한테 마리화나가 있어서 같이 피웠다고. 나는 프라하에 있을 때 휴게실에서 마리화나를 흡입하던 남자를 떠올렸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게 그렇게 굉장하니?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도 어깨를 으쓱하며 굉장히 사람을 활동적이게 만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이곳에서 마리화나를 산 적이 있다고 했다. 밤중이었고 술도 한잔 마신 뒤였다.

만포린트 주면 마리화나를 준다고 해서 무작정 돈을 지불했다고 했다. 하지만 숙소에서 풀어보니 가짜였단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것이 필요하니?’ 평소 유쾌한 그는 잠시 심각하게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너는 아니? 틈 말이야. 틈이 있잖아. 틈. 그 틈을 그것이 메워줘. 네가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틈. 틈을 메우는 것. 여행도 일종의 틈 메우기 아닐까. 나는 그에게 뭔가를 충고 하려다가 그 문장들을 꿀꺽 삼켰다. 나의 20대를 생각했다. 그 많은 틈들. 고민과 우울들.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그때.

지금 나는 나이를 먹어서 누릴 수 있는 여유로 그에게 충고를 하려고 했다. 진정한 어른은 양쪽 귀를 활짝 열고 입을 조심스럽게 닫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밖으로 그와 함께 나오자 혼자일 때와 달리 어디선가 남자들이 따라붙었다. 포르투갈에 있을 때 어떤 남자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필요하냐고? 남자들은 2인 1조였고 뭔가를 말하면서 필요하냐고 했다.

Maor는 대단히 화를 내면서 전에 가짜를 샀던 것을 언급했다. 그와 헤어져야하는 갈림길에 왔을 때까지 세 팀의 남자들이 들러붙었다가 떨어졌다. 이 사람들은 기막히게 ‘틈’을 발견할 수 있는 장사꾼들이었다.
 

부다 성에 있는 투룰(Turul). ⓒ차노휘


빙 둘러가지 않고 성벽에 나 있는 계단을 오른다. 고개를 들어보니 부다 왕궁 입구에 거대한 청동상 새가 보인다. 헝가리 민족의 상징인 전설의 새 ‘투룰(Turul)’이다. 투룰에 의한 전설은 다양하다.

헝가리 민족의 시조인 알모시의 어머니가 태몽을 꾸었다. 꿈에 투룰이 나타나 태어날 아이가 위대한 민족의 훌륭한 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또 마자르 민족의 지도자가 꾸었던 꿈에도 투룰이 나타나 독수리에게 공격받는 그들의 말을 구하고 지금의 헝가리 영토로 인도했다는 설이 있다. 부다 왕궁의 투룰 조각상은 유럽에서 가장 큰 새 조각상이기도 하다.

마자르 족인 David. 심플라에서 만난 그와 그의 친구 이름도 David였다. David라는 이름이 헝가리에서는 일반적이라고 했다. 둘 다 반듯했고 예의가 발랐으며 공과대학생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David는 phd과정을 밟아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기를 원했지만 또 다른 David는 취직하기를 원했다. 나는 물었다. 한국은 청년 실업이 문제인데 이곳은 어떠냐고. 그의 얼굴에 어두운 기운이 잠깐 스쳤다. 반듯한 학생들의 일상 속에서도 틈이 작용하고 있었다.
 

David와 그의 친구 David. ⓒ차노휘


나는 부다성 성곽에 드디어 올라갔다. 세체니 다리 뒤로 펼쳐지는 황금 풍경을 프레임에 가뒀다. 기침이 터지자 손이 떨렸다. 풍경이 흔들거렸다.

Maor와 헤어져야 할 갈림길. 남은 여행 건강하게 보내기를 기원하며 서로가 포옹했다. 그리고 막 돌아서려는데 Maor 외쳤다. ‘앗, 저것 봐! 태양이 움직이고 있어. 태양이.’

성 이슈트반 성당 근처에 물레방아 같은 놀이기구가 있다. 매번 지나갈 때마다 보는 것이지만 한 번도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놀이기구였다. 조명 달린 그것이 돌아가면서 둥근 원을 그렸고 어둠 속에서 태양처럼 보였다.

그것을 가리키며 Maor가 외쳤던 것이다. 태양이 움직이고 있다고. 움직이는 것은 지구(우리)인데, Maor의 눈 속에서는 태양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 카메라 속에서도 풍경이 그때의 태양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저 황금 들판에 부는 바람처럼 떨고 있었다.
 

세체니 다리 야경. ⓒ차노휘
밤거리 야외 카페.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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