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현재

도하니 거리의 시너고그(Synagogue). ⓒ차노휘

 
3박 4일 간의 비엔나 일정을 마치고 부다페스트로 돌아 왔다. 비엔나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2시간 헤맸던 부다페스트 버스터미널.

그곳이 보이자 고향에 온 것처럼 가슴이 편안해졌다. 숙소로 가는 길에도 메트로에서 내려서 걸어갔다. 넓고 긴 도로와 잿빛 건물들, 건물 사이로 해가 지면서 뿜어내는 황금빛 노을은 눈이 부셨다. 나를 환영하는 빛이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뭔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알았다. 휴게실 곳곳에 공지가 붙어있다. 오늘은 호스트가 저녁을 제공한단다. 식사뿐만 아니라 이벤트 몇 개가 늘었다.

토요일과 월요일에는 호스트가 저녁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화요일에는 맥주를 ‘쏜’단다. 비수기여서 이벤트가 늘어난 것일까, 아니면 이런 이벤트가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일까.

체크인을 끝낸 나는 짐을 정리하고 장을 본 뒤, 노트북을 들고 미리 휴게실로 내려갔다. 500cc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저녁 식사인 투로슈 추싸(Turos csusza)가 다 만들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는 몇 가지를 정리했다.

세 군데 숙소 출입구 비밀번호, 유로, 코룬, 포린트 돈 단위와 승차권, 현금 등. 이곳 숙소는 비밀번호를 두 개 외워야 한다. 길거리에서 들어오는 성문과 같은 문 출입구 비밀번호와 2층에 있는 리셉션 비밀번호. 3층에 있는 여성 전용 휴게실과 룸으로 들어가는 문은 카드를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 비밀번호도 2주에 한 번 씩 바꾸는 듯했다. 아무리 기존 번호를 눌러도 열어지지 않아 물었더니 그런다고 한다. 다행한 일은 아직 헷갈려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투로슈 추싸를 들고 막 탁자에 앉았을 때 이스라엘 출신 Maor한테 문자가 왔다. ‘도착했니?’ 그 전에 비엔나에서 떠나기 전에도 문자가 왔다. ‘내일(일요일)에 비엔나에 도착해. 너는 언제까지 비엔나에 있을 거니?’ ‘앗! 우리의 환상적인 엇갈림? 나는 내일 부다페스트로 가.’ 나는 답장을 보냈다.

그랬더니 그가 곧바로 문자를 한다. ‘하루만 더 기다려. 비엔나에서 이틀 있다가 폴란드로 같이 가자. 폴란드는 환상적인 도시야.’ 나는 멋진 웃음과 함께 문자를 날렸다. ‘내가 보고 싶으면 네가 부다페스트로 와, 나는 그곳을 아직 알지 못했어.’ 

보내놓고 보니 갑자기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거였다. 다시 문자를 날렸다. ‘너 유대인 맞지?’ ‘응.’ 그한테서 답이 돌아왔다. 

다음날이었다. 새벽부터 낀 안개가 아침 식사를 끝냈을 때에도 옅어지지 않았다. 스멀스멀 감기 기운이 목까지 차올라서 간헐적으로 기침을 뱉었다. 안개와 감기는 상극이었다. 안개 속 찬기가 목을 자꾸 간지럽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하니 거리에 있는 시너고그로 향했다. 시너고그(Synagogue)는 유대인 회당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헝가리는 폴란드 못지않은 유대인 학살지이다.

그 당시, 부다페스트에 거주하는 20만 유대인 중 3분의 1이 학살당했다. 유대인 거주지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그곳에 있던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시너고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로 사용되었으며, 부다페스트 게토에서 학살당한 2,000여 명의 시신이 안뜰에 묻혀 있었다.

왜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따돌림을 받았을까. 잠깐, 익살스럽고 사교적인 Maor 얼굴을 떠올렸다. 따돌림을 받을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이태리 남자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감성적이고 열정적이라는 다른 말이다.

그러자 그가 반색을 하며 좋아라했다. 모든 유대인들이 자기와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내가 본 외국인 중에서 최고의 사교가였다. 많은 사람들하고 쉽게 어울렸다.

그런 그가 내게 말했다. 독일 사람들은 차갑다고. 마음이 우리와 다르다고. 나는 그의 의도를 알면서 되레 반문했다. 감성적인 것보다는 이성적인 그들 성격이 좋지 않니?

나는 여행지에서의 그와 일할 때의 그는 다를 거라고 유추한다. 능청스럽고 농담을 잘하고 한시도 지루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그는 능력자이다. 법률가라는 그의 직업적 특성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교육 환경 덕인 듯했다.

인종을 가리지 않고 접근하는 법을 알았으며 유머를 잃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식사를 하러 갔는데 탁자에 Palinka(헝가리 전통 술) 병에 물을 담고 꽃을 꽂아두었다.

그것을 보고 주문하러 온 주인 아저씨한테 아, 저거 마셔도 되냐고 묻는다. 예약하고 간 식당에 직원이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려 하자 그는 어머, 제 이름이 없네요? 라고 되묻는다.

그리고는 놀란 직원 얼굴을 보며 농담이라고 내 이름은 세 번째 줄에 있는 Maor라고 가리킨다. 이런 사소한 농담들이 금방 처음 본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게 했다. 그렇다고 설렁설렁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주문을 할 때 메뉴판을 보고 꼭 확인한다. 그리고는 어떤 건지, 이미지가 있으면 보여줄 수 있는지 등을 확인하며 주문 완료를 한다. 뭔가 입에 안 맞았을 때는 다른 것으로 대체해주라고 말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가 차갑다고 한, 독인 사람들보다 일할 때는 더 냉정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탁월한 사교성은 좀처럼 한국 사람들에게서 보기 힘든 면이다. 네 살 어린 헝가리인 David는 성실한 공과대학생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한국 대학생들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PHD 과정을 밟아서 연구자나 교수가 된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니깐 말이다.

하지만 둘 다 우려하며 걱정하는 것은 북한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비슷한 질문을 내게 던졌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과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두 사람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네가 북한문제에 대해 우려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한국 사람에게는 아주 민감한 문제이고 더군다나 내가 영어로 이 문제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서 답을 미루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네가 생각한 것처럼 한국에서 전쟁이 곧 날 것처럼 분위기가 험하지는 않다, 라고 했다.

유대인 Maor. 그가 대표적인 유대인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 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그의 민족을 만났다. 고리대금업자. 그것도 지독한 수전노로. 그 당시 유대인 대부분은 고리대금업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금융업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에도 그들은 직업 선택과 거주지 제한을 받아서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직업을 가져야 했다. 오랜 세월동안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강인한 생존법을 터득했다고나 할까.

결과적으로 그들은 일반 직업이 아닌 금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막대한 자본의 힘으로 언론, 통신사, 석유, 식량회사 등 주요 산업들을 장악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시너고그 뒤뜰에 있는 은 버드나무 모형. ⓒ차노휘


도하니 거리에 있는 시너고그는 양파 모양 돔이 특이한 건물이다. 독일 건축가 루드비히 페르스터가 건축한 이 건물은 무어 양식(Moorish)이 사용된 중간 중간 모자이크 장식이 지루함을 막아주었다.

나는 3000포린트를 주고 입장권을 샀다. 남자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종이로 만든 키파를 정수리에 써야 한다.

기념품 가게를 지나서 회랑에 들어섰다. 그곳 벽에는 1859년부터 최근까지의 시너고그 모습이 사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모습과 그곳에서 학살된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사진에 남아 있다.

회랑 바깥쪽은 공동묘지인 셈이다. 회랑을 지나면 작은 뒤뜰이 나온다. 그곳에 은으로 만든 버드나무가 있다. 버드나무 잎 하나하나에 그 당시 희생된 유대인 이름이 각각 쓰여 있다.

은 버드나무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객을 보며 안쪽으로 향했다. 안쪽은 벽 한쪽에 묘비석을 일렬로 진열해 놓았는데 사람이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사념에 잠겨도 좋을 장소였다.

막 앉아서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빈 그림자를 보고 있을 때 Maor한테 문자가 왔다. ‘나, 수요일에 부다페스트 가.’ ‘응. 오게 되면 연락해.’ 여행지에서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를 일이다. 

온다는 사람이 안 올 수 도 있고 안 온다는 사람이 올 수도 있는 일, 막상 만나봐야 온 것이 온 것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약속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반대로 그 약속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가능한 변수를 포옹한다고나 할까.

냉담한 내 반응에 다시 문자가 온다. ‘그런데 너는 어디야?’ ‘나, 시너고그.’ ‘그런 곳도 있니?’ 둘은 서로 여행 목적이 달랐다. 즐기는 쪽과 역사현장을 탐방하는 쪽이라고 굳이 표현해도 되겠다. ‘이것 번역해줄 수 있니?’ 마침 잘 됐다 싶어 찍어 놓았던 추모비 내용을 보냈다.

그랬더니 답장이 온다. ‘그거 헝가리어야. 나는 유대인이야.’ 그래서 다른 것을 보냈다. 그랬더니 문자가 온다. ‘그것은 히브리어야. 이스라엘 말은 맞아. 하지만 그것은 성경 히브리어라서 굉장히 번역하기가 어려워.’ 그리고는 잠시 시간을 두더니 답이 온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동안 고통 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나도 그렇게 짐작하고 있다고 했다.
 

시너고그 벽에 붙어 있는 헝가리어로 적힌 기념비. David에게 다시 물으니 헝가리를 해방시킨 소비에트 연방이 40년 전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유대인 빈민가의 벽을 파괴한 기념비라고 한다. ⓒ차노휘
시너고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경 히브리어로 적힌 책. 홀로코스트에 관한 내용이다. ⓒ차노휘


잠깐, 그의 조상이 남긴 교회에서 유대인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너의 민족이 이렇게 수난을 당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지금은 독일과의 관계가 어때? 라는 등. 

박물관을 들렀다가 도나우 강변에 신발을 보러 간다면서 이제 네 시간에 집중하라는 문자를 남겼다. 그는 도나우 강변의 신발 사연을 모르는 듯했다. 그는 휴식을 취하러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오랜만에 휴가를 내서 오사카로 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객이 일본인의 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입장은 어떠냐며 자꾸 묻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과거를 되짚어서 아픔을 들추고 싶지는 않다. 그는 2018년이라는 현재에 스물여덟 살의 이스라엘 청년이다. 그의 여행을 존중해줘야 한다.  
 

시너고그 뒤뜰.


추모객이 많았다. 박물관에 들러 그들의 의식에 사용하는 것이며 도구를 보고는 나는 다시 걸었다. 도나우 강변에 있는 ‘유대인 추모 신발’을 보기 위해서였다. 도나우 강변에 뿌려진 약 60여 쌍의 낡은 신발이 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살해되어 강에 버려진 유대인들을 기리기 위해 헝가리 영화감독 캔 토가이(Can Togay)와 조각가 둘라 파우에라(Cyula Pauer)가 기획하고 만들었다.

강변을 따라 걸을 때 짙은 안개가 내내 나를 따라왔다. 찬기 품은 그것은 여지없이 나를 공격했다. 나는 안개에 둘러싸인 세체니 다리와 국회 의사당의 신비로운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안개가 그녀만의 작품을 완성해놓고 있었다. 유대인 신발이 있는 강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른 신발뿐만 아니라 여자 구두 및 어린이들 신발에 추모객들이 꽃아 놓고 간 붉은 장미가 핏빛처럼 안개 속에서 도드라졌다. 간간이 기침을 해대며 나는 묵념을 했다.

시간의 길 위에 버려진 것들에 관한 슬픔과 잊혀짐과 또 다른 생명을. 이 많은 것들이 시간이라는 길 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누가 어느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그 많은 것들이.
 

도나우 강변에 있는 유대인 추모 신발.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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