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라는 젊은 피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본관 홀, David. ⓒ차노휘


아이러니하게도 즐거우면 글쓰기가 안 된다. 적당한 고독을 친구처럼 둬야한다. 선상 파티는 이래저래 유쾌한 친구들을 만들어 놓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웃고 떠들 수 있었다. Maor는 늘 레몬조각 넣은 희석시킨 드라이진을 들고 있었고 내게 아낌없이 건넸다. 애연가이기도 했다. 대화를 이어갈 수 있고 술도 같이 마실 수 있었다.

여행의 묘미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일 수 있지만 나는 내 리듬을 깨고 싶지 않았다. 글이라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면, ‘영원한 다음’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번 여행 테마는 머무름과 글쓰기였기에 힘들더라도 계획한 대로 밀고 가기로 했다.

고민 끝에 오스트리아 빈에 다녀와도 좋을 것 같았다. 체코도 그렇지만 헝가리도 오스트리아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큼 과거의 합스부르크 가(Haus Habsburg)의 영향력은 컸다.

3박 4일 동안 빈에서 보내기로 했다. Maor는 이틀 뒤 크로아티아로 간다고 했으니 내가 이곳에 다시 오는 6일 토요일은 휴게실이 조용해지겠다(휴게실은 세계 각국 여행객들로 늘 북적대지만).

혼자 여행하는 사람일수록 고독할 수가 있다.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는 듯 보이지만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짙다. 나는 후자 편이다. 같이 있으면 즐겁게 이야기를 하지만 만남과 헤어짐을 미리 준비한다.

언제 어디서든 낯선 사람을 만날 수 있지만 또 언제 어디서든 낯익은 사람과 헤어질 수 있다. 집착이란 있을 수 없다. 늘 깔끔한 만남과 헤어짐이어야 한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더라도 그것이 중첩되면서 인연의 끈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난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만났던 David를 오늘 만나기로 했다. 그와는 인연이라면 인연일 수도 있겠다.

그는 부다페스트 공과대학(Budapest University of Technology and Economics) 졸업반이다. 1월 22일 마지막 졸업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이 1월 2일. 나를 위해 일주일 시간을 낸다고 했지만 일주일 동안 그와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다.

더군다나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마지막 주일은 그의 집에 초대까지 받았다. 늘 그렇듯 혼자 명소를 찾아다니는 것도 꽤 재미가 쏠쏠하다. 혼자일 때는 누군가에게 신경 써야 할 에너지를 절약한다.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갈 수 없지만 이 생각 저 생각은 할 수 있다.

나는 최대한 부담을 덜 만한 만남을 생각했다. 그가 다니는 학교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학교도 그렇지만 도서관도 아주 오래되어서 꼭 보고 싶던 참이었다. 겸사 그의 안부를 물으면 될 것 같았다.

숙소에서 트램을 한 번 타고 5분 정도 걸으니 부다페스트 공대가 나왔다. 부다페스트 중앙 시장에서 자유의 다리를 건너면 대학교가 있다. 미리 와서 학교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약속 시간보다 일찍 출발했다.

학교 근처 카페 분위기도 보고 싶었다. 나는 프라하의 Cafedu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곳이 학교 근처에 있을 것 같았고 그 분위기에 묻히고 싶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한 7분 정도 걸었을까, 서점을 지나쳤을 때 창문 너머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각자 노트북을 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간판을 봤다. 헝가리어는 읽지 못하지만 그 옆에 ‘URBAN LAB’이라고 적혀 있었다. 몇 초 망설이다가 문을 밀었다. 학구적인 분위기를 나는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그것을 충족 시켜줘야 했다.

David와 약속 시간도 한 시간 삼십 분이 남았다. 끝내야 할 글도 있었다. 무엇보다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카운터에 나이 드신 직원이 앉아 있었다. 나는 물었다. 여기에서 공부해도 되냐고. 결론적으로 하루에 10유로(3,000포린트)를 내고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마도 자격 요건이 있겠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여러 사항을 건너뛰었다.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3,000포린트. 나는 David를 만나기 전까지이니 한 시간 삼십 분에 만 삼천 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커피나 와이파이, 스캐너 등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지만 내게 그 모든 것은 필요 없었다. 앉아서 노트북만 열면 됐다. 직원은 다음에 또 이용할 수 있도록 당사 홈페이지를 열어서 보여주었다.

나는 유로로 하루치를 계산했다. 포린트는 빈에 가기 때문에 환전하지 않았다. 빈은 유로를 사용한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혼자 사용하기도 하지만 룸이 있어 스터디 룸 같은 공간 활용도 되었다. 논스톱도 가능했다. 24시간이 가능한 회원은 한 달에 3만 포린트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내가 머무르지는 않으니 내게 해당사항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 머무르는 것이 아쉬웠지만 내가 찾던 분위기였다. 나는 은연중에 모든 것을 프라하와 비교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나칠 정도로 검소했다. 한국이었다면 광택 나는 가구부터 첨단 시설을 갖췄을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찾으니깐 말이다. 이곳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필요한 몇 가지만 보충하는 정도로 보였다.

이용객들은 이런 분위기에 익숙한 듯했다. David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미리 와 있는 것을 알고 약속 시간을 당기자고 했지만 10유로를 내서 돈 값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2시 정각에 이곳으로 오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시간에 맞춰서 왔고 어머니가 만들었다며 내게 쿠키를 선물했다. 둘은 요란한 안부를 생략한 채 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정문. ⓒ차노휘


부다페스트 공과대학은 1782년에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과대학이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대학 교수와 연구원 34명은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다.

지금도 대학 총 학생 수 21,171명 중에서 약 1,381명의 학생들이 해외 50개국에서 왔고 우리나라에서도 교환학생들이 온다. 부다페스트 공과대학은 헝가리 공학 학위의 약 70%를 차지한다. 지금의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98년부터라고 한다.

그가 제일 먼저 안내한 곳은 도서관이다. 대학 중앙에 있는 도서관은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입구에서 겉옷을 벗고 가방을 맡겨야 한다. 그러면 직원이 보관용 번호를 준다.

가방 속에서 노트북과 필기구 등은 꺼낼 수 있다. 왜 이런 절차가 있냐고 그에게 물으니 오랜 관습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관습이 일종의 의식처럼 보였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세속의 먼지 묻은 것을 벗어두고 이곳만의 ‘경건함’을 즐기라는 것처럼 말이다.

둘은 겉옷을 벗고 가방을 맡겨두고 들어갔다. 반들반들한 대형 도서관을 생각하면 안 된다. 대형도서관이 많은 한국 대학과는 달리 아담한 실내이다(설립될 당시에는 상당한 크기였으리라).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탁자와 아치형 천장이 있는 리딩실, 자유로운 토론실 등. 활동 사항에 따라 다양한 룸이 있었다. 학생들의 자유스러움과 열기가 곳곳에 묻어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1층 홀은 정겨웠다. 트리 옆에 조그마한 서랍이 달린 가구가 있었다. 그곳에는 편지 등이 꽂혀 있었다.

다음 크리스마스 때까지 이루고 싶은 소원을 적은 메모를 봉인하여 넣어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에 간단한 메모를 남겨 봉인하고 2층으로 나 있는 곡선 계단을 올랐다.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도서관 홀. ⓒ차노휘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도서관에서 바라본 캠퍼스. ⓒ차노휘


2층 창문에서 바라본 캠퍼스 풍경은 온통 젖어 있었다. 새벽에 비가 왔다. 창 바로 앞에 아래로 가지를 뻗은 제법 큰 나무가 세월의 흔적을 말하고 있었다.

나무 옆으로 뻗은 길, 양쪽으로 아직도 푸른 잔디, 섬세하게 나이 먹은 듯한 건물들. 캠퍼스의 주인은 단연코 오래된 건물들이었다. 박공지붕과 푸른빛 첨탑처럼 보이는 뾰족한 탑과, 모자이크를 해놓은 듯한 지붕 무늬.

오래된 역사만큼 헝가리의 역사 현장에서도 이곳 학생들의 참여는 컸으리라. 대학 본관 홀에서 한참 동안 그와 이야기했다. 세계적인 업적을 남긴 본교 출신 과학자와 노벨상 수상자들의 동상(두상)이 있었다. 대학 정문을 마지막으로 학교 소개가 끝났다.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러 가려는데 그가 정문 밖 담장을 따라 나를 데리고 갔다.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단다. 그곳은 우리가 가려는 방향과 반대 방향이었다. 역동적인 여인 동상 옆으로 날짜를 적은 기념비가 나왔다. 앞서 학교 주변을 돌 때 심상치 않아 먼저 사진을 찍어둔 곳이었다.

다름 아닌 ‘1956년 헝가리 혁명’의 발발지였다. 이곳에서 제일 먼저 혁명이 발생했고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출신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 당시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었지만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도 있다.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담장에 있는 1956년 헝가리혁명 기념비. ⓒ차노휘


헝가리 혁명은 1956년 10월 23일에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헝가리의 스탈린이라고 불리던 라코시의 강압 통치, 강제 동원 및 개인 우상화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궁극적 목적은 구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1953년의 동독 베를린의 붕괴 영향도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

혁명은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학생들뿐만 아니라 작가, 시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하였다. 이들의 첫 번째 요구사항은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독자적인 국가 정책 수립이었다.

특히 이들은 소련과의 관계가 평등의 원리에 기초해서 조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는 경제적인 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계획의 수정을 원했다. 공장의 운영에 노동자를 참여시킬 것을 요구했다.

또한 임금 수준을 개선하고 생활수준의 항상도 요구했다. 이 모든 것을 위해 나지 임레(Nagy Imre ; 1896년 6월 7일~1958년 6월 16일)에게 정권을 넘기라고 주장했다.

나지 임레는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이 정치적 변동을 겪을 때 헝가리에서 잠시 수상직을 맡았던 온건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수상직에 있을 때 일련의 개혁 정책으로 일반 대중에게 신임이 꽤나 높았다.

시위는 수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였지만 대체적으로 온건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라디오 방송국을 지키던 정치경찰(HVA)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함으로써 모든 상황은 돌변한다. 시위자들은 돌과 화염병(몰로토프 칵테일), 총을 들고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소련의 괴뢰 정부나 다름없던 헝가리 사회당 정부는 소련의 군사 개입을 요청한다. 소련군의 탱크가 시내 전역으로 진주한다. 하지만 헝가리 국가기구는 완전히 붕괴되어 수많은 헝가리 병사들은 자신들의 무기를 시위 군중에게 넘기고 혁명에 가담한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카다르 야노시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나지 임레를 수상으로 하는 새 정부 구성을 선포하며 혁명이 성공에 이르는 것처럼 보였다.

10월 31일 소련군은 부다페스트를 철수하기 시작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11월 4일 제2차 대규모 군사개입을 단행한다. 당시 소련은 헝가리혁명을 파시스트, 서방의 첩자들이 일으킨 반혁명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소련이 부다페스트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는 3일이 걸렸다. 그러나 헝가리 각지의 무력 항쟁은 12월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15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소련군 병력과 3천대의 탱크 투입 앞에 보잘 것 없는 무기로 무장한 시민군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혁명은 표면적으로는 실패했을지언정 그 정신까지 패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헝가리 혁명 또한 1만 5000여 명의 사상자와 20여만 명에 이르는 국외 망명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먼저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해 건설되었다는 노동자국가 소련의 실상은 노동자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하고 공산주의 권력자들의 이익만을 도모했다.

단지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올바른 사회주의의 건설이 시민과 노동자에 의해 아래로부터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헝가리 혁명의 또 다른 이름은 ‘부다페스트의 봄’이다. 헝가리 혁명 이전의 폴란드 반소 항쟁(바르샤바의 봄)과 더불어 훗날 1968년 프라하의 봄에도 영향을 끼쳤다. 물론 지금의 자유국가 헝가리가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 원동력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젊은 피가 모여서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젊은 피는 생물학적인 젊은 피가 아니다. 옳지 않은 것을 보고 옳지 않다고 말하는 힘이다.
 

1956년 헝거리 혁명 당시 목이 잘린 스탈린 동상.


잠시 그곳에서 묵념을 하듯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우리는 다른 장소로 가기 위해서 지하철 승강기를 탔다. 공산주의 시절 반공시설로 사용하기 위해 이곳 지하철은 프라하만큼이나 아주 깊다. 깊은 그곳 지하철 역사를 지금은 산뜻하게 디자인해 놓았다. 지금의 헝가리를 대변하듯.

며칠 전 신문사 E가 문자를 보내왔다. 한국은 지금 영화 〈1987〉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어요, 라고. 이미 SNS에서 그 인기를 실감하고 있던 터라 알고 있어요, 귀국하면 꼭 볼 거예요, 라고 답했다.

영화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관련된 그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 듯했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떠올리면 그 유명한(?) 문구가 그림자처럼 딸려온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다. 또 하나의 의문사로 덮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고한 한 젊은이의 죽음을 접했던 모두가 용기 있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충실했던 이들의 행동이 연쇄적으로 사슬처럼 맞물리면서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권력 아래 숨죽였던 사람들의 크나 큰 용기가 만들어낸 뜨거웠던 그 해를 다룬다. 뜨거운 가슴들은 전두환 독재 정권에 맞서 6월 항쟁을 일으킨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실시 등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자유를 향해 걸어온 헝가리 시민혁명. 우리에게 모범을 제시하였고 우리 또한 지난 2016년 겨울 촛불혁명으로 이들에게 한 단계 더 성숙한 모범 답안을 제시했다.

그 꾸준함이 그들(우리) 스스로 자유와 진정한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쟁취하게 한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마자르족 David도, 한민족 차노휘의 몸속에 흐르는 젊디젊은 푸른 피도.
 

부다페스트 지하철 내부. ⓒ차노휘


※ 본문 속 ‘헝가리혁명’은 ‘크리스하먼의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1945~1983》, 갈무리, 1994’에서 참조했다.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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