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에 싸인 그 불확실함

선상에서 바라 본 야경 . ⓒ차노휘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후두둑, 제법 세차게. 빗소리에 눈을 떴다. 저 비가 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눈다운 눈을 못보고 왔다. 한국은 이번 겨울이 유난히 춥다고 했다. 눈도 많이 온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도 여행지에서도 눈다운 눈을 보지 못했다. 인천공항으로 떠나는 새벽 버스를 기다릴 때 잠깐 눈이 왔다. 내가 기다렸던 함박눈은 아니었지만 40일 동안의 공백을 슬퍼하듯 눈물 섞인 비와 함께 내렸다.

배웅해주는 사람의 허전한 눈동자를 일별하며 나는 공항으로 향했다. 여전히 이곳은 비가 왔고 눈은 잠깐 오다가 말았다.

연말, 새벽부터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일어나서 길거리 쪽으로 나 있는 창문 밖을 내다봤다. 숙소는 관광명소인 구도심지 교차로 옆 건물이다. 원형 교차로를 빙 둘러서 오래된 큰 건물 네 채가 군림하듯 서 있다.

옥상에 각각 유명한 기업 옥외 간판이 걸려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SAMSUNG, 그 맞은편에 중국 은행, 숙소에서 볼 수 있는 ROLEX와 HUAWEI. 이 네 개의 간판 네온사인 등이 매일 밤을 밝힌다.

거리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가로등과 건물이 빗줄기와 어우러져 쓸쓸한 뒷모습처럼 도로 위에 누워있다. 성탄절. 연말. 새해. 제법 묵직한 휴일들을 가지고 나는 이번 여행길에 올랐다.

오늘도 연말과 새해를 견뎌야 한다. 견뎌야 한다는 말이 맞겠다. 한국에서 연말과 새해를 그리 특별하게 보내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특별하고 싶지 않아도 특별해질 것 같았다. 고독이라는 동행자와 함께 말이다. 더군다나 비까지 내리니.

나는 연말 카운트다운 하는 곳을 찾았다. 지난해와 새로 맞이하는 해가 바뀌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기념해야 했다. 프라하에 있었으면 카렐교 폭죽놀이에 참가했을 것이다.

이곳은 이틀 전에 도착한 부다페스트였다. 익숙해져가는 참이었다. 마침 15분 거리에 있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에서 카운트다운을 한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시간이 새벽에서 아침으로 향해가자 비가 이울더니 마침내 그쳤다. 오늘은 페스트 지역에서 부다 지역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부다 지역에 대표적인 성이 부다 성과 어부의 성, 겔레르트 언덕이 있다.

다리를 건너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지형적으로 부다는 언덕이 많고 페스트는 평지가 많다. 그래서 ‘부다’는 ‘언덕’이라는 뜻이고 ‘페스트’는 ‘평지’라는 뜻이다.
 

부다 성에서 바라본 세체니 다리가 있는 풍경.  ⓒ차노휘


평지인 페스트에서 시작해 세체니 다리를 지나 부다 성에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성까지 올라가는 케이블 카 같은 전동차를 이용했지만 나는 달팽이 모양 돌담길을 걸었다.

젖은 공기 속 느린 첨탑 소리. 가볍고 들 뜬 이름 모를 새소리. 발바닥을 상쾌하게 하는 젖은 돌 길. 마침내 성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부다페스트는 잿빛 하늘이 낮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먼 곳에서 먹구름이 몰려 있어 그 무게감이 더했다. 한참 동안 그곳에 서 있다가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미술관에서 오랜 시간 나와 조우를 했고,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이루어진 경비병 교대식을 구경꾼들 틈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어부의 성, 겔레르트 언덕에서 길거리 연주자의 음악을 들으면서 먹구름이 서서히 비켜가는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헝가리의 긴 역사와 각각의 성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에피소드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연말과 새해다. 이번 글은 나의 일탈에 관한 글이다. 그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나는 이스라엘 출신 Maor와 그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래서 성 이슈트반 대성당에서 카운트다운을 하려 했던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비에 젖은 부다 성 일부.  ⓒ차노휘


숙소에 체크인 할 때 티켓 두 장을 받았다. 티켓 한 장으로 휴게실에 딸린 바에서 작은 생맥주나 와인, 음료수를 공짜로 마실 수 있다. 날짜를 넘기면 안 된다. 시간은 6시 이전으로 제한했다.

아마도 여섯시가 지나면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일 것이다. 첫 번째 티켓은 시간을 넘겼다. 글 쓰다가 맥주나 한잔 마셔볼까 하고 시계를 봤더니 5시 55분이었다. 부리나케 아래층 휴게실로 내려가면 됐지만 쫓기듯 맥주를 마시기는 싫었다.

마시고 싶으면 사 먹으면 되지 싶었다. 그 다음날 한국인 대학생 두 명이 들어왔다. 기독교 신자인 그녀들은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한다면서 티켓을 내게 다 주었다.

그래서 리셉션과 바, 주방과 휴게실이 있어 늘 북적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부다 성과 어부 성, 겔레르트 언덕을 깔끔하게 돌고 막 샤워를 하고 난 뒤여서 가볍게 맥주 한두 잔 마셔도 좋을 시간이었다.

노트북을 챙겼다. 맥주를 마시면서 글을 쓰고 자정이 되기 2,30분 전에 성 이슈트반 대성당에 가서 연말과 새해를 즐기면 오늘 일정이 무난하게 마무리 될 거였다.

맥주를 두 잔째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들이 쳐들어온 것이. 스물여덟 살이고 이스라엘 출신이라고 Maor가 자신을 소개했다. 친구 두 명을 옆에 끼고 그는 많은 것을 물었다. 그의 한손에는 레몬 조각이 든 투명한 알코올이 있었다(진이나 보드카이리라).

내 입은 그의 말에 대꾸를 해주고 있었지만 눈은 모니터를 여전히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Maor는 지금 일하고 있냐고, 노트북을 접으면 안 되냐고, 지금 휴일이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의 말에 이렇다 할 변명도 하지 못하고 노트북을 접었다.

그는 큰 눈을 연신 동그랗게 뜨며 이야기를 했고 나는 가볍게 호응해주며 경청했다. 싱가포르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돌아와서 법률을 전공했단다. 이번에 직장을 옮겼는데 21일부터 첫 출근이란다.

그 공백 기간 동안 여행을 하고 있단다. 부다페스트는 4번 왔는데 첫 번째가 15년 전 부모랑 함께 왔다면서 3년 전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이야기로 마무리 했다.

오늘 뭐 할 거냐고 묻는 그의 말에 내 계획을 말했다. 그는 갑자기 머리를 쥐어 감싸며 웬 교회냐며, ‘범생이’ 보듯 나를 봤다. 그러면서 리셉션 쪽으로 가서는 뭔가를 묻더니 돌아와서 배를 타자고 했다.

그곳에서 4시간 동안 댄스 파티가 열린다고. 술도 마실 수 있고 야경도 볼 수 있다고. 물론 카운트다운까지도. 나는 지그시 그를 보며 물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니? 애써 잠재운 내 ‘끼’를 깨우고 있는 너는?

갔다! 10시부터 승선한다고 하니 7시 30분에 휴게실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사이다를 탄 진에 레몬 조각을 넣어 마셨다. 내게도 권해서 그렇게 했다. 폴란드, 인도 친구와 합석했다. 이들도 간다고 했다.

Maor는 가만히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를 데리고 이 친구 저 친구 소개해주는데, 그날 내가 여행 중에 만나야 할 사람을 다 만난 것 같았다. 국적도 다양했다. 

유덕화 닮은 중국인, 단단하게 생긴 독일인 형제(그들은 정장 차림이었고 시종일관 예의가 발랐다),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등. 나는 정신없이 소개받고 소개하고 다녔다.

그리고 9시 10분에 선상 클럽을 신청한 네 명은 길을 나섰다. 메트로 한 번 타고 내린 곳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네온사인이 눈부신 것은 물론 미리부터 폭죽을 터트리고 있었다.

길거리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곳을 헤쳐 나가 강 주변으로 갔고 이미 긴 줄이 서 있는 곳에서 줄을 섰다. 모두들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의상에 신경을 썼다. 두꺼운 점퍼 안에 몸매가 드러난 스판 소재용 야한 옷(?)이 보였다.

대만에서 왔다는 여자 두 명이 앞줄에 섰지만 동양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모두들 축제를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다한 모습이었다. 나만 복장이 어설퍼 보였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기분이었다. 그래 20년 전으로 돌아가라는 거지?
 

안개 낀 새벽 거리.  ⓒ차노휘


여행이라고 하면 일종의 자유를 생각한다. 일상의 일탈이다. 하지만 나는 공간만 바뀌었지 내내 초자아가 나를 단속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지금 그것이 반항을 하고 있었다. 단속을 거절하겠다고. 내 이드대로 진행하겠다고.

선상은 1, 2층으로 되어 있었고 1층 오른쪽은 Bar였다. 입장료(7,500포린트)를 내고 숙소에서 미리 신청을 했다. 환영주 한 잔이 포함된 가격이었다. 그 다음은 돈을 내야 했다. 무대는 1, 2층에 있다. 2층은 실내와 선상에 각각 있다.

세 군데에서 DJ가 음악을 믹싱했다.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11시부터 배가 움직인다고 했지만 열정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어서 한 시간 뒤 배가 움직인 지도 몰랐다. 아주 천천히 도나우 강을 흘러갔다.

음악 소리는 컸고 사람들의 몸놀림은 격렬했다. 연신 환호성과 웃음소리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무대 밖에서는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배 움직임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역동적인 열기였다.

4시간 동안 방방 뜨면서 춤췄다. DJ가 자정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카운트다운도 지나쳤을 것이다. 그곳에 있는 모두 다 큰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4,3,2,1이라고.

그리고 모두들 서로에게 인사했다. Happy new year! 네 시간 동안 앉을 새도 없이 몸을 움직여서 땀이 흥건하게 젖었다. 반팔 차림이어도 춥지 않았다. 잠깐 황금빛을 띠며 지나가는 건물들을 봤다. 배가 움직인다는 것을, 내가 강 위에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실감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흘렀을 때는 온통 안개였다. 나는 안개에 휩싸인 건너편 황금빛 도시를 바라봤다.

꿈틀꿈틀. 보이지 않은 내부의 공모를 교묘히 감추는 안개. 등 뒤 열기 뒤로 한가득 품고 있을 불확실한 미래 혹은 우울. 그 많은 계획도 욕심도 조금씩 덜어내야 했던 세월의 궤적들. 아직 정리하지 못한 관계들. 그리움. 용기 없음의 흔적들. 그 모든 것을 안개가 가리고 있었다.
 

안개 낀 부다페스트. ⓒDavid


안개와 전혀 닮지 않을 것 같은 유쾌한 Maor의 눈동자에 고독이 아른 거렸고 말쑥한 신사형의 폴란드 K는 독일인 여자와 가볍게 몸을 흔들었으며 IT 회사에 다닌다는 인도 출신 C는 여전히 홀로 술잔을 들고 돌아다녔다.

어두운 한 구석에서 키스를 나누는 커플들, 프로 뺨치는 춤 실력으로 관중의 시선을 빼앗는 간판 무대 위 여자(남자처럼 덩치가 커서 실은 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한 겨울에도 민소매를 입고 팔뚝 문신을 자랑하는 여자들, 화장실에서 화장지 떨어졌다며 죽치고 있는 여자들, 영원한 얌체처럼 보이는 금발 머리 백인 여자들.

모두가 여행객이었고 강해 보이는 인상 속에 어설픈 순정이 엿보였다. 그리고 타국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있다는 공통된 표시를 냈다. 일종의 외로움. 외로움을 가리려고 하는 들뜸.

한참 청춘이었지만 고뇌를 애써 감추고 있는 어른들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나를 객관화 하고 있는 ‘나’가 있었다, 이들의 국적불명 청춘 사이에서.

새벽 2시가 되자 배는 우리가 탔던 곳에서 멈췄다. 내리려고 입구에 몰려 있는 사람들과 무대에서 아직까지 춤을 추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음악은 영원히 울릴 것처럼 밤안개를 헤집었다.

새벽 두 시의 거리는 서슬 퍼런 안개바다였다. 폭죽은 잠잠해졌고 아직까지 불 켜진 식당이 있었다. 우리는 추위를 쫓으려고 뛰어 들어갔다. 곧 마감 한다고 했다. 뼛속까지 추위가 들이쳤다.

노란 택시가 서 있었지만 종종거리며 다가가는 손님들을 다 외면했다. 아마도 영업이 끝난 것 같았다. Maor가 그 택시로 갔다. 한참을 운전사와 이야기하더니 내게 손짓했다. 타라고. 숙소로 향했다.

그도 취해서 얼굴이 붉게 익었다. 폴란드 친구와 독일 친구는 자취를 감췄다. 인도 친구는 행방이 묘연했다. 택시 안은 둘 뿐이었다.

나는 Maor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고맙다, 새해 혼자 보내지 않게 해줘서 말이야. 성탄절. 이곳에서 홀로 보냈던 것을 돌이켜봤다.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는 클럽에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너무 피곤하다고 말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는 초자아를 데리고 왔고 나는 다시 냉정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김치찌개를 끓이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아, 광기에 휩싸여서 이드에 충실할 나이는 이제 지난 것인가. 말과 달리 탄식하고 있는 사이, 멀리 숙소 불빛이 보였다.
 

동 트는 부다페스트. ⓒ David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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