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많은 연희가 일군 자유와 평등의 식탁

1987년, 나는 그때 뭘 하고 있었던가. 맞다. 그 해 2월, 나는 강원도 철원의 한 신병교육대에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야, 빨리 안 내려? 이 새끼들아, 여기가 너희들 안방이야?”

방한 군모를 깊이 눌러 쓴 솔개 같은 조교들의 악쓰는 소리에 혼쭐이 난 우리 신병 병아리들은 가파른 길을 오리걸음과 낮은포복으로 오르며 연병장까지 갔다.

“이것밖에 못하지? 이 노무시키들이 빠져 가지고는… 오늘은 영하 12도다. 너희들의 땀으로 이 연병장을 녹여버리겠다.”

단상에 오른 중대장은 허연 잔설이 깔린, 딱딱하게 얼어붙은 연병장을 보며 말했다. 나는 절로 웃음을 쏟아내고 말았다. 나는 그 허풍 낀 과장법에 이를 덜덜 부딪치며 절로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곧이어 조교의 태권도 군홧발이 내 가슴팍에 몇 차례 꽂혔다. 나는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가 일어나곤 했다.
 


3시간 후 나는 내가 맞을 만하다고 여겼다. 그 중대장의 발언은 결코 허풍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 연병장은 우리들의 낮은포복, 오리걸음, PT체조, 앞으로취침, 뒤로취침, 선착순 달리기로 땀이 녹아 질척거렸다. 우리들의 훈련복은 흙탕물에 절어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하면 된다’는 말이 푸코식으로 말하면 나의 1987년은 국가권력에 의해 나의 나태와 방종의 신체가 순종하는 신체로 재생산되는 것임을 알았다.

몇 주간의 신병 교육을 마치고 한 격오지 중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을씨년스레 귓불을 때리는 눈보라를 밟으며 중대에 들어섰다. 고된 각종 훈련과 삽질이 나의 일상으로 다가왔다. 

아니 하나 더 있었다. 구타였다. 선임병들은 종종 꼬투리를 잡아내 후임병들을 어두컴컴한 저탄장으로 불러내 쥐고 있던 야삽 자루로 패거나 군홧발을 날렸다.

그 시절에도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 하나 있었다. 허름한, 그러면서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송했던 공간, 선임병들 눈치 안 보고 마음 편히 먹어보고 싶은 곳, 바로 PX(군대 매점)였다. 그랬다. PX는 스물한 살의 나와 또래들에겐 꿈의 공간이자 낙원으로 다가왔다.

입대 전 나는 내 꿈의 공간은 다소 거창하지만 ‘더불어 잘살고,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였다. 그래서 짱돌도 몇 번 던져봤다. 그러나 나는 입대 후 내 숭고한 꿈의 공간을 의식의 밑바닥으로 구겨넣어버리고는 먹거리에만 집중한 채 PX로 그 공간을 대체하고 있었다.

여름, 나는 몇 개의 훈련을 치른 후 1989년 여름날 제대했다. 세상은 변함이 없었다. 모두 그대로였다. 꽃도, 바람도, 새들도, 강물도 그리고 사람들도…. 건물만 높게 올라간 채.

나는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하여 먹고 살기 위한 취직 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운 좋게 대기업 홍보부에 입사했고, 회사가 약속을 어겨 3년쯤 다니다 사표를 내버렸다. 김

영삼 정권이 들어설 무렵 나는 당시 언론고시에 준비에 돌입했는데, 그때 사회학과 출신의 고시원 취준생으로부터 ‘1987년’을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국가와 사회로부터 딱 왕따 당한 느낌이었다. 군복무 3년 동안 우리는 총과 삽에 매달렸고, 전투축구를 하며 체력을 다지기만 했다. 텔레비전은 중대장의 허락이 있을 때만 볼 수 있었고, 사재의 신문조차 군내부로 반입할 수 없었다.

또한 어떤 정신교육을 받았는지 그 시기 휴가를 다녀온 그 어느 누구도 바깥의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TV 드라마 어디에도 독재정권에 대한 시대적 고민을 담은 대사는 없었다. 이십대 초반의 우리는 사회와 정보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었고, 그렇게 단세포가 되어갔다.

6년이 지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6월 민주항쟁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스물한 살 때 PX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으며 군침을 흘리고 있을 때, 다른 내 또래들은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의 깃발을 세우기 위해 꽃다운 목숨들을 내던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군 제대했을 때 입대 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던 세상의 실상은 엄청난 변화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관을 찾았다.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모두가 뜨거웠던 그 해”란 글 밑으로 ‘1987’이란 숫자가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 많이 다루었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1980’보다는 ‘1987’이란 숫자가 영화적 참신성 면에서 더 와 닿았다.

인생의 가장 뜨거운 청춘의 피가 끓는다는 이십대, 굴레에 씐 채 동굴에 갇혀 단세포로 살았던 세상의 바깥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가.

다시 팸플릿을 보았다. 1987 숫자 밑으로 “그들의 선택이 세상을 바꾸다”란 글이 적혀 있다. 세상을 바꾼 주체는 ‘그들’이었다. 어느 한 영웅적 인물이 주인공이 아닌 다수가 주인공이란 뜻이었다. 나는 그 다수를 영화 속에서 만나보기로 했다.

영화의 주된 내용은 이미 우리가 대충은 알고 있는 것이다.

체육관 대통령 전두환이 1987년「4·13호헌조치」를 발표하자 대학생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다. 그 와중에 검거된 서울대생 박종철이 ‘책상을 턱 치니 억’하고 죽는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을 은폐하는 경찰에 맞서 전국 대학생들이 더욱 격하게 시위를 벌이다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죽는다. 이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 온 국민이 총궐기하여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6.29 항복선언을 받아내며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토대를 쌓는다.

영화 속에서 세상을 바꾼 ‘그들’은 대학생, 종교인, 교도관, 정치인, 기자, 검사이다. 즉 온 국민이다. 다만 당시 실제 상황 속에서 검사는 영화와는 반대로 경찰과 마찬가지로 진실규명을 가로막은 악의 집단이었다고 하니 장준환 감독의 의도 역시 진실규명을 가로막는 요소가 아닌가하여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혹 온 국민임을 강조하기 위해?

심정적으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대사는 연희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어?” 하지만 연희가 밉지 않다. 쫄보의 삶을 살아온 나는 연희에게 돌을 던질 수가 없다. 아니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연희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독재정권이 타도의 대상인 줄은 알지만 행동하는 실천적 투사의 삶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적 삶을 사는 우리 대부분의 입에서도 연희의 대사는 얼마든지 리메이크 됐으리라.

시골 부모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데모는 일절 말어라이. 빼빠지게 일해서 대학 보냈으믄 공부해서 취직이나 잘혀.” 나는 “알았어라우!”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희는 나와는 다른 입체적 인물이었다. 엔딩 무렵, 새가슴 연희는 연모했던 이한열의 숭고한 죽음 앞에 그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용기의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는 당당히 투쟁의 길로 나선다.

나는 이런 연희가 사랑스러웠다. 버스 위에 올라 이 민주주의를 가져다 준 수많은 연희들 곁에서 내가 해보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깃발을 함께 흔들어보고 싶었다. 아니 그냥 곁에 있어 주고 싶었다.

문득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얇지만 두꺼운 책이 떠올랐다. 한번 쯤 들와봤음직한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명언으로도 유명한 예링은 이 책에서 “법의 목적은 평화지만, 수단은 투쟁이다.”라고 했다.

김용국 정광고 교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간다운 권리와 자유는 모두 앞서 살아간 인류 투쟁의 산물이다. 선거권, 청원권, 노동3권, 거주ㆍ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등.

이런 연희들에게 빨갱이니 종북이니 하는 따위의 낙인을 찍어선 안 된다. 우리는 이들이 몸 던진 투쟁과 희생의 텃밭에서 자란 민주주의로 오늘의 풍요로운 자유와 평등의 식탁을 꾸리고 있으니까.

아마도 예링이 마지막 장면의 연희를 만난다면 그녀의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여 주지 않았을까. 너로 인해 대한민국이 보다 건강해졌고, 국민 삶의 질이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고.

“아빠, 1987 보러 가자. 내 친구가 봤는데 재미있대.”

어디서 입소문을 들었는지 아내와 딸내미가 ‘1987’을 보러 가잔다. 아마도 아들 녀석들까지 끌고 가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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