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준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여유

숙소에서 바라본 눈 오는 풍경. ⓒ차노휘


프라하 중앙역을 나왔을 때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빗줄기와 섞여서 내리더니 점점 눈송이만 굵어졌다. 잠시 역사에 머무르면 그칠 것 같아 구 역사 내부를 둘러보고 나왔지만 눈은 여전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방 속에 접이식 우산을 가지고 다녔다. 중요한 때에 뭔가를 놓고 오는 것. 여행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캐리어를 끌고 제 갈 길을 갔다. 나는 바쁠 것이 없었다. 다음날 체스키 크룸로프 행 기차표를 점검하기 위해서 왔고 이왕 나왔으니 카렐교나 구 도심지 또는 바츨라프 광장 등을 걷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들어가면 되었다. 여행지에서도 일요일이 필요했고 일요일에는 쉬고 싶었다.

실은 눈을 기다리긴 했다. 한국에서 눈다운 눈을 보지 못하고 떠나왔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내리다가 금방 녹아버리기 일쑤였다. 은근히 이곳에서 함박눈을 볼 거라고 기대했는데도 한쪽 구석이 편치 않았다. 현실적인 문제를 떠날 수는 없었다.

눈이 많이 내리면 금방 옷이 젖을 것이고 옷이 젖으면 추위가 몰려올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없기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시내를 돌아다니고 싶다면 숙소에 들러 우산을 들고 와도 늦지 않을 시간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모자를 쓰고 역사를 빠져나갔다.

내 방향지표는 구도심지 화약탑이다. 17세기 초 연금술사들의 연구실 겸 화약 창고로 사용되면서부터 화약탑이라고 불리게 됐다. 숙소에서 도심지로 향할 때나 돌아갈 때면 우뚝 솟은 화약탑을 보면서 거리를 가늠하고 방향을 세웠다.

카렐교 탑을 모델로 만들었지만 카렐교 탑 같은 조명시설이 없다. 밤길에도 시커멓게 서 있는 화약탑을 보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만큼 내게 듬직한 존재였다.

중앙역 공원을 조금 벗어나자 으레 화약탑이 보였다. 눈 줄기는 더 굵어졌지만 숙소로 이십분 동안 눈을 맞고 걷는 것도 운치 있겠다 싶었다. 화약탑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시야를 가릴 정도가 되었다. 숙소 방향이라고 눈짐작 되는 쪽으로 분주하게 발걸음을 놀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 즈음이면 고가 철도가 보여야 했다. 고개를 들었다. 엉뚱하게도 구도심지 광장에서 익숙하게 보던 건물 측면이 보였다. 앗! 숙소와 반대방향? 실수 아닌 실수를 했다. 재빨리 뒤돌아서서 걸었다.

눈은 모자 위에도 점퍼 위에도 내려앉았다. 털어도 다시 쌓였다. 눈사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눈을 맞으면서 장난치고 오는 연인을 지나쳐서 화약탑에 다다랐다.
 

트램이 있는 눈 오는 풍경. ⓒ차노휘


화약탑은 오거리 중심에 있다. 나는 다섯 갈래 중 한 길을 택하면 되었다. 구글 맵을 켜서 ‘길찾기’를 눌렀다. 지도는 이상하게 내가 왔던 길, 중앙역 쪽으로 다시 가라고 했다. 내가 며칠 동안 다녔던 길이 아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가르쳐 준 대로 갔다.

그러다가 아니다 싶어 다시 화약탑으로 와서 다섯 갈래 중 다른 갈래 길을 택해 걸었다. 눈은 마침내 시야를 가렸고 지도를 보기 위해서 밖으로 내놓은 액정은 눈이 녹아 물기가 번졌다. 터치를 해도 작동이 되지 않았다. 아, 구글 맵이 물을 먹어 오류가 생겼구나.

내가 걷는 길이 맞을 거라고 생각할수록 불안감도 짙어갔다. 사위는 빠른 속도로 어두워지고 상점 건물 특징도 구별할 수 없었다. 고작 2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그랬다. 내 불안과는 달리 정거장에서 트램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눈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나만 홀로, 뭔가에 홀린 듯했다.

눈을 피할 겸, 지붕이 있는 어느 숙박업소 처마로 들어갔다. 액정을 젖지 않은 옷자락에 문지르고는 구글 맵을 작동시켰다. 여전히 중앙역을 향하고 있었다. 구글 맵과 그야말로 폭설다운 폭설을 번갈아 봤다. 트램은 무덤덤하게 폭설을 헤치고 달렸고 좀 전까지 사진을 찍어댔던 공원 광장 동상은 무심하게 눈발을 받아내고 있었다.

나만 서두르고 있었다. 2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고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눈을 구경해도 될 시간이었다. 여차하면 택시를 타도 좋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혼란스러운 이 상황에서 마음의 여유를 되찾는 거였다.

여행지에서의 길 잃음은 단순한 해프닝이 될 수 있었다. 이곳은 체코 프라하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길 잃음은?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오래전에 읽었던 기사 한토막이 생각나더니 여권을 놓고 온 사람처럼 중앙역으로 뛰기 시작한 것이.
 

구도심지에 있는 화약탑. ⓒ차노휘


체코는 유럽에서 지형적으로 심장에 속하는 중부 유럽이다. 더군다나 강대국을 인접 국가로 두고 있어서 외세 침략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인접 국가를 시계방향으로 둘러본다면 폴란드(열두 시부터 세 시 방향), 예전에 체코와 한 나라였던 슬로바키아(세 시와 다섯 시 방향), 오스트리아(다섯 시부터 일곱 시 방향), 독일(일곱 시부터 열두 시 방향)이 경계를 나누고 있다.

가장 오랫동안 체코를 지배했던 나라는 오스트리아이다. 무려 360년 동안이다. 그래선지 지금도 같은 정책을 사용하는 것이 몇 있다. 대표적으로 교육(김나지움), 종교(로마 가톨릭), 건축(바로크 양식)이다.

르네상스 양식을 거의 발전시킬 수 없었는데 그것은 종교전쟁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30년 종교 전쟁은 체코에서 비롯되었다(‘舊왕궁’ 때 다룰 예정이다).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도 있다. 현재까지도 그 나라 말까지 싫어할 정도로 앙숙진 나라는 러시아이다. ‘프라하의 봄’으로 일컬어졌던 실패한 혁명. 그 당시 백만 명이었던 프라하 인구의 오분의 일에 해당되는 이십만 명의 무장한 군인들이 무참하게 민간인을 학살했다.

일종의 형제 국가라고 자청했던 나라에 대한 배신감이랄까. 근대, 민족국가를 표방한 체코를 같은 슬라브 민족끼리 잘 살아보자며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공산국가로 유인해, 이권을 챙겼던 소련이었다.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탱크와 총, 바츨라프 광장에 나뒹구는 시체들이었다.

소련보다 강도는 덜 하지만 독일과도 사이가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 학살에 있다. 유대인 학살하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유대인을 처음 학살했던 곳은 폴란드가 아니라 체코였다.

프라하에서 베를린 방향으로 60km 지점에 있는 테레진(Terezin) 수용소(1780년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Joseph II)가 프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세운 요새)에서 유대인 분리 작업을 했다. 예를 들면, 나치 입장에서 ‘악질’로 분류되면 북쪽 폴란드(아우슈비츠)로, 이용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남쪽 헝가리로 보냈다. 남쪽으로 가면 그나마 살 희망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테레진은 중부유럽 각지에서 끌려 온 유대인들을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기 전 단계, 캠프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 자신의 나라에서 죄 없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는 것 자체가 체코인에게 치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프라하에도 유대인 지구(Josefov)가 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관광지로 변했지만 아직까지 스산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낮은 상점 불빛을 등지고 맞은편 공동묘지를 올려다 볼 때의 감회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묻힐 곳마저 부족해 여덟 구 이상의 사체를 포개고 포개 묻어야 했던 구 유대인 묘지. 가지런하지 못한 비석 위로 낡은 어둠이 말뚝처럼 꽂혀 있었다.
 

눈 오는 풍경. ⓒ차노휘


중앙역으로 뛰어가는 동안 사선으로 눕던 눈발이 폭탄처럼 떨어져 내렸다. 점퍼는 눈으로 덮였다. 그 짧은 시간에도 체온에 반쯤 녹아내린 것이 옷섶에 들러붙었다. 역사에 도착해서 손으로 털어내도 잘 떨어지지 않아 아예 옷을 벗고 털어내야 했다.

내 발길이 향한 곳은 구 역사 옆 플랫폼이다. 구 역사에서 서성거릴 때 나는 한쪽 구석에 세워진 동상을 봤다. 이곳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역사였다. 유태인을 테레진으로 실어 날랐던 기차가 운행되었던 곳이다. 플랫폼 한 쪽에는 누구보다 이곳에서 가슴 아파했을 니콜라스 윈턴의 동상이 있었다.

‘영국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니콜라스 윈턴 경(Sir Nicholas Winton,1909.5.19 ~ 2015.7.1)은 1909년 5월 19일에 독일계 유대인 금융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어려움 없이 자라난 니콜라스 윈턴은 성장한 후, 증권거래소에서 주식 중개인으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의 인생을 바꾼 1938년, 크리스마스 휴가로 스위스에 스키를 타러 갈 계획을 세웠다. 마침, 체코슬로바키아 동부 유대인 수용소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친구에게 ‘휴가를 취소하고 날 좀 도와 달라’라는 전화를 받았다.

니콜라스 윈턴은 친구가 근무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유대인 수용소로 갔다. 난민캠프 현실을 본 그는 경악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다. 탄압받던 유대인들은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러한 참상을 본 니콜라스 윈턴은 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전쟁이 코앞에 닥친 것을 직감했고, 수용소의 어린 아이들을 가장 걱정하였다.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입양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유대인 아이들을 나치로부터 구하기 위해 해외입양을 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그러한 방법들이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니콜라스 윈턴은 체코슬로바키아 수용소에서 탄압받던 아이들을 영국으로 입양시키기 위해서 영국 기관을 찾아가 수없이 설득하고, 사비를 털어 절차에 필요한 비용을 댔다. 광고를 내며 아이들이 영국에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후원가정을 찾는데 몰두하였다.

마침내 비밀리에 준비한 열차에 아이들을 태울 방법을 찾았다. 체코에서 아이들을 도울 때, 수없이 나치의 위협을 받았다. 하지만 나치 장교들에게 사비로 뇌물을 주면서 위험한 상황을 넘겼다. 마침내 그는 아이들을 태워 보낼 열차를 마련했다. 여덟 번의 열차로 영국에 무사히 입양된 아이들의 수는 총 669명이었다.

아홉 번째 열차에 250명의 아이들을 태워 보냈을 때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열었다. 국경이 봉쇄되어 열차에 있던 250명의 아이들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수용소로 보내져 모두 사망했다고 추정할 뿐이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니콜라스 부인은 우연히 다락방에서 낡은 서류가방을 발견한다. 가방 안에는 그 당시 그가 입양 보냈던 아이들의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와 아이들이 보낸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내는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니콜라스 윈턴은 BBC 방송프로그램에 초대받는다. 노신사는 자신이 왜 초대되었는지 모른 듯 아주 부끄러워했다. 아나운서가 다락방에서 찾아낸 자료를 보여주어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이었던 아홉 번째 기차를 탄, 250여 명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이었다.

방송 출연을 불편해 하는 니콜라스 윈턴을 보던 아나운서가 말했다. “혹시 방청객 중에서 여기 있는 니콜라스 윈턴 씨가 생명을 구해주신 분이 있다면 일어나 주세요.” 그러자 윈턴 씨 주변에 앉아있던 모두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 당시 아이들이, 윈턴 씨를 위해 그 자리에 모였던 것이다.

윈턴 씨가 구한 669명의 아이들은 현재 자녀와 손자들까지 두어 6,000명의 가족이 되었다. 그들을 ‘니키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프라하 중앙역 플랫폼에 있는 니콜라스 윈턴 경(卿)과 유태인 아이들 동상. ⓒ차노휘


나는 기차가 떠나고 오는, 그 광경을 볼 수 있는 플랫폼 한 쪽에 서 있는 니콜라스 윈턴과 아이들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지금 이 동상은 그때를 기억할까. 아니 이 동상을 보면서 현 시대의 우리는 그 당시를 잊지 않을 수 있을까.

공간을 따라 흐르는 시간. 시간 따라 변하는 공간. 공간 안의 시간 속의 사람들. 그리고 갈등. 이 세 가지가 또 한데 뭉쳐 과거와 오늘의 역사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역사를 쓰는 그 기준점은 무엇일까. 갈등이 생겼을 때 그 해결책의 판단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정하는 걸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 내 가슴에서 튀어나왔다.

유대인을 학살한 그들. 그들 또한 절대적인 믿음의 기준점이 있었기에 학살을 자행했을 것이고 윈턴 또한 자신의 기준점으로 아이들을 구했을 것이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점은 극과 극을 달릴 수 있다는 비극. 나는 간혹 그 비극을 접한다. 내 기준점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강도 약한 약진처럼, 어떨 때는 감당 못할 1000m 높이 쓰나미처럼 덮쳐온다.
 

숙소 가는 길 풍경. ⓒ차노휘


나를 움직이게 하는 기준점이 내 경험과 사색의 결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이데올로기, 관습, 인습, 교육의 총 결산일 수도 있다. 내가 주도한 듯 하지만 나는 이미 판단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그것을 내 정체성으로 받아들여버렸는지도 모른다.

내 피와 살과 정신으로 녹아 있는 그것. 그것이 흔들릴 때마다 내가 ‘나’라고 규정하는 것이 증발해버릴 것 같아 애써 모른 척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도 나를 흔든다.

플랫폼에서 바라본 풍경 위로 점차 눈이 잦아든다. 눈이 이울어가지만 사위는 어둠의 마티에르를 덧칠한다. 나는 밋밋한 액정 화면 너머 지도를 본다. 숙소와 화약탑, 중앙역 거리와 방향을 가늠한다. 프라하에서의 내 기준점은 화약탑이었다.

기준점을 다시 점검한다. 기준점이 잘못될 수도, 대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각도를 달리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흔들리는 것도, 그럴 때마다 호흡을 고르며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도, 내 정체성의 일부라면, 그것 자체가 움직이는 내 기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역사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눈 덮인 체스키 크룸로프.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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