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始原)의 몸짓과 같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성 페트로와 성 파블 성당'과 공동묘지. ⓒ차노휘


호스텔 공용 휴게실 대부분은 주방과 연결되어 있다. 요리를 하면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스페인 세비아(Sevilla)에서 세 시간 동안 요리를 하면서 깔깔거리는 이탈리안 아가씨들을 봤다.

한쪽에서는 아무리 떠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노트북을 펼쳐놓고 다음 일정을 짠다. Bar가 있는 휴게실에서는 생맥주나 커피를 시켜서 마시기도 하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이들도 있다. 흡연실이 따로 있어서 여자나 남자나 흡연을 즐기면서 아예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내가 가장 평화롭게 본 것은 물 쿠션에 누운 잘 생긴 프랑스 청년이었다. 펼친 책으로 얼굴을 덮고 코까지 골면서 낮잠을 즐기는 모습이 행복한 ‘살찐 돼지’처럼 보였다. 일정이 빠듯하고 여유로움이 없으면 결코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느림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또한 대부분 리셉션이 휴게실 안에 있다. 그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꼭 통과해야 하는 곳이자 기존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숙박객 얼굴을 공개(?)하는 곳이 된다. 한마디로 많은 사람이 오갈 수 있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쉼터이다.

서양인들 특유의 유쾌함을 가장하며 처음 본 사람에게 인사를 나누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그곳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상관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데에 있다. 철저히 상대방의 자유를 보장해주면서 자신의 자유 또한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이 좋다. 여럿이 있으면 활동성이 느껴져서 좋고 혼자일 때는 깊은 사색에서 나를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여럿이어도 혼자이고 혼자여도 여럿이지만 결국은 혼자를 원한다. 내 세계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 매력적인 일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관찰할 기회를 놓치지는 않는다.
 

비셰흐라드 가는 길에 마주친 풍경. ⓒ차노휘
비셰흐라드 가는 길에 마주친 풍경. ⓒ차노휘


이틀 전인가, 한 남자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알고 있는 사람과 닮아서 깜짝 놀랐다. 172cm 정도의 키에 다부진 체격, 까무잡잡한 피부, 턱 아래 1cm쯤 자란 수염. 한국에서 체코계 미국인 선생에게 영어를 배운 적이 있는데 그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열두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 도심지를 벗어난 곳에서 ‘우연히’ 만난다는 것은 ‘필연적인 우연’을 가장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와 인사를 했지만 누구와 닮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동양 여자들도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깐.

나는 휴게실에서 작업을 할 때면 이어폰을 자주 끼는 편이다. 그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는 모니터로 눈을 떨구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누군가와 얽히지 않기로 했다.

하루 이틀 정도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친밀감을 표현하면 또 다시 헤어지는 것이 여행지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이다. 이것이 일상이 된다. 일상은 일상으로 받아들여야지 모든 사람에게 호인으로 보이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 낭비는,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사람이 동행자가 되는 여행이 아닌, 설렁 고독이 내게 먼저 다가와 손을 잡더라도 내가 ‘나’와 함께 하는 여행 그리고 낯설게 다가오는 자연(환경)에 집중하고 싶었다. 결국은 자연(환경) 속에 사람이 없을 수는 없지만 ‘나’보다 더 친밀한 사람은 곧 ‘나’겠지 싶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를 따라온 여인은 작은 키에 엉덩이와 허리가 넉넉한, 여느 중년 여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눈이 퀭하게 들어갔고 짧은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볼 때마다 뒤통수 머리카락이 보기 싫게 눌러있거나 몇 가닥 서 있었다. 일반적으로 호스텔을 이용하는 여행객은 젊거나(그래서 돈이 넉넉하지 않거나) 혼자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이 많은 여행객도 간혹 있지만 그들에게는 젊은이 못지않은 힘이 느껴진다. 그만큼 홀로 여행을 많이 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내 선입견과 달리 남자의 어머니는 아주 평범했다. 이 평범함은 또한 규칙적인 생활에서도 눈에 띄었다. 아침 여섯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식사를 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가정식백반이다. 식기는 손수 준비해온 것인 듯, 플라스틱 그릇이다.

주방에 많은 식기 도구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 식사할 때의 남자 옷차림은 가관이었다. 배낭 여행자에게서 결코 볼 수 없는, 겨울 보온성이 뛰어난 두꺼운 나이트가운이었다. 잿빛 나이트가운을 카키색 면 티 위로 걸치고는 허리띠를 묶었다.

어제도 나이트가운을 걸친 아들과 뒤통수 머리카락이 정돈되지 않은 엄마가 아이들 소꿉놀이할 때나 보던 빨간색 그릇에 음식을 담아 식사를 했다. 나는 그들에게 간단한 안부를 묻고 벽 쪽에 붙어 있는 소파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을 낀 상태였다.

무심하게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플라스틱 그릇이 딸그락 거렸고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숨죽인 울먹임을 들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살짝 이어폰 한쪽을 뺐다. 재즈 선율과 섞인 울먹임.

관성적으로 손가락은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표 나지 않게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어머니는 나를 등지고 앉았고 아들은 그녀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아들이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면서 훌쩍이고 있었다.

부재한 사람을 위한 여행. 그들의 여행 목적이었다. 정확히 남자의 아버지이자 여자의 남편인 고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다. 며칠 전에 장례를 치렀고 그를 애도하기 위해 한때 함께 여행했던 이곳을 다시 찾았다는 것을 조각난 말 속에서 꿰어 맞췄을 뿐이다.

나는 이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나를 개의치 않고 그들은 울 수도 위로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자에서 일어났을 때 내일은 나이트가운과 플라스틱 식기를 볼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비셰흐라드 성벽에서내려다본 풍경. ⓒ차노휘
비셰흐라드 성벽에서 내려다본 블타바 강. ⓒ차노휘


내가 글을 마무리하고 늦은 아침을 먹고 간 곳은 비셰흐라드(Vysehrad)다. 비셰흐라드는 ‘고지대의 성’이라는 뜻이다. 1140년까지 왕궁과 요새로 쓰였지만 흐라드 차니 언덕에 있는 프라하 성으로 왕이 거처를 옮긴 뒤로 폐허가 되었다.

지금은 언덕 위에 벽돌을 쌓은 성벽이 남아 있다. 그곳을 빙 둘러서 걸으면 블타바 강과 성벽 아래 마을과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프라하성을 볼 수 있다. 외곽에 위치한 잊혀진 왕궁. 그래선지 카렐교나 프라하 성 만큼은 관광객이 많지 않다. 대신 현지인들의 산책 겸 운동 코스로 주로 이용된다.

나는 그곳에 있는 ‘성 페트로와 파블 성당(Church of St. Peter and Paul)’에 딸린 작은 공동묘지를 떠올렸다. 공동묘지를 떠올린 것은 아침에 들은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해왔다. 관념적인 죽음에 더 가깝지만 죽음이란, 먼 것 같지만 정말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공원 안 공동묘지가 아닐까 싶었다.

구글 맵을 작동시켰더니 걸어서 50분이 걸린다고 한다. 대충 눈짐작으로 훑고는 블타바 강변을 따라가지 않고 2차선 도로를 끼고 있는 마을 안쪽으로 걷기로 했다. 우리나라처럼 고층 아파트가 없다.

5,6층 높이로 바로크 양식 요소를 곁들인 고건물 모양을 콘크리트로 흉내 내서 밝은 색 페인트로 칠한 맨션 정도의 건물이라고 할까. 한국의 성냥갑 같은 일률적인 아파트 건물과 달리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 그런지 성당 앞에 고만고만한 상점들을 열어 여러 가지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꼬치 하나 사들고 구경을 했다.

죽음을 왜 그렇게 친숙하게 여기는지 모르겠다. 이미 써놓은 소설에서도, 집 근처 산책길 묘지의 고요함을 사랑하는 것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덤이라는 것은 생과 사라는 돌직구를 던져, 생의 무상함을 노골적으로 각인시킴에도 불구하고 겸허함을 아우라처럼 펼쳐놓기 때문이 아닐까.

설마 이곳이 공원일까 싶은 입구를 통과해서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 오르막으로 향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정교하게 쌓은 벽돌 성벽이 보였다. 그때서야 내가 맞게 찾아왔구나, 라고 확신했다. 성벽을 따라 올라가자 성당 첨탑이 보였다. 철 성분이 포함된 사암으로 지어진 성당은 세월 탓인지 검게 변해 있었다. 무덤과 어울리는 고딕 양식이었다. 무덤은 성당 뜰에 있었다.

이 묘지는 1848년 체코에서 민족부흥 운동이 일어난 때와 관련이 있다. 주변 국가에는 나라에 기여한 사람들만 묻힐 수 있는 묘지가 있었지만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그 당시의 체코 이름)에는 없었다.

한 역사학자가 체코의 건국 신화가 시작되는 비셰흐라드에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체코 건국의 시작이면서 민족부흥을 상징하는 곳에 묘지가 들어섰다. 묘지 대부분은 예술가들이다.

그러니까 비셰흐라드 공동묘지는 체코 문화발전에 기여한 인사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국립묘지이다. 물론 문화인뿐 아니라 성직자, 기술자, 정치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묻혀 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면 누구든 이곳에 묻힐 자격이 있다.

벽을 따라 올라가 성당 뒤뜰로 들어섰다. 묘비석과 꽃 그리고 글귀가 적힌 무덤이 즐비했다.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다. 그저 평범한 공동묘지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정성들인 묘비석과 성상이 군데군데 있어 묘지를 가장한 전시장에 들어선 것 같았다.
 

시계탑이 있는 정거장. ⓒ차노휘

나는 인생을 길에 비유하고는 한다. 길이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인생 또한 탄생과 죽음이 한 선으로 이어져 있다. 하지만 단선이 아니다. 선과 선이 무수히 이어져 그 끝과 시작을 실은 알 수가 없다. 무한 반복되는 원이다. 무한 반복되니 시작은 끝이고 끝이 시작이라고 해도 좋겠다.

무수히 많은 죽음은 곧 무수히 많은 탄생을 전제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죽음과 탄생이 한 몸이 된다.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는 움직이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에는 이미 죽음과 탄생을 함께 안고 있다.

그 둘을 안고 있는 내가 지금, 비셰흐라드 공동묘지를 걷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가까우면서도 먼, 멀면서도 가까운 아주 친숙한 존재로 여긴다. 지금 내가 뱉고 있는 호흡 속에서도, 뛰는 심장에서도 죽음이 녹아 있다. 나는 그 죽음을 사랑한다. 생의 역동성은 죽음이 있기에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생생한 음성으로 성벽에서 환호성을 터트린다. 프라하 성에서 바라볼 때와 달리 블타바 강은 더 역동적이게 움직인다. 유난히 낮게 내려앉은 하늘이 온통 구름에 뒤덮여 블타바 강을 거울삼아 내려다보고 있다. 저 먼 시원(始原)에서 시작한 이들의 몸짓은 끝나지 않은 수다를 동반한다. 나는 그 수다에 귀를 기울인다.

이제야 나는, 이곳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의 빗장을 연다. 이방인이 아닌, 이곳에서 오랫동안 뼈를 묻은 조상을 둔 사람처럼. 프라하에 온지 나흘째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구도심지 모래예술가와 작품.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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