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눈을 뜬다. 눈을 뜰 때면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닌가, 매번 나는 내 일상 공간을 점검한다. 천장에 달린 십자모양 LED 등, 책장, 코고는 강아지 그리고 녀석들의 부드러운 털이 손아귀에 가득 찼을 때에야 한숨을 내쉰다. 안도의 한숨인지, 아님 다른 세상이 아니어서 뱉어내는 아쉬움인지 모를 한숨을.
나는 다시 어둠에 갇힌다. 배식이 끝난 뒤 모든 창이 내려진 기내다. 좁은 일반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승객들. 열두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이들과 숨을 쉬어야 한다. 이들 중 목적지인 프라하가 일상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낯선 공간을 찾아 떠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텁텁한 공기 속에 욕망이 꿈틀댄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뛴다. 나는 어디로 가볼 수 없는 답답한 기내에서 내리며 내 두려움과 설렘을 벗어버린다.
지극히 담담한 마음으로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으로 들어선다. 입국수속을 밟고 캐리어를 찾았을 때는 5시 20분. 벌써 어둠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낯선 곳에서 금세 익숙해지는 게 내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그 만큼 낯선 곳에 대한 설렘의 유효기간이 짧으니 아쉬움도 있다.
공항에서 바라본 야경은 황금빛이었다. 황금빛 개미가 시나브로 자신들만의 궁전과 거리, 건물을 닦듯 공중에서 바라본 프라하는 손바닥 하나로 가려졌다. 택시 안에서 바라본 불빛은 공중에서와 달리 직접적인 유혹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숙소에 도착해서는 일상처럼 근처 슈퍼를 확인하고 간단하게 요리할 재료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구글 맵에서 숙소와 가까운 명소를 찾아 도보 거리를 확인했다. 무리하지 않고 가까운 곳부터 서서히 스며들 예정이다.
프라하는 걸어서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도시다. 그래서 잠시 머물 장소로 이곳을 택하기도 했지만 K의 말도 한몫했다. 차 선생은 파리보다는 프라하가 어울려요, 화려한 듯 하지만 아픔이 있는 듯한 모습이. 내 얼굴 한쪽에서 어떤 그늘을 발견했는지 모를 K. 하지만 그의 말을 나는 무의식 속에 깊이 간직해두었던 모양이다.
어떤 사람이든 장소든 시간의 궤적이 있고 그 궤적은 다양한 이야기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아픔보다는 즐거운 추억이 많아야하지만 대부분 아픈 기억을 오래 품는다.
강한 사람(국가) 사이에 끼었을 때는 더욱 더. 예민하면 그보다 더욱. 나는 아픈 궤적을 예민하게 프라하에서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어김없이 다섯 시에 일어났지만 아침 운동 대신 커피를 마시면서 휴게실에서 노트북을 켰다. 왼쪽 11시 방향 긴 창문 너머에서 새벽 공기가 아른거렸다. 다른 때 같으면 푸른 여명 속에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며 동네에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9시가 지나서야 프라하를 대표하는 광장 중 하나인 바츨라프 광장(Vaclav Namest)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걸어서 40분이면 도착할 거리이다. 숙소는 공원(Vitkov) 아래에 있다. 한적한 공원 산책로를 걸어서 구시가지로 갈 수 있다. 산책로를 십분 걸으면 번잡한 고가 철도와 그 아래 8차선 도로가 나온다.
8차선 도로변 낙서 벽화를 따라 걷다보면 건널목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번잡한 구도심지이다. 도심지라 해도 번잡하다고 할 수도 없다. 잘 관리된 오래된 건물과 도로. 도로는 자동차와 버스, 트램이 함께 달린다. 경적도 고함도 없다. 비수기여선지 관광객도 그리 많지 않다.
도시의 첫인상은 소박하면서도 정갈하다. 오래된 건물이라 화려하지 않지만 은은함이 배어있다. 보도는 바둑판처럼(로마 보도도 그랬다) 자잘한 돌로 아귀를 잘 맞춰놓았다. 낡은 옷을 잘 수선해놓은 것처럼 말이다. 이백 미터 걸을 때마다 쓰레기 수거함과 청소하는 아저씨와 마주쳤다.
오래된 건물과 회색빛 도로. 그 도로 너머에서 햇살이 비출 때면 먼 과거의 시간들이 햇살과 함께 몰려오는 듯했다. 햇살 속에서 수많은 고함과 울부짖음 그리고 환호성을 들었다. 내 작은 가슴이 숨 가쁘게 떨려왔다.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
1968년 체코인들은 그들의 자유, 인권과 민주를 위해 울부짖었다. 민주를 향한 외침인 ‘프라하의 봄’이 바츨라프 광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치 지난해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타올랐던 ‘촛불 시위’처럼.
그러나 민주화 물결이 동유럽 전체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소련군 탱크를 앞세운 20만 명의 바르샤바 조약군대에 무참히 짓밟혀 봄은 더 극심한 겨울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대단했다(어디, 이들뿐이겠는가).
강한 열망을 바탕으로 1989년 11월 극작가이자 인권 운동가였던 하벨(Václav Havel)은 반체제 연합인 ‘시민 포럼’을 조직해서 공산 독재 체제를 무너뜨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체코의 민주화 시민 혁명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시민 혁명이 성공한 뒤, 체코 대통령이 된 하벨은 한 연설에서 “우리는 평화적으로 혁명을 이루어냈다. 이는 벨벳 혁명이다.”라고 외쳤다.
아픈 상흔이 있는 광장은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다. 현재 바츨라프 광장과 무즈텍 광장을 잇는 거리는 화려한 번화가로 자리 잡았다.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 쇼핑센터들이 들어서 있다. 대부분 20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그곳은 여전히 민주화 성지다. 그곳에서 피 흘러 목숨 바친 사람들의 혼이 깃든 곳이다.


바츨라프 광장이 시작되는 국립 박물관 앞에는 체코인들이 수호성인으로 여기는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있다. 바츨라프 광장 이름도 기마상 이름에서 유래했다.
기마상 앞쪽에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좌절되자 1969년 프라하대학의 학생이던 얀 팔라크가 소련군의 무력 침공과 압제에 항거하며 분신하고 쓰러진 장소를 기리는 십자가 조형물이 광장 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세월이 지나도 상업적으로 물들어 가도 체코인들에겐 역사의 중요한 기억이 서려있는 장소이다.


나는 바츨라프 광장에서부터 구글맵을 보지 않았다. 그저 산책하듯 발 닿든 대로 걷기로 했다.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거리와 광장을 지나고 거리를 걷는 사람, 잠시 멈춰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보았다. 유난히 사진을 많이 찍는 곳에 왔을 때는 카렐교(Charles Bridge)를 전망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프라하가 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 알 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다리 너머 프라하성을 배경으로 이어지는 중세풍의 건물, 맑은 블타바 강과 그 위를 나는 갈매기들, 열여섯 개의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중세풍 다리 카렐교. 다리의 시작과 끝 부분에 있는 탑.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300년에 걸쳐 제작된 서른 개의 성인상.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보행자 전용도로였다.
나는 카렐교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이곳을 알아가는 것이.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음미하고 싶었다.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으로는《기차가 달린다》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