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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국의 교육칼럼]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다부화한 병아리 대부분 죽어… 잘 키울 자신 없어 입양 포기
  • 김용국 정광고 교사
  • 승인 2017.12.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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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유정란 열두 개와 부화기를 구해 온 건 달포 전이었다. 좋아서 손뼉 친 건 중1, 초4 쌍둥이들이었다. 아이들이 디지털 게임에 중독될까 염려한 아내가 마련한 아날로그적 비책이었다.

아내는 거실 한 편에 부화기를 설치하고 달걀들을 그 안에 넣었다. 그리고 기다림이 있었다.

“와! 애들아, 병아리가 부화했다.”

스물 두 밤이 지난 새벽 다섯 시, 거실에서 아내의 호들갑스런 탄성이 들려왔다. 내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거실에 나갔을 땐 이미 아이들이 부화기 앞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괴테는 말했다.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다.”라고. 우리의 시조시인 이호우도 「개화」란 시에서 꽃잎이 피어나는 순간을 한 하늘이 열리고 있다며 생명 탄생에 우주도 감화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생활의달인> 블로그 갈무리(http://blog.naver.com/yybiggest)

도시 안에 갇혀 산 우리 아이들 눈앞에서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 이뤄지고 있고, 병아리의 한 하늘이 열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이 생명 탄생의 순간을 목도하기는 이번이 처음인지라 아이들에게 병아리의 부화는 경이로움 자체였으리라.

나도 다가가 보았다. 한 녀석이 물기 젖은 몸으로 껍데기에서 몸을 빼내려 용을 쓰고 있었다.

“아빠, 옆 달걀도 갈라지고 있어.”

“그 옆에도….”

중1 아들도 한 마디 했다.

“엄마가 쪼아주면 쉽게 나올 텐데….”

이때 그만 나는 분위기 없이 뭔가를 가르치려는 교사란 직업의식을 발동시키고 말았다. 생명 탄생의 그 신비롭고 경이로운 순간에 말이다.

“병아리는 껍데기를 안에서 쪼고, 어미 닭은 밖에서 쪼아주는 걸 한자성어로 뭐라는 줄 알어?”

아이들은 내 질문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부화기 문을 열고 병아리를 만질까 말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덧붙였다.

“힌트를 줄게. 병아리가 안에서 쪼는 걸 ‘줄’, 어미 닭이 밖에서 쪼는 걸 ‘탁’이라고 하는데, 이걸 동시에 하는 거야. 뭐지?”

그래도 중1 아들 녀석이 눈치는 있었는지 얼른 대답했다.

“동시줄탁!”

“거꾸로 해봐.”

“탁…줄…시동!”

“….”

쌍둥이 녀석들은 대답도 없이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화기 유리창에 갖다 대고 있었다.

나는 괜한 짓을 했나싶어 무안하였다. 얼른 침대로 돌아와 버렸다.

모두 아홉 마리가 부화했다. 녀석들은 뽀송뽀송한 솜털 날갯죽지를 팔랑거리며 거실을 쏘다녔다. 노랗고 동그란 솜뭉치가 굴러다니는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제자 녀석들이 귀엽다고 했지만 한 친구는 병아리가 닭이 될 수밖에 없음을 슬퍼하는 댓글을 남겼다. 친구의 말 속엔 병아리가 크면 잡아먹힐 거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찜찜했지만 아이들과 우리 부부는 그 댓글을 보며 절대 잡아먹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하지만 굳은 맹세는 물 만난 화장지처럼 맥없이 풀려버렸다. 부화한 지 십여 일이 지난 지금 생존자는 단 세 마리에 불과하니까.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요절해버린 병아리들. 내 책임이 컸다. 목이 마를 것 같아 준 물에 세 마리가 빠져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이후 다른 병아리들의 상태도 안 좋아졌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아이들은 병아리를 잘 키워 시골로 보내 장닭이 되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겠다고 다짐했건만 눈앞에서 맞이한 죽음 앞에 아이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아이들은 시무룩해졌다. 그러다가도 생존한 병아리들을 보면 어느 새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지는 했으나 활짝 터뜨리진 못했다.

“다음엔 우리 동물들은 키우지 말자. 우리에겐 잘 키우는 재주가 없으니까.”

아이들은 내 주장에 반박을 하진 않았다. 눈앞에서 생명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아이들도 아는 듯했다.

“남은 세 마리라도 정성껏 키우자.”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신감은 없어 보였다.

ⓒ<생활의달인> 블로그 갈무리(http://blog.naver.com/yybiggest)

나는 불교도다. 불살생. 이 단어 하나에 매료되어 불교도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목숨을 끊지 않는 종교니 얼마나 평화와 자비가 넘치는 종교인가. 인연이 닿아 지금은 불교종립학교에 몸담고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큰 복인가.

불교도로서 학생들에게 생명은 절대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다. 애완용으로 기르겠다면 자기 몸처럼 아끼라고 말해 왔지만 나의 부주의로 죽은 병아리들 앞에선 쉬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우리 가족은 동물은 잘 키우지 못한다. 하여 앞으로 동물 입양은 자제해야겠다. 그것이 우리 가족이 동물들에게 죄를 덜 짓는 길이다.

오늘 수업에 들어갔던 한 반 녀석들이 물었다.

“샘, 또 병아리들 부화시킬 거예요?”

조용한 물음이었지만 천근 바윗덩어리의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나는 맥없이 고개를 저으며 교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걸으며 괴로운 마음에 나는 괴테의 그 다음 말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기교이다.”란 이 말을.

김용국 정광고 교사  yonggu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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