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산 진성영의 섬이야기
"막두야! 내 막두야!! 내가 죽으면 어떡할래"
2016년 당시에는 서울에서 직장생활과 작가 일을 병행하고 있었을 때라.. 그리운 어머니를 전화로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아버님이 작고하신 지 어언 13주기가 지난 시점부터 어머니께 매일 밤 8시~9시 사이에 안부전화를 드렸던 것 같다. 언젠가는 새섬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봉양하겠다는 생각은 늘 마음속에만 있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려는 생각은 다들 하고 있지만 직장생활이나 환경에 지배적인 영향 때문에 여의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본다.
매일 약속된 시간에 맞춰 전화를 드리기 때문에 늘 어머니는 그 시간에 전화기 앞에서 내 전화 오기만을 기다리셨다. 안부전화를 통해 어머니의 하루 일과를 속속 알 수가 있었고. 목소리 톤에서 어머니의 컨디션이나 상태를 짐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어머니는 늘 밭일을 하셨다. 물론 대부분 나와 통화할 때면 밝은 톤의 목소리를 접할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힘들어도 자식들에게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2016년 4월 6일 저녁 8시 20분경에도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술을 한 잔 드셨는지 노래를 부르셨다. 평소 일을 많이 하는 날에는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동충하초 약술을 한 잔씩 드신다. 어머니께서는 막내인 나를 늘 걱정하셨다. 혼자 사는 막내아들의 측은함이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 “막두야! 내 막두야!! 나 죽으면 어떡할래”..., 갑자기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어머니는 1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정리하려는 행동이나 말들을 가끔 해 온 걸로 기억이 된다. 동네에서 어머니보다 고령인 사람이 없고, 모두들 이 세상을 등지고 있는 데 “오래도 살았다 “라는 말도 가끔 해서 인지... 난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앞으로 10년 정도 더 사셔야 한다고 “ 말하면 ”그러면 내 나이 100살이다. 징그럽다! “ 하시며 너스레를 떠셨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섬은 나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것 같다.
어머니의 추억을 안고 살아가기에는 고향 새섬은 나에게 혹독함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막두야, 내 막두야! 밭에 가자!!” 하며 손짓할 것 같은 어머니는 지금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누워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