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에는 시를 쓰는 S형, 국선도 수련을 평생 해온 A형과 함께 광주 5‧18국립묘지를 찾았다. 

S형이 미리 섭외를 해놓은 터라 국립묘지 측은 민주의문부터 5‧18민중항쟁기념탑 앞에 다다를 때까지 5분여 간 우리 셋을 배려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틀어주었다. 가을,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인적이 거의 없는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우리의 가슴은 뜨겁게 요동쳤다.

내친김에 우리는 옛 망월동 묘역에도 들러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디딤돌이 되어주신 선배 열사들에게도 인사드렸다. 김남주 시인, 이한열 열사, 이철규 열사, 표정두 열사, 백남기 열사 들이 가을비를 오롯이 맞으며 거기에 누워계셨다. 
 

광주 북구 운정동 제3묘역 옛 5.18묘역(민족민주열사묘역). ⓒ광주인

한 분 한 분의 얼굴과 이력을 보자 하니, 갓 대학을 들어간 87년부터 함께 했던 그 거리의 거친 파도 같은 함성이 또다시 들려왔고, 나의 양손은 가두의 깨진 보도블록과 화염병을 잡은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이번 광주 답사는 구례에 사는 우리 셋이 전적으로 의기투합해 이뤄진 것이었다. 탁주 한잔 기울이면서 섬진강변 문진정(文津亭)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다 내가 말했다. “광주를 가보고 싶어요. 가서 그날의 광주를 다시 보고 싶어요.”

두 형들은 군말 없이 “가자”고 했다. 전남대 80학번으로 ‘그날의 광주’를 온몸으로 겪었던 S형이 ‘1980년 5월’을 앞서서 보여주겠노라 했고, 보성 웅치 출신의 동갑내기 A형도 기꺼이 함께하겠노라 다짐했다. 긴 배 멀미 끝에 뭍에 당도한 사람처럼 나는 이내 격정의 한숨을 소리 죽여 쉬었던가. 

하여 광주를 찾아 참배 드렸던 그날 밤, 일단의 광주 선배들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우리는 북받치는 분루를 일거에 터뜨리고 말았던 거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서러워서, 분노 때문에, 가엽고 슬퍼서, 한밤 내내 울었다.

구례로 귀촌한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더 이상 서울에서 고단해하며 살지 않겠다고 했을 때 아내의 반응은 의외로 담백했다. 당신이 살고 싶은 방향대로 살라는 것. 그건 아마도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모태의 개울로 돌아오는 연어의 회귀본능 같은 것임을 아내가 먼저 알아차렸던 까닭이었을 거다.

그렇게 구례로 내려와 다섯의 가족과 텃밭 가꾸며 오순도순 옹기종기 도란도란 살겠다던 내게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한 것은 어느 날 우연한 자리에서 듣게 된 책 한 권 때문이었다. 

<큰산 아래 사람들>(향지사). 권경안 선생이 구례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 쓴 이 책의 ‘4장. 큰 산 밑에 산 죄밖에 없어요’를 읽다가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는 그동안 내가 놀고 즐겼던 구례 산하의 곳곳이 여순사건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거였다. 

아니 어쩌면 잊어버리려 애썼던 거였는지도 모른다. 허나 아직도 구례의 이곳저곳에서 봉분 없이 가을비를 맞고 누워 있을 그 때의 그 분들을 나는 광주 망월동에서 또한 똑똑히 보았다. 어디 구례뿐이겠는가. 산청, 함양, 곡성, 순천 아니, 이 땅 어디에서나 억울하게 죽어간 민중들은 수 없을 터였다.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야심차게 출발했으나 수구정권의 정밀한 훼방으로 끝내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그 뒤 7년을 숨죽여 기다린 지금에서야 다시 적정한 때가 왔음을 직감한다. 

명색이 남의 입을 대신해 쓰는 글로 먹고살아온 나는 이제야 여기 구례에서 해야 할 일을 찾았다. 우선은 아직 살아계신 어르신들의 여순사건 경험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것, 광주 학살의 가해자들을 끝까지 찾아 섬세하게 인터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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