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현이 문화in] 눈물, 액체로 된 포옹의 작가

작가를 찾아 함평으로 가는 길은 마음이 무겁다. 작업에 임하는 고독한 마음가짐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묵묵함의 격렬함을 알기 때문이다. 한 순간의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은 그의 시간은 깊은 바다이면서 스스로 깊어지게 하는 삶의 기본서이다.

‘작업실에 먼지만 켜켜하다’며 전화기 너머 손사래를 치고 있을 모습이 분분했지만 그것은 단지 우려였다. 작업실 바닥에는 여전히 에스키스(esquisse)한 종이들이 줄지어 나풀거렸고, 하루하루를 전사(戰士)로 살며 느끼며 체득한 구원의 글들이 벽 한가득 비늘처럼 붙어 있었다.

대문의 위치는 바뀌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입양되었고, 마당의 부추가 꽃을 피웠고 나무들이 한 뼘 자랐고, 으름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안으로 삭히고 녹여가며 다른 것들은 가지런해 보였다.

내 삶의 부처들

ⓒ이재칠 작가.

주변을 돌아보면 편안하지 않다. 인간이어서 겪어내야 하는 고통의 깊이가 그 만을 향해 있는 것 같다.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버릴 수 없는 배낭’이라고 표현하는 작가의 말을 들으며 ‘업고 있는 부처’로 해석했다. 아들의 장애가 없었다면 굳이 알 수도, 감내할 수도 없었던 삶의 깊이와 숙성을 감히 해석할 수 없어서였다.

작가는 “치료를 위해 아들과 함께 서울과 목포, 광주를 오가다 보면 하루 해는 너무 짧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없어진다.”며 “유화물감은 일정시간이 지나면 굳어버려 막상 그림을 그리려 하면 사용할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재료가 크레용과 수채이며, 크레용은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졌다.”고 재료에 관한 설명을 곁들였다.

2011년과 2014년 두 번의 전시에서 작가는 크레용으로 작업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말라비틀어져 미라가 된 북어를 중점적으로 작업으로 이끌어낸 두 번째 전시에서 한결같은 주제는 북어를 통한 삶의 성찰이었다. <가시 같은 봄이 살점을 꿴다>는 미라가 된 북어의 머리를 관통하는 봄을 온통 수채(水彩)를 이용한 분홍의 꽃으로 대조를 이뤘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수명을 다하고 먼지가 되어 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순환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북어의 바싹 마른 대가리를 휩싸고 있는 화사함에 빠져나올 수 없는 강렬한 충격이 압권이다.

<어머니의 칼> 역시 두터운 생선용 칼 안에 형상을 갖춘 북어대가리는 눈알이 없는 상태로 이미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져버린 상태, 즉, 소멸과 해탈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선장수를 하는 작가의 어머니는 어쩌면 칼을 통해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자연스런 관계의 선인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스스로 깊어지며 모두를 살리다

작가가 쓰는 글씨체인 ‘논두렁 장단의 막걸리체’로 일갈하는 글씨는 작업의 또 다른 수단이다. 일반적인 것들을 배제한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기능적 면을 우선하는 캘리그래피하고 본질적으로 다르다. 일상의 신산함에서 잠시 순간을 잊을 수 있게 하는 그 만의 작업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잠깐의 여유가 있을 때마다 생각하는, 생각했던 부분들을 정리하고, 메모해 두었던 문장들을 ‘논두렁 장단의 막걸리체’로 그림글씨를 쓰고 그린다. 작업 전의 밑 작업이며 모든 그림의 원류로 하루의 일과이기도 하고 며칠 동안의 작은, 깊은 소회이기도 하다.

이재칠 작가.

작가는 “작업의 근간이 되는 생각의 단편들 대부분이 ‘논두렁 장단의 막걸리체’로 일단의 표현을 해둔다. 일종의 생각 쓰기인 셈이다. 작업의 주제와 소재가 되는 오브제로 다시 살아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한 번 걸러진 생각을 시간에 묵혀두면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그림으로 완성된다.”고 설명한다.

하고 싶은 작업도 많다. 시간이 없으니 늘 미뤄두기만 하지만 언젠가는 마침내 그 때가 올 것이다. 붓질, 삽질, 묵질을 모두 통과하고 궁극적인 ‘나’를 찾아가는 여행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놓지 않은 작가를 존경한다. 머지않은 기간 안에 기존의 시화(詩畫)를 탈피한 작가만의 시화를 기대한다.


** 윗 글은 <광주 아트가이드> 94호(2017년 9월호)에 실린 것을 다시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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