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되요?”

고1 글쓰기 동아리 ‘호모 로퀜스’ 지도교사를 맡고 있는 내가 가장 듣기 거북한 질문이다. 난처하고 곤혹스럽다.

“이놈들아, 나도 몰라. 그걸 알면 샘이 이미 명문장가 됐겠다.”

이렇게 너스레를 떨며 그 답을 회피해 볼 생각이지만, 녀석들의 진지한 눈빛은 파리 잡는 찐득이처럼 나를 고이 놓아주지 않는다. 이내 대답을 피하는 게 죄짓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러면 마지못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송나라 명문장가 구양수는 말이지 글을 잘 쓰기 위해선 삼다(三多)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 있다. 다독이란….”

이런 시시콜콜한 대답을 큰 틀에서 해주면 아이들은 이미 많이 들었던, 이미 예상했던 신통치 않은 대답에 싱둥겅둥 듣는 표정만 지을 뿐이다. 나는 여기에 참고할 만한 몇 권의 책을 소개해주고 대답을 마친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이들의 그 싱둥겅둥한 표정이 체한 듯 가슴 속에 찝찝하게 걸린다. 무능력한 지도교사를 만난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나름 글 잘 쓰는 방법을 제법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각론에 해당하는 장르별 글쓰기 방법은 각양각색이겠으나 내 좁은 소견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총론적인 비책으로 구양수의 삼다를 능가하는 다른 비책은 없어 보인다. 첫째, 다독은 투입에 해당된다. 투입 없이 산출은 없다. 좋은 글을 산출하기 위해 다독은 필수요소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구양수는 그 이치를 분명히 꿰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다작은 수많은 습작훈련이다. 물론 출중한 글쓰기 재능이 있다면야 몇 번의 습작으로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나와 같은 범재에겐 정답이다. 물론 현대를 사는 사회인으로서 ‘수많은’은 엄두를 내기에 벅찬 횟수임에 틀림없겠으나 가급적 많이 써보는 게 상책임은 분명하다.

셋째, 다상량은 많이 생각하란 의미이나 나는 이를 창의성으로 해석하고 싶다. 남과는 다른 나만의 독창적 개성이 묻어나는 글. 형식을 따르되 그 형식을 넘어서는 그런 글 말이다. 어떤 이는 이를 위해 며칠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지 않던가. 그 끝에서 만난 한 줄의 문구가 주는 희열을 뭘로 말할 수 있을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나는 내 경험칙에 비추어 여기에 두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다.

그 하나는 ‘평가’이다. 다독, 다작, 다상량을 통해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면 거기서 끝이 아니다. 어떤 이는 자기 글이니 자기가 만족하면 그만이지라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릴 가능성이 크다. 일기가 아닌 이상 글은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읽혀져야 의미가 있다. 그래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장단점을 파악함은 물론 사회변혁에도 기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열린 안목’이다. 아무리 장르와 형식을 파괴하는 실험적인 작품을 썼다 하더라도 이를 바라보는 너그러운 안목이 없다면 그 실험은 거기서 조종을 울리고 만다. 또 다른 실험적인 작품이 나왔더라도 그 작품은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실험적인 작품이 무조건 좋은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런 작품들을 새로운 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 피들은 글쓰기란 바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할 것이다.

나는 두 해째 글쓰기 동아리를 지도하고 있다. 첫 해에 동아리를 별 탈 없이 마치고 문집까지 낼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아이들의 성취감 같다. 아이들이 써온 작품을 여럿이서 읽게 하고 잘한 점과 개선할 점을 난상토론식으로 발표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고쳐쓰기를 하게 하였다.

글을 쓴 학생은 자신의 글이 발전적으로 진화해가는 모습을 보며 뿌듯한 성취감을 느끼는 미소를 보면 지도교사로서 뿌듯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글쓰기에도 왕도는 없다. 아니 내가 그 왕도를 모르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올 해도 왕도가 있는 것처럼, 그 왕도를 아는 것처럼 말하며 글쓰기 지도를 하는 이 머쓱한 짓을 또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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