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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절창화담] 문경 청화산 원적사깊고 푸른 산중에 ‘가난하고 높게’ 핀 꽃

서암 스님 말씀대로, 속세를 한 번 떠나면 속리산俗離山이고, 한 번 더 떠나면 청화산靑華山이다. 두 산은 백두대간 늘재를 사이에 두고 비슷한 높이로 솟아 있다. 속리산은 속리하였으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환속한 것이 되었고, 정진하는 스님들은 한 번 더 속리하여 청화산에 터를 잡았다는 이야기다.

원적사圓寂寺는 괴산과 상주와 문경을 가르는 청화산(984m) 가슴께에 앉아 있다. 신라 무열왕 7년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그 흔적은 없다. 학이 승천하는 혈이 있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처로 종래 이름난 곳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스님들이 떠나고 쇠락해 가던 절을 서암 스님이 일으켰다.

ⓒ월간 불광 제공

한국전쟁과 가난했던 시절, 동냥과 탁발로 절을 지켜낸 스님의 노력은 눈물겹다. 그렇다고 원적사에 천년의 석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옛 보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길어야 100년의 유물 몇 조각, 시대를 알 수 없는 원효 대사의 진영, 30년 전에 낙성한 당우 같은 것들이어서 고졸古拙하게 볼 만한 것은 적다. 그렇다면, 원적사에 도도하게 흐르는 그 무엇, 두 번 속리할 이유는 무엇인가?

절에 가는 길, 장장 267km를 달린다. 창밖으로는 유월, 어딜 가나 밤꽃이다. 초록 짙어진 숲에 함박눈 내린 것처럼, 꽃은 산을 덮고 있다. 밤꽃 향기는 밤의 향기 같은 것. 그 무렵, 벌은 아카시아에서 밤꽃으로 옮겨가고, 시어미는 며느리를 단속한다는 초여름이다.

유월 볕에 푸르지 않은 것이 없고, 크지 않은 것이 없다. 마늘은 주먹만큼 여물고, 모는 벼가 되어 무릎만큼 자랐다. 과일에는 신맛이 가고 단맛이 스민다. 옥수수는 깃을 세우고 한정 없이 크는데, 바람이 불면 ‘수수~’ 하고 소리가 난다. 들은 꽃에서 열매로 넘어가고 있다.

청화산 오르는 길이 얼마나 가파른지, 정신 바짝 차리고 가야 한다. 급경사가 시작될 즈음에 차단막이 가로막고, ‘청정수행도량이니 돌아가라.’는 팻말이 서 있다. 원적사는 초파일과 칠월칠석, 일 년에 두 번 산문을 연다. 그것을 지나 한참 곡예를 하고 올라가자 높다란 축대 끝 툭 트인 하늘 위에서 스님이 내다보고 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면서 차를 내어준다. 그러더니 “오후 5시면 절은 일과가 끝날 시간이라, 밥 해줄 사람도 없고 그러니 서둘러 문경 가서 자고, 내일 아침 8시에 다시 오라.” 한다.

“스님, 제가 서암 스님 책도 사서 읽고, 광주에서 267km를 달려…”왔는데, 그래도 소용없다. 서암 스님 막내 상좌인 혜진 스님은 “보이차가 좋은 것은 차와 사람이 함께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 한마디 전해 주고는 문을 닫았다.

ⓒ월간 불광 제공

나는 20분 머문 뒤에 급경사를 다시 곡예 하듯이 내려와 문경에서 하루 잤다. 이튿날 아침 시간에 딱 맞춰 다시 차를 몰고 구불구불 원적사로 올라갔다.

스님은 법당 툇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다가 내가 합장을 하자, “일찍 왔네요.” 하더니, 큰 주전자를 들고 물 뜨러 간다. 스님과 나는 두 번째 만나는 것이라 벌써 구면이다. 구면은 초면보다 반갑다. 초면에는 입이 열어지고, 구면에는 마음이 열어지지 않겠는가. 둘이 앉아 찻물을 끓인다.

“여기는 공양주 보살이 없어요. 스님 둘이 살지.”
“밥은 누가 합니까?”
“배고픈 사람이 하지요.”

스님은 공양주 보살을 두지 말 것, 산문 밖에 나가지 말 것, 산문을 열지 말 것, 오직 정진에 힘쓸 것, 이런 몇 가지 서암 스님의 뜻을 철저히 지키며 살고 있다. 그러니 등 달아 놓은 것도 없고, 절 살림이 가난하다. 큰 절에서 보내주는 곡식도 없이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산다.

“여기는 사람보다 짐승이 더 많이 찾는 곳이요. 그러다 어떤 날, 사람들 발자국 소리가 들려요. 과일하고 쌀을 메고 저 산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부처님 공양드리러 찾아온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어찌 허투루 살 수 있겠습니까?”

“스님, 하화중생은 안 하십니까?”

“뭔 소리요? 내 똥도 못 치우고 사는데…. 내생에는 내가 과일을 지고 절에 오르겠지.” 하고 웃는다. 선승 특유의 웃음, 맑다. “나는 원효 스님을 기다리고 있는 거라. 큰 깨달음을 얻은 원효 스님이 원적사에 다시 찾아 올 때까지, 불 나거나 허물어지지 않게 이 절을 잘 지키고 그래서 큰 스님이 오면 자리를 비켜 드리면 되는 것이요.”

“원효 스님이 얻은 큰 깨달음은 무엇인가요?”

“처사가 여기 올 때 뭔가 얻어 가려고 왔을 것 아니요? 그것이 불각不覺이라. 헛걸음이고, 헛것이지. 원효가 당나라에 가는 것과 같은 것이요. 그런데 나하고 얘기해 보니까 별것이 없죠? 아, 그것이 아니었구나, 샘물인지 알았더니 썩은 물이었구나, 아차 싶은 거라. 그것이 시각始覺이요. 비로소 눈이 떠지는 거지. 그것을 모르고 어이 재수 없어 하면서 당나라로 계속 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거기서 가던 길을 멈추는 것(止行), 그것이 깨달음이라. 시작하려면 멈춰야 합니다. 멈추면 보이죠(觀行). 원효가 말한 ‘불가사의한 훈습薰習’이 그거요. 원적사에 가 봤더니 별 것도 없더라 그러면 돌아가야지.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내가 떠나왔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걸어 걸어서 고향에 딱 도착하면 그것이 참 깨달음, 본각本覺이요. 시각과 본각은 같은 것이지, 물이 본각이면 시각은 파도 같은 거라.” 불각에서 시각, 본각에 도달한 뒤에 한걸음 더 나아가 동고동락을 같이하며 민중 속으로 뛰어 들어간 것, 원효가 위대한 것은 ‘동사섭同事攝’이라고 혜진 스님은 말했다.

ⓒ월간 불광 제공

11시 가까워오자 스님은 “잠깐 볼 일 보고 점심 공양이나 하고 가라.”면서 가사를 챙겨 입고 일어섰다. 부엌에서 밥을 담아 마지摩旨를 들고 법당으로 들어가더니, 스님 둘이서 사시예불을 올린다. 쇳송을 하고, 염불을 외고, 절을 올리고, 무엇 하나 생략한 것이 없다. 새벽 도량석에서 저녁 예불까지, 스님으로서 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고 있음을 보지 않아도 알 듯 하다.

스님은 법복을 벗어 걸어두고, 축대 밑 작은 밭에 내려가더니 상추를 한 소쿠리 뜯어왔다. 점심 공양은 잡곡밥하고, 감자와 미역을 넣은 된장국하고, 상추 하나, 된장 하나, 가죽나물 하나가 전부였다. 그 소박한 밥상에 수저 젓가락이 세 벌 놓였다. 우리 셋밖에 없는데, 스님은 허공을 향해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을 쳤다.

반찬이 변변치 않으니 밥이 머슴밥처럼 많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누룽지까지 먹었다. 그릇에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다. 설거지는 내가 했다. “요새 가물어 물 아껴 쓰라.”는 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상을 치우고 차를 마셨다.

“하동에서는 딸이 시집 갈 때 차 씨를 줘서 보낸다고 합디다. 차나무는 직근直根하거든, 반듯이 뿌리 내리고 잘 살아라 그런 뜻하고, 찻잎을 따서 약으로 마시고 건강하게 잘 살아라 그런 뜻이 있다고 합디다.” 그러더니, 가면서 마시라고 내가 가져간 작은 보온병에 녹차를 가득 담아 주었다.

ⓒ월간 불광 제공

돌계단을 따라 절을 나서면서 “스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점심 잘 얻어먹고 갑니다.” 하고 반배했다. 스님은 “얼굴 잊어버릴 만하면 또 봅시다.” 하고 합장했다. 나는 차를 몰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잊어버릴 만하면 또 보자는 그 말이 얼마나 융숭한 대접인지 생각했다.

백석의 시처럼, 원적사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했다. 한 번 속리하고, 또 한 번 속리한 산중에서 스님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가난하고 높고’ 그런 것이었다.

** 이광이는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다.

** 윗 글은 월간<불광>에 연재 중인 <이광이의 절집 방랑기>를 출판사와 필자의 허락을 받고 재게재한 것 입니다. (www.bulkwang.co.kr/)


이광이 작가  yiyi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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