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작가 이사범

몇 번의 시간 조율 후 작가를 만났다. 큰길가 뒤편, 우리가 사는 지역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후미진 곳에 작업실이 위치해 있었다. 퇴직 후 집과 가까운 곳, 걸어서 출퇴근이 용이한 곳을 찾아서 안착했다. 벌써 6년을 훌쩍 넘겼다.

작가는 “운동 삼아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최고 입지 조건이라는 친구의 말을 따랐다. 게다가 번화하지 않아 소란하지 않고 임대료도 저렴해서 작업만 열심히 하면 금상첨화”라고 설명했다.

북쪽의 적당히 열린 창 밖 너머로 고양이 두 어 마리가 좁은 복도 사이에 어슬렁거렸다. 이젠 요놈들이 밥 때가 되면 친구까지 몰고 나타난다니까. 혹여 굶을까봐 먹이를 놓아주는 작가의 뒷모습이 따뜻해 보였다.

그곳엔 시장이 있었다.

이사범 화가. ⓒ광주아트가이드

건조했다. 그림과 물감, 작업을 위한 도구들 외에는 없었다. 부팅이 걱정되는 오래된 컴퓨터와 작업 도중 뻣뻣해진 몸을 쉴 낡은 소파가 작업실의 전부였다.

작업 중이었다. 작가는 이젤에 세워져 있는 작업을 눈빛으로 보며 몇 달째 끌어안고 있다며 자신의 게으름을 탓했다. 하지만 그동안 마감한 작업의 근간은 상당한 작업량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작업들이 40호 이상의 대형이었으며 이미 포장을 끝낸 작품도 상당했다.

1982년 첫 전시를 했었다. 30년이 넘어 두 번째 전시를 준비 중이다. 작가는 “교직에 있으면서 첫 번째 전시를 했고, 1980년대 중반쯤, 재직 중인 미술교사는 전시를 하지 못한다는 법령이 하달되었고, 첫 번째 전시로 교직을 마친 셈이다.”고 그간의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림을 놓은 건 아니었다. 일과가 끝난 밤이면 작가는 어김없이 붓을 들었고 밤은 곧 작업을 뜻했다. 소재를 찾아 곡성장과 황룡장, 창평장, 화순장을 찾아 다녔고 작업 안에는 장에서 만나고 느꼈던 표정의 소회들이 온전히 작업 안에 녹아들었다. 작업 안에 유난히 장마당의 풍경들이 많은 이유일 것이다.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장이 좋았다. 장이 서는 시각은 내가 받는 설렘과 같은 동의어였고, 골목골목 수런수런한 풍경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에서 사람살이의 중심인 장을 읽었으며 세상은 사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장(場)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기능만이 전부가 아니다. 현대의 마트(mart)와는 다른 개념인 셈이다. 장에 나서면 이웃 간의 소통이 있었으며 마을마다의 단결이 있었다. 막걸리에는 민중의 삶과 고통이 함께 했으며 덤에는 모든 어머니들의 사랑이 녹아 있었다. 우리 역사상 독립운동의 만세는 언제나 장에서 시작되었음이 그것을 방증한다.

열린 눈, 항상 깨어있으라.

마음의정(2004년)- 이사범.

사람에게 집중한다. 주제로 천착한 촛불도 햄버거도 공원의 풍경과 시장의 풍경 또한 사람사는 풍경이 전부다. 사람으로 시작하고 마감하는 작업이며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전부인 셈이다.

작가는 “눈에 보이는 사람의 풍경, 눈빛, 마음이 바람의 결을 따라 내게 다가왔다.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표정들도 읽혀졌으며 그들의 무언의 표정 속에서 작업은 시작되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내내 사람과의 간극에 몰두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이 되어 전시를 하려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시대의 부조리도 무관하지 않았다. ‘아들의 낫을 가는 아버지’와 ‘오월항쟁도’가 바로 그것이다. ‘낫을 가는 아버지’의 배경은 5월 민주 영령들이 묻힌 묘지이다. 아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아들은 미독재 타도와 5월 민주화운동으로 이미 바람의 넋이 되었고 아버지는 그 아들의 영혼을 위해 낫을 갈며 아들의 의지를 다시금 되새긴다. 낫을 갈고 있는 아버지의 결기에 찬 눈빛과 산화한 모든 아들들을 위한 진혼굿의 넋풀이가 진행 중이며 아버지의 등 뒤로 오월 전시들의 묘비가 보인다.

‘오월항쟁도’는 말 그대로 오월항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계엄군의 잔혹한 참상이다. 놀라 망연한 표정들의 군중과 계엄군의 총과 개머리판을 피해 어디론가 도망치듯 달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 그 중앙에는 구 전남도청의 흰 본관건물과 분수대가 있으며 상공을 낮게 순회하는 헬기가 떠 있다.

작가는 “있을 수 없는 잔혹한 배신이 1980년 5월에 이곳에서 있었으며 자국민을 살해한 군부는 여전히 존재한다.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싶었으며 살아남은 자의 변명으로 작은 목소리라도 내고자 작업했다. 특히 이상호를 모델로 그린 시민군은 더 애착이 간다.”고 설명했다.

정년을 한 지 6년.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엄격한 의미에서 첫 전시인 셈이다. 늦깎이 화가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 이 글은 <광주 아트가이드> 91호에 실린 것을 다시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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