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새 대통령에 바란다]

늦은 시간 올라탄 버스 안입니다. 가끔 이용하게 되는 버스는 아는 사람들끼리 함께 하는 자동차나 택시와 달리 낯선 이들과 동승하는 까닭에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살펴 볼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합니다. 

한정된 공간에 함께 머물렀다 떠나는 낯선 이들은 동승하는 동안만큼은 한 배를 탄 운명입니다. 시간에 쫓김 없이 내 이웃의 모습을 살피다 보면 그 소박함에 버스 안의 공기는 따스해지고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광주인

큰 소리로 통화를 하던 중년여성이 교복차림의 여고생에게 책가방을 벗어달라는 시늉을 건넵니다.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는 여고생의 얼굴엔 그 나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수줍은 웃음이 머뭅니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는 아가씨도 보입니다. 느린 걸음으로 자리를 찾아 앉는 어르신. 제 옆에 앉은 아저씨는 옅은 술 냄새를 풍기며 꾸벅꾸벅 졸고 계십니다. 밝은 웃음이 만면에 흐르는 한 남녀 커플이 이제 막 버스에 올라타네요.

버스 안 티브이에서는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 입성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헤아려보니 오늘로 180여 일이 되었네요. 지난 2016년 11월 12일 광화문에서 시작되어 남해의 외딴 섬까지 밝혀졌던 ‘국민촛불’의 행진 말입니다. 하나의 마음으로 한 목소리를 내던 그 날의 울림이 생생하게 전해옵니다. 

혹시 몰라 준비한 양초가 순식간에 동이 나버려서 광주 충장로 일대를 돌며 양초를 사서 모으느라 마음과 발걸음이 모두 바빴던 그 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삼삼오오 모여든 시민들의 발걸음이 어느새 5.18민주광장을 꽉 메우고 저마다의 손에 들린 촛불이 광장의 민주열사들의 넋을 밝혔던 그 날. 

사회자의 주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시민들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뭉클 젖어들던 그 날. 국민촛불부터 대통령 탄핵과 구속까지 정말이지 제 생애에 ‘서울의 봄’과도 같은,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사건을 생생한 라이브로 겪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깊은 밤에 홀로 깨어 생각해 봅니다. 반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시민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광주인

매주 토요일이면 기적처럼 수십만 개의 촛불이 밝혀지던 광장에서 ‘박근혜 퇴진’과 ‘적폐청산’을 외치던 시민들이 바라는 세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만한 따뜻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영하 15도의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노동자의 인권을 외치며 백척간두 철탑에 오르지 않아도 되는 나라,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학업에 지쳐서 유서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나라, 친구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는 소란스러움을 피해 홀로 배회하다 주린 배를 수돗물로 채우지 않아도 되는 나라.

가난 때문에 제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는 모성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 가라앉는 배 안에서 구명조끼를 서로에게 양보하며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던 아이들이 칠흑같이 어둡고 죽음보다 차가운 바다 속으로 끝내 사라지지 않는 나라, 돈 많고 능력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한 것이 억울함으로 남지 않는 나라, 한 평생을 가족에게 헌신하고도 새벽 찬 이슬에 옷깃을 적시며 골목 어귀 폐지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되는 나라.

한 개인과 언론의 자유를 규제하지 않는 나라, 국가의 존립 이유인 국민을 감시하여 저마다의 인격을 스스로 제단하지 않는 나라, 그리하여 저마다의 자신을 활짝 펼쳐놓고 살아도 좋은 나라,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어린 소녀들이 할머니가 될 때가지 그 분통함에 눈물을 닦아내지 않아도 되는 나라.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정세 아래 좌익과 우익을 가르고 그 것을 정치의 명분으로 삼지 않는 나라, 건전한 보수와 진보가 함께 손잡을 수 있는 나라, 한 나라의 안보와 그 나라의 국민이 강대국의 장사놀음에 위협받지 않는 나라, 애매한 안보논리를 안개처럼 퍼뜨려 국민의 눈을 흐리지 않는 나라.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 설켜 국민의 정서가 되어버린 만연된 적폐와 민생을 신음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국민촛불은 바랬을 것입니다.

김민주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국민촛불이 만들어 낸 문재인 대통령께 바랍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이 공평한 나라’,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위화감 없이 온정을 나누며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운명에 올라탄 국민으로서 우리는, 저마다의 지성을 이루고 그 날의 촛불처럼 늘 깨어 있겠습니다.

당신의 손에 새벽 찬 이슬을 맞는 90세 어르신의 고단한 삶이 있습니다. 기업의 횡포에 억울한 해직을 두려워하는 한 가장의 한숨이 맡겨졌습니다. 빛나는 젊음을 누릴 여유도 없이 자신의 탓만도 아닌 일을 부둥켜안고 깊은 자괴감으로 잠들지 못하는 청년들의 삶도 당신의 손안에 쥐어졌습니다.

9년 만에 이뤄낸 정권교체로 어깨가 무거운 대한민국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을 응원합니다. 힘내십시오! 당신에게는 오천만의 ‘국민촛불’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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