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민두의 기차별곡]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과 기차는 우리네 문학 공간 속에서 끝없는 알레고리를 만들어내는 상징공간이다. 만남과 떠남의 공간 안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정회와 미련, 안타까움이 모든 사람의 정서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이 특히 그러하다.

소설은 시골 간이역을 인간의 정회와 서정이 쓸쓸하게 일어나는 심리공간으로 묘사함으로써 기차에 대한 옛 감성을 일깨우는데 일조했다. 소설은 정거장의 정경은 물론 거기에 물처럼 스며있는 정서까지 끈끈하게 서술하여 철도에 종사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언제 읽어도 변함없는 감동을 준다.

ⓒ한국방송  '사평역에서' 갈무리

기차를 단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소설을 읽으면 충분히 확장된 상상을 할 수 있을 만큼 상황묘사가 뛰어나 독자의 심연을 뒤흔든다. 송곳 같은 시선으로 꿰뚫는 인간 내면의 고독감은 마치 외진 시골 역에서 혼자 기차를 기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뿐만 아니라 기차를 삶의 친구로 보고 산굽이를 휘감고 돌아가는 철로의 모습을 담담하지만 장엄하게 묘사한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해보게도 한다.

‘봄날 몸을 푼 강물이 반원을 그리며 유유히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철길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도 모든 걸 다 마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어느 노년의 모습처럼 그것은 퍽이나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곤 하는 것이다.’(임철우 작 사평역 중)

문학이 우리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굉장하다. 관념적 어휘와 단어만으로 사람들은 마치 실제를 경험하는 환상 속에 빠져든다. 소설이 실제인지 실제가 소설인지 모를 모호함 속에서 소설 속의 멋진 장면이나 배경이 실물로 만들어지는 역설을 낳기도 한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속의 ‘최참판 댁’이 실제로 지어져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는 것과, 소설 속의 ‘사평역’이 어디인지 전국의 간이역을 찾아 헤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사평역은 눈이 푹푹 빠지는 깊은 겨울이지만, 따뜻한 인정이 저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인물에 각각의 사연을 입혀 198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애환과 인간미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막차,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는 막막한 심정의 사람들, 미래가 불확실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삶이 바로 그러하다. 어쩜 우리네 인생이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막차를 기다리는 그곳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소설 속 기차는 탈것의 의미를 넘어 ‘삶의 행복’이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행복이 쉽게 찾아오지 않는 것처럼,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스러질 것 같은 희망을 붙잡는다. 가슴에 지닌 사연은 모두 다르지만, 작가는 힘들고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시선과 연민을 보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일상적인 삶을 성찰하게 만든다.

오늘도 많은 승객은 소설 속 인물처럼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기차에 오른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겉으로의 궁핍은 면했지만 고달픈 삶의 편린을 간직한 이들이 많다.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남과 비교해야하고 남을 앞서야 자존감을 갖는 세상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거나 물먹은 솜처럼 지쳐있다. 그러므로 나는 기차를 타는 순간만이라도 마음의 위로와 치유, 즉 힐링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추운 겨울밤 언제 올지 모르는 막차를 기다리지만 그 기다림 속에서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정서적 긴장을 완화하고 타인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치유의 감정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한창 확대되고 있는 '테마가 있는 기차여행'은 상당히 바람직하다. 기차는 다른 어떤 탈것보다 사람에 대한 포용력이 크기 때문에 힐링의 잠재력과 효용성이 높은 교통수단이다. 기차가 각종 시와 소설, 수많은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전남 나주 남평역. ⓒ나무위키 갈무리

그러나 요즘의 시골 정거장은 소설 속 사평역의 모습이 아니다. 사실 고속철도 개통이후 거의 모든 정거장은 요란한 조명과 으리으리한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손님을 맞는다.

하지만 정작 승객들이 정서적으로 누릴 수 있는 공간은 많이 부족하다. 이런 곳에서는 심리적 긴장을 완화할 수 없고 타인에 대한 우호적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 지금의 승객들은 소설 속 인물처럼 사고를 확장하여 자신을 뒤돌아보며 힐링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셈이다. 현대의 ‘역’이 생각해야 할 점이다.

소설 속의 완행열차는 고작해야 평균시속 30~40킬로미터로 달렸지만 KTX는 ‘빠름~빠름~’하는 광고 문구처럼 그보다 10배나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과연 우리는 빨라진 속도만큼 더 행복해지는 것일까?

세상은 휙휙 돌아가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며 치열한 경쟁으로 모두가 피로한 이 시대, 지금이야말로 역에서, 기차에서 ‘쉼표’의 휴식을 얻었으면 좋겠다. 비록 모든 정거장은 현대화되고 기차의 속도는 총알처럼 빨라졌지만 기차는 언제나 여유와 낭만, 그리고 희망을 싣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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