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파리코뮌의 기억

박근혜 국회탄핵 이후 헌재 심리가 진행 중이지만 조기대선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다양한 대선 후보들이 전국 곳곳을 누비며 표밭을 갈고 있고 각종 정책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후보는 찾아보기 힘들고 노동정치의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고용불안과 생활고에 지친 노동자들 그리고 임금인상 위주의 경제투쟁에 심혈을 쏟아온 노동운동진영의 현실을 볼 때, 탄핵과 대선이 낯설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모순덩어리 현대사회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대안은 오로지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에 있기에 작금의 미약한 힘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의 권력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후 권력을 향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다. 실패와 좌절도 많았지만 그 중 1871년 파리코뮌에 등장한 노동자 권력을 소개하며 대선이라는 권력 재편기, 노동계급의 임무와 역할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존재한 파리코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노동자 권력’이라고들 한다. 72일간이라는 짧은 기간과 미완성으로 인하여 완전한 노동자 권력이 아닌 그 맹아였다고도 한다.

마지막 피의 일주일(5월 21일~28일) 동안 프랑스 정규군과 독일군에 의해 파리 노동자 3만 명이 학살당하고 4만 5천 명이 연행된 후 처형당한다. 당시 유럽을 중심으로 자본주의가 날로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힘이 권력 장악에까지 이른 것만으로도 자본가를 비롯한 지배층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한 대사건이었다.

파리코뮌의 등장

1870년 나폴레옹 3세는 반대 세력이 성장해가자 독일과의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내부의 부패와 무능 탓에 몇 주 만에 패배하고 만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티에르 정부가 세워졌지만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휴전협정을 맺고 오히려 국민방위대로 무장한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려 했다.

독일군에게 봉쇄되고 굶주려가면서도 파리를 지키려고 자신들의 돈으로 만든 대포와 무기들이었다. 이를 빼앗으려는 정부군에 맞서 국민방위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리의 부자, 자본가, 정치관료들은 베르사이유궁으로 도망을 친다. 파리는 이때부터 국민방위대의 수중에 떨어졌고 1871년 3월 26일 마침내 선거가 실시돼 85명의 코뮌 자치위원이 구성되고 노동자민중의 자치가 구현된다.

파리코뮌의 전개과정

파리코뮌은 단순한 의회기구가 아니었다. 입법과 행정 권력이 무장한 노동계급의 수중에 있었고 민중이 선출한 관리는 언제든 소환할 수 있었다.

파리코뮌은 소수 지배 계급을 위해 봉사했던 상비군을 폐지했고 교회와 국가 및 교육을 분리 시켰다. 노동현장에는 빵공장의 야간 노동을 금지시켰고 노동수탈의 무기였던 벌금제를 폐지시켰다.

소유주가 문을 닫거나 포기한 작업장을 협동조합에 인도하는 법안을 만들기도 했으며 행정공무원과 고위공직자의 임금을 노동자들의 평균임금 수준을 넘지 못하게 했다. 빈 집은 집 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갔으며 매춘이 금지되었다.

무상 공교육이 준비되었고 여성을 위한 직업훈련도 개발되었다. 아동 보육시설과 공동식당 계획도 세워졌다. 노동자 민중들을 억누르던 과거 대신 전혀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수많은 과제들을 실행에 옮기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프랑스 정부군과 독일군에 의한 일주일간의 대학살 속에 인류 최초의 노동자 정부 실험은 막을 내리고 만다. 파리 노동자들의 코뮌자치가 외부로 퍼져 유럽 전체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베르사이유 지배세력과 독일군의 공세는 다급했고 더 이상의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파리코뮌의 교훈>

1871년 파리의 엄청난 경험은 이후 러시아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파리코뮌을 면밀히 분석하였고 한계와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한다.

파리 노동자만의 고립된 투쟁을 탈피한 농민층과 연계, 베르사이유에 진을 치고 있는 지배세력 방치가 아닌 확실한 분쇄, 노동계급의 투쟁과 미래를 안내해줄 ‘노동자당’의 부재에 맞선 볼세비키당 건설과 활동 등등... 파리코뮌이 등장한지 46년 만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난다.

정찬호 노동활동가.

그 혁명의 일등 공신은 볼셰비키라는 노동자당의 활동이다. 역으로 만약 파리에 노동자당이 있었다면 프랑스와 유럽 전체를 돌아봤을 것이고 사전에 노동대중에게 노동자 정부를 안내하여 더욱 단단한 힘을 축적했을 것이다.

또한 파리를 제외한 전국 각지와 연계하여 정부군과 독일군의 침공에 맞서 코뮌을 더욱 더 갈고 닦아 긴세월 동안 후세에 남겼을 것이다. 오늘날 볼셰비키가 추출했던 교훈들을 그대로 베껴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투쟁의 사령부로서 ‘노동자당’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72일간의 파리의 기록은 과거 지배세력의 기구가 아닌 전혀 다른 기구여야 함을 보여준다.

2017년 대한민국 대선이라는 권력 재편기에 ‘노동자 정부와 노동자당 건설’을 전파할 노동자 후보의 출현을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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