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겨울 암자 가는 길 끝과 시작이 이어진 길

“암자는 혼자 와야 돼. 누가 말해 줄 것도, 가르쳐 줄 것도 없어요. 선이 뭐요? 선은 자기 방석은 자기가 마련하는 거여. 암자의 본질은 원시성이라. 촌스럽고 불편하고 그런 거여. 태고의 어느 공간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쓰디쓴 시간들, 외롭고 고독한 나를 만나는 것이지. 스스로 돌아보고 뭔가를 깨닫고 가면 좋은 것이고, 못 느끼고 가면 한 번 더 오면 되는 것이고.”

ⓒ월간 불광 제공

한 해의 끝은 12월이지만, 11월이 더 끝 같다. 끝은 더 갈 수 없는 것이므로 연속과의 이별이다. 여행을 마치고 헤어지는 것, 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 한 생을 마치고 졸업하는 것들이 다 끝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진짜 끝보다 더 끝 같은 것은 끝으로 가는 시간, 그러니까 끝 조금 전이다. 사랑이 사랑에 도착하기 전에 더 설레고 조바심 나는 것처럼, 종착으로 가는 이별의 아직 덜 끊어진 시간들이 더 애달프다.

11월은 끝 조금 전이다. 겨울과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실루엣 같은 시간들, 그때가 더 춥고 더 어둡다. 12월의 나목(裸木)을 견딜 수 있는 것은 11월의 그런 순간들을 지나왔기 때문이다. 거리를 붉게 물들였던 잎들은 오그라져 떨어지고, 마른 낙엽이 쓸려 다니던 음산하고 우울한 시간이 흐른 뒤에 12월은 온다.

ⓒ월간 불광 제공

삶의 매 순간이 그렇듯이, 12월은 그것대로 버거운 무게를 지닌다. 달력을 한 장이 아니라 한 권을 통째로 넘기기 위해서는 근력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12월에는 어딘가를 다녀와야 한다. 우리는 땅끝으로 향했다. 

해남 가는 길은 가도 가도 배추밭이었다. 벼를 베고 그루터기만 남은 논을 지나 배추밭 두 개에 마늘밭 하나, 배추밭 두 개에 고구마밭 하나, 들은 그런 배열을 중복하면서 푸르거나 붉게 지나갔다. 저 밭에 있는 것들을 함께 버무리면 김치다.

땅끝은 겨울이 늦어 가장 늦게까지 배추를 키울 수 있는 곳이다. 바닷가여서 절이기도 좋고, 그래서 겨울 김장배추의 70%가 해남에서 나온다. 금년에는 잦은 비로 작황이 안 좋아 배춧값이 많이 올랐다. 차는 굽이굽이 산비탈을 오른다. 산속에서 바라본 산 빛은 더 붉고 더 짙다. 산은 조금씩 오를 때마다 늦가을의 속살을 보여준다.

단풍은 눈처럼 날리고,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죽순처럼 뾰족뾰족 솟아 있는 풍경들, 그러다 어느 모퉁이를 돌 때 갑자기 툭 트이고 바다가 들어왔다. 반짝이는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 달마산(489m)의 빼어난 풍경은 가히 남해의 금강이라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차에서 내려 800m를 걸어가야 하는 작은 공터에서 도솔암 암주(庵主) 법조 스님을 만났다. 도솔(兜率)은 부처의 전생이고,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는 천계이니, 나는 반 배하고 물었다. 

“스님, 여기가 극락입니까?” 
“극락 같지요?”
“이런 비경을 매일 보고, 여기 살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한번 살아보소. 극락도 하루 이틀이 극락이지, 사흘 지나면 그것이 그것이라.”

ⓒ월간 불광 제공

숲이 우거진 산길을 20분쯤 걸었을 때, 커다란 두 개의 바위틈에 끼어 있는 팽나무 한그루, 그리고 작은 암자가 나타났다. 10평 남짓 땅에 4평의 법당이니, 나뭇가지에 얹힌 새집 같다. 법당 안은 천장에 매단 등이 머리에 닿을 듯하고, 세 사람이 나란히 서서 절을 올리기에도 비좁다. 앞문을 열자 멀리 남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에는 해태 양식장의 김발이 검은 양탄자를 펴 놓은 듯하다. 암자를 향해 경배하고 있는 듯한 바위의 군상들, 그것은 누군가 깎아 놓은 불상처럼 보였다. 법당 안에서 절을 하면 삼 배이고, 밖으로 나와 저 자연의 불상 앞에 절을 하면 삼만 배라 하더니, 과연 그러하다. 도솔암은 통일신라 때 의상 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달마산 가장 높은 곳에, 육지의 남단에 자리한 이 작은 암자는 천 년 동안 비경의 수행처로 이어져 왔다. 그러다 정유재란 당시 퇴각하는 왜군에 의해 소실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월간 불광 제공
ⓒ월간 불광 제공

그 후 오백여 년 동안 도솔암은 사지(寺址)였다. 2002년 법조 스님이 작은 법당을 지으면서 빈터는 다시 암자가 되었다. 절은 저절로 지어진다지만, 저 깎아지른 바위틈에 10m가 넘는 축대를 쌓는 일 하며, 기와와 목재를 그 높은 곳까지 옮겨 집 짓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산 아래 해남 북평이 내 고향인데, 어느 날 꿈에 이곳이 보이더라고. 그래서 훌훌 털고 왔어요. 원력을 내니까 도와주는 사람도 생기고, 기왓장 1,800장을 져 날랐어요.”

법조 스님은 32일 만에 법당을 완성하고, 그 아래 두 평짜리 삼성각까지 지었다. 삭발은 통도사에서 하고, 수계는 불국사에서 하고, 재적은 월정사에 있고, 사는 곳은 대흥사 말사이니, “나처럼 본사를 네 개는 끼어야 여기에 불사를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한바탕 호방하게 웃더니, “그거는 농담이고 저거는 부처님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주승(主僧)은 간데없이 객이 홀로 머무는 곳이 암자라고 스님은 말했다. 큰 절이 교(敎)라면, 암자는 선(禪)이고, 선은 혼자 하는 것이니 스님은 찾아 어디 쓸 것이냐는 것이다. 

“암자는 혼자 와야 돼. 누가 말해 줄 것도, 가르쳐 줄 것도 없어요. 선이 뭐요? 선은 자기 방석은 자기가 마련하는 거여. 암자의 본질은 원시성이라. 촌스럽고 불편하고 그런 거여. 태고의 어느 공간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쓰디쓴 시간들, 외롭고 고독한 나를 만나는 것이지. 스스로 돌아보고 뭔가를 깨닫고 가면 좋은 것이고, 못 느끼고 가면 한 번 더 오면 되는 것이고.”

ⓒ월간 불광 제공

절에 가면 차 한 잔 얻어 마실 법하지만, 여기서 차(茶)는 사치스러운 것이다. 마실 것은 법당 구석, 페트병에 든 물이 전부다. 목이나 축이라고 스님이 가져다 놓았는데, 그것은 빗물이다. 15년 동안 암자에서는 빗물을 받아 살아왔다. “빗물 먹고 살다 보면 빗물을 아껴 쓰게 되는데, 넉넉하면 모를 것을 부족해서 배우는 것이 많다.”면서 “측간(廁間)이 없어 그것이 미안한 일”이라고 했다.

삐죽이 꼬리를 내민 땅끝, 왼쪽으로 완도를 오른쪽으로 진도를 거느리고, 저 백두대간을 휘돌아 온 산맥들이 이제는 더 갈 곳이 없는 땅끝, 서쪽 하늘로 해가 지고 있다. 하늘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뭍으로, 뭍에서 산으로 노을은 세상을 둥글고 붉게 물들였다.

땅이 끝나는 곳에는 물이 있었다. 땅과 물 사이에는 선(線)이 있었고, 선은 땅 쪽으로 왔다가 물 쪽으로 갔다가 했다. 끝은 고정된 선이 아니라 물의 호흡에 따라 흔들렸다. 땅이 끝나는 곳에 물이 있듯이 물이 끝나는 곳에 섬이 있었다. 끝은 끝이 아니었다. 뭍과 섬은 물로 이어져 있었다.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함민복의 절창, ‘섬’이다. 섬에게 바다는 낮은 울타리이고, 모든 울타리는 길이다. 끝이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연속과 이음의 통로라는 빛나는 통찰이 저 안에 있다. 그러므로 끝은 시작이고, 둘은 붙어 있다. 12월은 잘 비우고, 잘 끝내는 달이다. 땅끝 도솔암에 가면 끝이 보인다. 끝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찬란한 새해가 뜬다.        
 

** 이광이는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다.

** 윗 글은 월간<불광>에 연재 중인 <이광이의 절집 방랑기>를 출판사와 필자의 허락을 받고 재게재한 것 입니다. (www.bulkwang.co.kr/)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