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통과가 난망해 보이던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달포가 넘도록 지치지도 않고, 회를 거듭할수록 더욱 거세게 타오른 촛불이 우물거리는 정치인들을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옛이야기 속에 나오는 노래 한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용왕에게 납치된 수로부인을 구하고자 신라인들이 막대기로 땅을 치며 불렀다는 노래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다. 당대 최고의 미인이던 수로부인이 일행과 함께 여행하던 중, 그녀의 미모에 반한 동해 용왕에게 납치를 당한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남편에게 지나가던 노인이 부인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탄핵 가결 소식에 서로 얼싸안고 승리의 눈물을 흘리는 세월호 광주시민상주모임 회원들. 이들은 이날 새벽 광주에서 시민들과 함께 버스 3대로 국회 앞으로 향했다. ⓒ광주시민상주모임 제공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막대기로 땅을 치며 노래를 부르라고, 그러면 아무리 못된 용왕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에 겁을 집어먹게 될 것이라고. 수로부인의 남편은 노인의 말대로 인근의 마을 사람들을 모아 저 노래를 부르며 막대기로 땅을 치게 했다. 파도를 집어삼킬 듯한 외침 소리에 동해 용왕이 부인을 되돌려 보냈음은 물론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9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사사로운 욕심으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절단 내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용왕은 누구인가? 매력과 기품을 지녔으되 약자라는 이유로 파괴와 수탈의 대상이 된 수로부인은 누구인가? 백주 대낮에 아내가 유괴되는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서도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해 발만 구르는 남편은 누구인가?

그리고 억울하게 당한 부인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업도 포기하고 달려 나와 땅을 치며 노래를 부른 수많은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굳이 답을 말하지 않아도 우린 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 중 어떤 사람에 속하는지도….

다만 아리송한 것은 단순하지만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사라진 노인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노인은 당대의 현자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 현자의 자리는 누가 차지할 수 있을까?

지난 3일 6차 광주시국촛불대회에 등장한 '박근혜 감옥'. ⓒ광주인

대통령의 거듭되는 거짓말에 촛불의 증가로 응답한 민심인가, 아니면 경찰 차벽을 화사한 꽃벽으로 만들고 다시 그 꽃벽을 일상으로 되돌린 시민의식인가?

격렬한 분노 대신 축제의 즐거움에다 냉철한 요구를 담아낸 평화의지인가, 아님 탄핵소추안의 압도적 가결에도 축포를 터뜨리는 대신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자기 삶의 자리를 고르는 민주의식인가? 사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로 아울러질 그 무엇인가의 조각이다.

조각들을 이어붙이면 하나의 이름이 발견된다. 광장의 수많은 촛불들이 다양한 논의와 토론을 거쳐 만들어낸 방향성의 이름은 집단지성이다. 현자인 노인의 역할은 바로 이 집단지성이 해낸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 오늘날의 현자는 말한다. 끝이 아니라고,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여러 사람이 모여 계속해서 막대기로 땅을 치며 노래를 부르라고 말이다. 다 되었다는 생각으로 멈칫했던 탓에 역사의 뒷걸음질이 용인되었던 사건들을 잊지 말라고 한다.

친일이 청산되지 못한 해방 이후를, 군부독재를 막지 못한 4.19 의거 이후를, 그리고 2차 군부독재의 정권 연장을 막지 못한 6.10 항쟁 이후의 시간들을….

이러한 인식은 우리 근대사 70년의 적폐와 왜곡을 바로잡을 참으로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우리 자신의 내적 명령에 다름 아니다. 작은 승리에 취해 땅을 치며 노래 부르기를 멈추는 순간 우리의 수로부인은 언제라도 다시 용왕에게 유괴되어 갈 것이다.

그 수로부인이 당신일지 나 자신일지 알 순 없지만, 누구든 우리들 중의 하나일 거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촛불의 노래가 아직은 끝날 수 없는 이유이다.









** 이진 소설가는 국문학박사, 목포대강사, 광주여대교수, 다듬문학연구소 연구원, 소설집 <창>, <알레그로마에스토소>, <꽁지를 위한 방법서설> 등. 연구서 <‘토지’의 가족서사연구>, <글과 삶>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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