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촛불 산문' 연재

한 나라, 국가라는 것의 시스템이 얼마나 허구이고 사기인지 모두가 확인한 2016년 가을이었다. 국가라는 조직은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들의 삶을 관여한다는 속성 하나만으로도 본질적으로 폭력을 내재하고 있다. 

나아가 대통령 중심제라는 이름으로 부여된 권한은 헌법적 권한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 자체로 독재적 성격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국가운영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다수에 의해 선택된 최선의 제도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많은 상호적 장치를 통해 권력의 적절한 균형을 이루게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 역시 최선의 제도일 뿐이다. 
 

ⓒ청와대 누리집 갈무리

‘최선’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말이기는 하지만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며, 어떤 상대적 상황에 따라서는 50%에도 못 미치는 안타까움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명박이나 박근혜 같은 인격적으로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들이 그 막중한 위치에 있을 때 얼마나 쉽게 살림이 거덜 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나라가 무너지는지를 보았다.

그래서 제도라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할 수 있을지 모르나 현실 속에서는 완벽한 제도라는 것은 없다. 이론과 실제의 차이에는 ‘사람’이라는 것이 있고 완벽한 제도라 해도 현실 속에서 시행하는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요리사가 아닌 악인이 잡으면 살인의 도구가 되듯이 문제는 언제나 그 사람에게 있다. 이것은 비단 국가만의 일이 아니다. 사회단체나 기업도 마찬가지이며 학교며 병원이며 기관 등 모든 크고 작은 조직이 그렇다. 

막중한 권한을 가진 그 조직의 장이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 흥망성쇠와 평화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세월호 침몰 당시 300여명의 목숨을 좌우할 권한이 무지하고 무능한 박근혜의 손아귀에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재앙인가.

하지만 세월호를 포함하여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도 어찌 모든 것을 박근혜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지난 19일 옛 전남도청 앞 5.18민주광장과 금남로에서 열린 4차 광주촛불집회에서 광주시민들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다. ⓒ광주인

최순실이 국정의 많은 일에 일일이 간섭하며 이권을 챙길 때 그에 관련된 부처 부서의 사람들은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으니 그게 아무리 상명하복에 충실한 공무원이라 해도 제 ‘목’ 하나 생각할 뿐, 나라며 국민, 공익이라는 단어를 쉰내 나게 뱉으며 사는 사람들의 태도인가. 

아, 이 또한 그들만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들을 욕하는 우리 누구도 그 장관이나 고급 공무원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목’을 걸고 이들의 만행을 저지 하고 저항할 수 있었을까? 

아픈 처와 대학에 보내야 하는 자식을 생각하며, 또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수모와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모르겠지만 아마도 국민의 80% 정도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일까?

그래서 문제의 근원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사회의 불의나 특정인의 불의에는 누구나 분노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의 불의에는 늘 관대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불의를 감추기 위해 상대방의 불의에 더 날뛰는 사람도 있다. 별로 정의롭지 못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어떤 상황을 만나면 정의로운 척 더 요란을 떠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문제는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의 본질 바탕에는 이기적인 현대인, 자신의 불의에는 늘 관대한, 이러한 사회적 정서, 자본의 정서가 짙게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변혁을 꾀한다는 것에는 제도의 변화도 필요하지만 개인 ‘의식’의 확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이러한 이기적인 사고는 오래된 자본 중심의 사회적 정서 속에서 자연스럽게 심화된 것이고 지금에 와서는 가정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생활세계에 침윤되어 있어서 그러한 생활 방식과 사고가 당연하다는 생각들이다. 
 

지난 19일 4차 촛불집회에 나온 광주시민이 '박근혜 퇴진' 손팻말을과 촛불을 들고 있다. ⓒ광주인

당장 실직자가 되어 바닥을 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조금은 비굴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 아니냐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 좋다. 다 이해는 하는데, 이 또한 개인의 이기적인 생각에 불과할 뿐이다. 배고프면 도둑질도 하고 사기도 쳐야 하는가. 극한 상황에서는 내가 살기 위해 무고한 누구를 죽여도 좋다는 말인가. 어쩌면 자본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이미 근본의 어느 부분에서부터 비틀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박근혜를 보라. 상식을 넘어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대통령의 모습을. 비굴하고 나약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평범한 한 노파의 모습을. 이것은 박근혜라는 대통령, 또는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삶의 근본이 뒤틀려 있다는 점에서는 현대인들의 초상 또한 여기서 그리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본의 논리와 방식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적 가치관으로의 전화와 함께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을 확장하기 위한 ‘의식’의 변혁을 위한 근본운동이 절실한 국면이다. 

한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단지 몸뚱어리만의 변화가 아니라 그 사람됨을 말하는 것처럼 사회의 변화 또한 어찌 제도를 바꾸고 지도자를 바꾸는 것만으로 될 수 있을 것인가. 

개인과 사회의 ‘의식’ 확장 또한 절실한 국면이다. 작금에 진행된 전국의 ‘촛불집회’야말로 사회의 전체의식을 확장시킨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56년 전북 출생으로 1985년 <남민시(南民詩)> 창립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92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시집으로 <사과꽃 편지>, <당몰샘>, <숲에 들다>, <두텁나루숲, 그대> 등이 있고 포토포엠에세이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가 있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