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누르는 사회

개그맨의 멘트에 대한 무관용의 칼날 거둬야
권력을 향한 풍자, 해학의 웃음에 너그러워야

 나는 웃음을 사랑한다. 나는 웃음 없는 강의를 제일 싫어한다. 가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외부 강사들이 강의를 하곤 하는데, 웃음이 없는 딱딱한 강의를 듣노라면 학생들도 내 수업을 들으며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반성하곤 한다.

▲ 김용국 정광고 교사

그래서 가급적 나는 내 수업시간에 아재 개그라도 동원해 웃음이란 양념을 버무리려 노력한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웃음 때문에 종종 옹졸한 내게 곤욕을 치르는 학생들도 있다. 명색이 국어교사랍시고 표정, 몸짓 같은 비언적 표현 형식 속에 담긴 의미 내용을 파악한답시고 곡해하여 애먼 사람 하나 잡는 것이다.

특히 곡해는 웃음에서 가장 많이 발생한다. 이때 선생님은 학생의 웃음이란 형식 속에 담긴 의미를 비웃음의 기호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나처럼 있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웃음은 우리 사회를 밝고 명랑하게 만드는 순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런 웃음이 엄숙주의, 근엄주의의 적으로 간주되었던 시대도 있었다.

철학자 강신주가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말했듯이 기독교가 인간과 사회를 무겁게 짓눌렀던 중세 시대가 그랬다. 중세 시대의 기독교도에게 있어 인간은 신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종교적 엄숙주의에 입각해서 경건함을 유지해야 했다.

이를 반영한 소설이 푸코의 「장미의 이름」이었다. 이 소설은 중세의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수도사의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웃음의 긍정적 가치를 언급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 수도사들을 연쇄 살인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중세의 웃음은 신에 대한 인간의 경멸로 간주될 만큼 죄악시 되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에서도 웃음으로 인해 한 유명 연예인이 정치인들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김제동이다.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회적 현안에 대해 약자의 편에 서서 입바른 소리를 곧잘 하는 그 경상도 사나이, 김제동이다.

그는 한 강연에서 군대 시절 경험담을 얘기하였는데, 군 시절 공연 사회를 보다 4성 장군의 아내를 아줌마라 불렀다가 영창을 갔다고 했다. 그런데 군 장성 출신인 새누리당 백승주 의원이 이를 군 명예를 실추시킨 발언이라며 김제동을 불러 국정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보수단체는 김제동을 고발한 상태다.

여기서 나는 김제동의 발언에 대한 진실성 여부를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웃음 제조를 천직으로 여기는 개그맨의 멘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용성을 고발하고 싶을 뿐이다.

▲ 방송인 김제동 ⓒ민중의소리 갈무리

물론 개그맨도 공인이기에 발언에 신중은 해야겠지만 웃음으로 먹고 사는 개그맨이 웃음을 위하여 과장된 허풍을 떤 것을 진실성 운운하며 마녀 사냥하듯 국정감사이니, 고발이니 하며 협박하다니 이는 어불성설이고 그 꾀죄죄한 심보가 한심스러울 뿐이다.

그의 과장된 허풍이 빚어낸 웃음이 성난 민심의 예봉을 무디게 하여 우리 사회의 긴장을 해소시킨다는 순기능은 팽개친 채 진실성을 빙자하여 행하는 한 진보 예능인에 대한 공격은 중세 시대의 마녀 사냥을 떠올리게 한다. 아찔하다.

나는 이를 보며 백 의원에게 거칠게 되묻고 싶다. 김제동의 발언이 군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했는데, 각종 방산 비리에 연루된 우리 군이 실추될 명예나 가지고 있느냐고. 백 의원과 보수단체가 진정으로 군 명예 실추를 걱정한다면 그의 손으로 방탄복, 헬기, 잠수함 등 각종 방산비리에 개입된 자들을 고발하고 국정감사장이나 청문회장에 불렀어야 옳다.

또한 검찰에게도 묻고 싶다. 김제동보다 훨씬 먼저 고발 접수된 우병우, 최순실, 차은택에 대한 수사에 진작 착수했느냐고. 만약 그리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그들의 진실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웃음에 그리 야박하지 않았다. 군신관계가 아무리 지엄했어도 임금도 술좌석에서는 신하의 농과 실수를 눈감아 주었다. 또한 강상죄가 아무리 엄하였다 해도 양반사대부들도 봉산탈춤이나 하회별신굿 탈놀이 같은 가면극이나 꼭두각시놀이 같은 인형극에서 행해지는 민중들의 양반사대부들에 대한 비방, 풍자에도 멍석말이 치도곤을 치는 대신 민중들과 함께 웃으며 못 본 채 했다.

이는 권위에 억눌려 사는 신하나 민중들의 감정 해소 분출구가 웃음이고, 그 웃음이 되려 통합의 접착제임을 왕이나 양반사대부들은 알고 있어서였다. 지금은 이런 우리 조상들의 너그러운 지혜가 절실히 그리운 때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웃길 줄 아는 사람은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일 때가 많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웃기는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당송 시대의 진중한 기존의 문체에서 벗어나 가벼운 주제를 짧고 감각적인 문체로 유쾌하게 풀어낸 패관소품체를 통해 날카로운 역설의 유쾌한 웃음을 선사했던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 박지원이 정조로부터 문체반정의 당사자로 지목되어 자송문을 요구받는 곤욕을 치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박지원이 끝내 반성문에 다름 아닌 자송문을 거부한 채 야인으로 숨어든 것도 어쩌면 억눌린 자들에게 주고픈 웃음의 카타르시스를 포기하기 않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볼 때 박지원은 중세 왕정의 엄숙주의, 근엄주의에 맞선 당대 최고의 웃음꾼이라 할 만하겠다.

21세기 벽두를 사는 우리는 웃음을 다시 중세의 감옥에 가둬서는 안 된다. 웃음이 없는 암울한 사회는 희망이 없다. 권력자를 향한 풍자와 해학의 웃음에 너그러운 똘레랑스 사회. 내가 학생들과 함께 살고 싶은 그런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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