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어느 봄날, 전남 담양군 남면 소쇄원 가는 길 옆, 지실(芝室)에서 나는 살았다. 가사문학관을 품고 있는 지실은 송강(정철)의 후손들의 마을이었다. 나는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송강 후손 중 한 분이 무상으로 빌려주었다는 그 집의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1층 슬라브 주택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산 아래 대밭까지 낀 500여 평 부지는 유적지를 복원하듯 정리하는 내겐 무척 넓었다.
그날도 나는 트랙터로 갈아엎은 마당 한 모퉁이에서 돌을 골라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대학 동기의 전화를 받았는데, "니 선생님 시집 나왔는데."라는 말을 들었다. 호미를 던져 버리고 컴퓨터를 켠 다음 인터넷 검색을 했다. 곽재구 시집 『와온 바다』(창비), 나온 지 한 달 남짓이 되었을까? 선생의 시는 고등학생일 때부터 읽어왔고 상당히 오랜 만에 나온 시집이었기에 얼른 보고 싶었다.
온라인서점에 주문할까 하다가 광천터미널 영풍문고로 전화를 했다. 한 권이 있었는데 나가고 없단다. 이번에는 금남로 변 충장서림에 전화를 하니 서너 권 가량이 있단다. 아마도 그날이 폐업 전 충장서림을 마지막으로 들른 날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충장서림에 있는 시집 네 권을 몽땅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순천대 곽재구 선생의 연구실로 전화를 걸었다. 무등산 자락을 휘감고 도는 버스가 충장사 입구를 지나 광주호 방면으로 달릴 즈음이었다. 선생은 내가 아는 핸드폰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몇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받으면 다행이고 아님 어쩔 수 없고, 그런데 신호가 두어 번에 전화를 받으시는 게 아닌가!
이만저만해서 광주에 다녀오는데, 광역시에 있는 선생님 시집을 품절시키고 오는 길이라고, 그런데 전부 네 권이라고.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 선생님 말씀은 이랬다. "니가 시집을 사러 광주에 다녀온 얘기가 (그 시집에 실린) 어떤 시보다도 더 시답다."고. 그리고 "그냥 집에 들어가지 말고 주막에 들러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가는 것이 어떠하냐"고.
해서 작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지실마을인데, 광주호 유원지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렇게 나는 광주호 유원지 중화요리집 <메이> 옆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주인 할머니가 내온 열무김치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저녁 장사 준비할 시간이 가까워진 '메이' 주방장이 잠시 다가와 한 잔을 비웠다.
그는 서울 강남의 유명 중화요리집에서 근무한 이력을 가진 실력 있는 요리사였다. 가끔 늦은 밤에 다리 하나를 건너 마실을 나오면 (동생이 사장인 식당 방 한 칸에 기거하던) 그는 그날 남은 식재료로 놀라운 안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의 나로서는 선뜻 구매할 수 없는 중국산 술을 내오곤 했다. 그런 술친구에게 답례로 따르는 술이 탁주 한 잔이라니. 그리고 시집 한 권을 선물했던가?
그가 떠나고 선생님의 시를 읽는다. 담담하다. 담백함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읽는 이의 감정을 흔들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시를 만나게 하는 담백이라고 하면 너무 모호한가? 그러다가 문득 한 구절을 발견한다. 갑자기 울컥, 눈시울이 젖는다.
#001.
생각한다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곽재구의 시 「사랑이 없는 날」 일부(『와온바다』, 창비, 2012.4.)에 수록.
지실마을 집에는 홍매화가 폈다 졌고 자목련도 그랬다. 바로 옆집 호남오매 중 하나라는 계당매도 그렇게 피었다 졌다. 그럼에도 눈물이 핑 돌게 만든 한 대목은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 가 아닌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 사이에'였다. 섬진강/지리산, 남/북이 아니고 그렇고 그런 두 개의 상점 간판 '사이'에서 울림이 왜 시작된 것일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설명할 수는 있지만 얘기가 길어질 거다. 그렇게 선생의 시집을 읽다가 서울에 있는 선생의 절친한 벗인 다른 선생님과 통화했던 기억이 있다. 그날 내가 이 시에서 받은 느낌을 뭐라고 설명한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해남과 진도 일원을 다녀온 이번 포토에세이의 제목은 "사이에 슬픔은 없는지"다.
한때 진도에서도 살았다. 몇 개월 되지 않는 말 그대로 한때였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 전북(남원)으로 거처를 옮긴 날이 2014년 4월 16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삿짐을 싣느라 정신이 없었고, 9시 30분쯤 진도대교를 건너고 있었을 거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의 조수석, 옆에 앉은 친구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진도 앞바다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다. 차가 목포를 지나 광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인가, 남원에 도착했을 때인가, 전원구조 소식을 들었다. 참 다행이라고, 오늘 수고했다고, 그렇게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보낸 기억이 있다.
그날 오후 이삿짐을 풀지도 못한 채 저녁의 고전공부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행 버스를 기다리는 곡성터미널 TV화면에서 참상을 목격했다.(1979년 박정희의 죽음을 처음 들었던 날이나거나,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처음 접한 순천의 해룡면 해장국집이라거나 그렇게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필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거니와 그날 그 시각 나는 어디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가, 그 충격이 결코 잊히지 않기에 그 순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4월 20일. 진도에서 내가 촬영한 사진 한 장에 매료된 현직 선생님 두 분과 진도를 가게 되었다. 고군면 오일시에서 진도읍으로 가는 길에서 촬영한 한 장의 사진. 야산을 가득 메운 산벚나무 꽃은 이미 진 상태, 진도에 남기고 온 짐을 챙겨오기 위해 가는 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왕 진도에 왔으니 한두 곳이라도 들르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날 새벽이던가,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을 오가며 실종자들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들이 청와대로 가자, 대통령을 만나 따지자며 진도읍에서 서울로, 청와대로 18번 국도에 올라 도보행진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접한 상태였다. 행진은 진도대교 앞에서 멈췄다고 했다. 라디오에서는 여행에 나선 분들에게 진도행을 자제해줄 것을 몇 차례나 알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그들이 진도대교 앞에 이르렀을 때 한 유가족이 자녀로 추정되는 시신이 수습되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팽목항으로 달려갔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비록 마저 싣지 못한 짐을 가지러 가는 길이지만 진도대교를 건너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오일시를 떠나 광주로 돌아오는 길, 진도대교 방향으로 신속히 달리는 앰뷸런스를 만났다. 몇 차례 양보했지만 앰뷸런스는 우리 일행이 탄 차와 몇 차례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달렸다.
#002.
#003.
순간 문득 떠오르는 그림 하나, 강원도 태백 광산촌의 화가 황재형의 <앰뷸런스>다. 이번엔 누굴까, 우리 아빠는 아니겠지? 탄광촌에서는 앰블란스 소리가 들리면 광부의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놀란다는데, 2014년 4월 20일, 세월호 참사 현장인 진도 팽목항을 출발했을 앰뷸런스가 진도대교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리던 풍경이 떠올랐다. 황재형 화백의 고향은 전남 보성이다. 한 3년은 막장에 들어가 탄을 캐는 광부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탄광촌에 머물며 그곳 풍경과 그 사람들을 캔버스에 담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탄광촌이 막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요. 서울이 막장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탄광촌이 막장을 상징화하지만, 나는 특정 장소의 특수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인간으로 서 있는 각자의 위치에서 느낄 만한 소외와 공허함을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황재형)
2016년 6월 4일. 다시 진도에 왔다. 후배의 차는 대교를 건너 진도읍으로 곧게 난 길을 달린다. 곧이어 왼편 길로 접어든다. '오일시'로 알려진 고군면 소재지로 가는 길, ‘보배섬’ 진도의 대표 축제인 '신비의 바닷길'로 가는 길이라고 하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진도에서 잠시 살았던 곳, 고군농공단지에 이르러 동화작가 윤기현 선생을 만났다. 윤기현 작가의 대표작은 「서울로 간 허수아비」, 그림으로 치면 자화상에 해당하는 동화다. 동행한 후배는 교과서에 수록된 선생님의 동화를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동화작가 윤기현은 지금 이곳에서 버섯농사를 짓는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는 표고버섯을 재배했는데, 지금은 양송이버섯을 재배한다. 어쩌다보니 일이 커져버려 동화를 짓는 일에 전념할 수 없게 만든 농사짓는 일, 동화작가이기 전부터 농부로 살아온 인생이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삼겹살에 노란 빛깔이 아름다운 울금막걸리를 마시면서 묵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튿날 아침,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든 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지난밤 나는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했는데, 아마도 새벽 다섯 시 무렵까지 거실에서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곤 했다. 나이 차가 서른 살이 넘는 두 사내가 나눈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오후 2시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는 작은 행사가 있다. 꼬마평화박물관 개관식이다. 암주인 법인 스님과의 인연도 있고, 하루쯤 일지암에서 묵을 계획으로 3일간의 연휴를 할애한 여행이었다. 오일시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진도읍을 지나 팽목항 방면으로 달리고 있다. 내게는 취재차 몇 차례 방문한 곳이고, 후배도 몇 차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오갔다고 했다.
2015년 2월 중순, 진도읍에서 팽목항까지 하루의 도보행진을 촬영한 일이 있다. 안산 분향소를 출발한 유가족과 시민들이 함께 걸었다. 행사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참가자들이 참 많았다. 그날 점심을 먹었던 '십일시'를 지나 팽목항으로 달린다.
18번 국도 2차선 가드레일에는 노란 깃발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가로수에 리본이 매달려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영암군농민회, 보성군농민회.. 하단에 참가 단체명들이 적힌 삼각형의 노란 깃발들을 따라 달린다. 그런데 간간이 길가 전신주에 매단 사각형의 펼침막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는데, 한 사람 한 사람, 300~400미터쯤 간격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름들, 아직도 차가운 물속에 있을 미수습 실종자들의 이름이 일정 간격으로 게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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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석 선생님], [양승진 선생님] 그리고 [허다윤]이 먼저였는지 [조은화]가 먼저였는지, 그렇게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안타까운 이름들이 일정 간격으로 전신주에 게시되어 있었다. 승용차가 [조은화]와 [허다윤] 사이를 달리는 동안이었을 거다. 조수석에 앉아 '저것 좀 보아' 운전석의 후배에게 뭔가를 설명하려던 나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은화란 이름과 다윤이란 이름 사이에서 쏟아진 눈물. 그 슬픔은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비록 하루였지만 이 길을 걷던 은화 엄마, 휠체어에 겨우 앉아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던 다윤이 엄마의 모습이 겹쳤다.
2015년 2월 14일. 어둠이 내린 팽목항의 행사장 무대에 오른 은화 엄마는 문규현 신부 곁에서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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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花樣年華'란 조금 풀어 정의하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절정의 순간'을 뜻한다. 팽목항에 게시된 펼침막에서 김사인의 시 <화양연화> 일부를 읽는다. 이곳에서 발견한 시귀가 아니었다면 나는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를 가장 빛나는 대목으로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 뒷부분을 새긴 펼침막을, 팽목항 등대 옆에서 만나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자연에 맞게 흘러가는 세월 사이에 만남이 있고 또한 이별이 있고, 그 '덧없음'과 '속절없음'에 당황하거늘,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 마음은 오죽할까?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김사인, 「화양연화(花樣年華)」후반부,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 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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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 베르제 강변의 몽티나크라는 도시, 한 소년이 기르던 개가 사라지자 온 마을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벽화를 발견한다. 바로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다. '수렵도' 쯤으로 불릴 이 벽화에도 솟대가 등장한다. 이렇듯 새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지상 인간의 염원을 하늘 어디쯤에 있는 것으로 믿는 절대자에게 전달하는 메신저로 인류 최초의 그림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새'라는 말은 '사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난데없는 질문에 후배는 당황한다. 땅의 바람을 하늘에 전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메신저, 새. ‘트위터’가 그렇고, 팟캐스트 '새가 날아든다'(새날)도 맥락이 닿아 있다.
고대 그리스 희극을 대표하는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가운데 <새>가 있다. 「새 Ornithes」(BC 414)는 '공상 희극'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아테네인들이 제국주의적 꿈에 사로잡혀 BC 415년에 시칠리아 항구도시 쉬라쿠사이를 함락하고자 불운한 원정에 나선 것을 풍자하는 정치풍자극으로 읽는다. 기원전 414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18년째 지속되던 해였다. "전쟁은 이제 그만~"을 바라는 시민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새들을 동원하여, 인간과 신의 소통을 막아버리는 장벽, 하늘과 땅 '사이에' 새들의 나라를 세운다. '구름뻐국나라'다.
이 작품 주인공들은 고향을 등지고 '평화의 땅'을 찾아간다. 논쟁으로 시끄러운 혼란한 현실을 등지고 주인공들은 본연의 인간을 찾고자 새로운 공동체를 실현할 새로운 국가를 세우러 간다. 간단치 않은 이민이다. 나라 국(國)의 부수 자는 큰 입 구(口)다. 국민들을 지키는 것은 나라가 할 일.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국민의 안전, 달리 말하면 생명을 지키는 문제인 안전에서 우리는 늘 전쟁 중이고, 그 기능을 해야, 나라다. 솟대 앞에서 폭풍처럼 쏟아지는 '강의'에 후배는 또 얼마나 황망했을까? 사이에 또 하나의 슬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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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인문의 향연> 편집주간 ugil70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