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어느 봄날, 전남 담양군 남면 소쇄원 가는 길 옆, 지실(芝室)에서 나는 살았다. 가사문학관을 품고 있는 지실은 송강(정철)의 후손들의 마을이었다. 나는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송강 후손 중 한 분이 무상으로 빌려주었다는 그 집의 방 한 칸을 얻어 살았다. 1층 슬라브 주택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산 아래 대밭까지 낀 500여 평 부지는 유적지를 복원하듯 정리하는 내겐 무척 넓었다.

그날도 나는 트랙터로 갈아엎은 마당 한 모퉁이에서 돌을 골라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대학 동기의 전화를 받았는데, "니 선생님 시집 나왔는데."라는 말을 들었다. 호미를 던져 버리고 컴퓨터를 켠 다음 인터넷 검색을 했다. 곽재구 시집 『와온 바다』(창비), 나온 지 한 달 남짓이 되었을까? 선생의 시는 고등학생일 때부터 읽어왔고 상당히 오랜 만에 나온 시집이었기에 얼른 보고 싶었다.

온라인서점에 주문할까 하다가 광천터미널 영풍문고로 전화를 했다. 한 권이 있었는데 나가고 없단다. 이번에는 금남로 변 충장서림에 전화를 하니 서너 권 가량이 있단다. 아마도 그날이 폐업 전 충장서림을 마지막으로 들른 날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충장서림에 있는 시집 네 권을 몽땅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순천대 곽재구 선생의 연구실로 전화를 걸었다. 무등산 자락을 휘감고 도는 버스가 충장사 입구를 지나 광주호 방면으로 달릴 즈음이었다. 선생은 내가 아는 핸드폰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몇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받으면 다행이고 아님 어쩔 수 없고, 그런데 신호가 두어 번에 전화를 받으시는 게 아닌가!

이만저만해서 광주에 다녀오는데, 광역시에 있는 선생님 시집을 품절시키고 오는 길이라고, 그런데 전부 네 권이라고.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 선생님 말씀은 이랬다. "니가 시집을 사러 광주에 다녀온 얘기가 (그 시집에 실린) 어떤 시보다도 더 시답다."고. 그리고 "그냥 집에 들어가지 말고 주막에 들러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가는 것이 어떠하냐"고.

해서 작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지실마을인데, 광주호 유원지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렇게 나는 광주호 유원지 중화요리집 <메이> 옆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주인 할머니가 내온 열무김치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저녁 장사 준비할 시간이 가까워진 '메이' 주방장이 잠시 다가와 한 잔을 비웠다.

그는 서울 강남의 유명 중화요리집에서 근무한 이력을 가진 실력 있는 요리사였다. 가끔 늦은 밤에 다리 하나를 건너 마실을 나오면 (동생이 사장인 식당 방 한 칸에 기거하던) 그는 그날 남은 식재료로 놀라운 안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의 나로서는 선뜻 구매할 수 없는 중국산 술을 내오곤 했다. 그런 술친구에게 답례로 따르는 술이 탁주 한 잔이라니. 그리고 시집 한 권을 선물했던가?

그가 떠나고 선생님의 시를 읽는다. 담담하다. 담백함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읽는 이의 감정을 흔들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시를 만나게 하는 담백이라고 하면 너무 모호한가? 그러다가 문득 한 구절을 발견한다. 갑자기 울컥, 눈시울이 젖는다.
 

#001.

생각한다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곽재구의 시 「사랑이 없는 날」 일부(『와온바다』, 창비, 2012.4.)에 수록.

지실마을 집에는 홍매화가 폈다 졌고 자목련도 그랬다. 바로 옆집 호남오매 중 하나라는 계당매도 그렇게 피었다 졌다. 그럼에도 눈물이 핑 돌게 만든 한 대목은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 가 아닌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 사이에'였다. 섬진강/지리산, 남/북이 아니고 그렇고 그런 두 개의 상점 간판 '사이'에서 울림이 왜 시작된 것일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설명할 수는 있지만 얘기가 길어질 거다. 그렇게 선생의 시집을 읽다가 서울에 있는 선생의 절친한 벗인 다른 선생님과 통화했던 기억이 있다. 그날 내가 이 시에서 받은 느낌을 뭐라고 설명한 것 같기는 한데. 어쨌든 해남과 진도 일원을 다녀온 이번 포토에세이의 제목은 "사이에 슬픔은 없는지"다.

한때 진도에서도 살았다. 몇 개월 되지 않는 말 그대로 한때였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 전북(남원)으로 거처를 옮긴 날이 2014년 4월 16일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삿짐을 싣느라 정신이 없었고, 9시 30분쯤 진도대교를 건너고 있었을 거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의 조수석, 옆에 앉은 친구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진도 앞바다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다. 차가 목포를 지나 광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인가, 남원에 도착했을 때인가, 전원구조 소식을 들었다. 참 다행이라고, 오늘 수고했다고, 그렇게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보낸 기억이 있다.

그날 오후 이삿짐을 풀지도 못한 채 저녁의 고전공부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행 버스를 기다리는 곡성터미널 TV화면에서 참상을 목격했다.(1979년 박정희의 죽음을 처음 들었던 날이나거나,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처음 접한 순천의 해룡면 해장국집이라거나 그렇게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필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거니와 그날 그 시각 나는 어디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가, 그 충격이 결코 잊히지 않기에 그 순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4월 20일. 진도에서 내가 촬영한 사진 한 장에 매료된 현직 선생님 두 분과 진도를 가게 되었다. 고군면 오일시에서 진도읍으로 가는 길에서 촬영한 한 장의 사진. 야산을 가득 메운 산벚나무 꽃은 이미 진 상태, 진도에 남기고 온 짐을 챙겨오기 위해 가는 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왕 진도에 왔으니 한두 곳이라도 들르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날 새벽이던가,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을 오가며 실종자들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들이 청와대로 가자, 대통령을 만나 따지자며 진도읍에서 서울로, 청와대로 18번 국도에 올라 도보행진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접한 상태였다. 행진은 진도대교 앞에서 멈췄다고 했다. 라디오에서는 여행에 나선 분들에게 진도행을 자제해줄 것을 몇 차례나 알리고 있었다. 나중에야 그들이 진도대교 앞에 이르렀을 때 한 유가족이 자녀로 추정되는 시신이 수습되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팽목항으로 달려갔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비록 마저 싣지 못한 짐을 가지러 가는 길이지만 진도대교를 건너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오일시를 떠나 광주로 돌아오는 길, 진도대교 방향으로 신속히 달리는 앰뷸런스를 만났다. 몇 차례 양보했지만 앰뷸런스는 우리 일행이 탄 차와 몇 차례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달렸다.
 

#002.

▲ 2014년 4월, 달리는 차 안에서 앞서 진도대교 방면으로 급히 달리는 앰뷸런스를 촬영했다. 이때만 해도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우리 정부의 대응이 이 정도로 막장일 줄은 몰랐다. 오늘은 2016년 6월 30일, 세월호특조위 활동이 강제로 종료되는 시점이다.


#003.

▲ 황재형 作. <앰뷸런스>(캔버스에 유채, 40x31cm) 이 작품은 명지대 유홍준 교수가 구입했다고 한다. 그의 답사기 2권에 이 그림에 얽힌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 것이므로 따로 소개하지 않는다.

순간 문득 떠오르는 그림 하나, 강원도 태백 광산촌의 화가 황재형의 <앰뷸런스>다. 이번엔 누굴까, 우리 아빠는 아니겠지? 탄광촌에서는 앰블란스 소리가 들리면 광부의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놀란다는데, 2014년 4월 20일, 세월호 참사 현장인 진도 팽목항을 출발했을 앰뷸런스가 진도대교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리던 풍경이 떠올랐다. 황재형 화백의 고향은 전남 보성이다. 한 3년은 막장에 들어가 탄을 캐는 광부생활을 했다. 그런 그가 탄광촌에 머물며 그곳 풍경과 그 사람들을 캔버스에 담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탄광촌이 막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요. 서울이 막장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탄광촌이 막장을 상징화하지만, 나는 특정 장소의 특수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인간으로 서 있는 각자의 위치에서 느낄 만한 소외와 공허함을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황재형)

2016년 6월 4일. 다시 진도에 왔다. 후배의 차는 대교를 건너 진도읍으로 곧게 난 길을 달린다. 곧이어 왼편 길로 접어든다. '오일시'로 알려진 고군면 소재지로 가는 길, ‘보배섬’ 진도의 대표 축제인 '신비의 바닷길'로 가는 길이라고 하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진도에서 잠시 살았던 곳, 고군농공단지에 이르러 동화작가 윤기현 선생을 만났다. 윤기현 작가의 대표작은 「서울로 간 허수아비」, 그림으로 치면 자화상에 해당하는 동화다. 동행한 후배는 교과서에 수록된 선생님의 동화를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동화작가 윤기현은 지금 이곳에서 버섯농사를 짓는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는 표고버섯을 재배했는데, 지금은 양송이버섯을 재배한다. 어쩌다보니 일이 커져버려 동화를 짓는 일에 전념할 수 없게 만든 농사짓는 일, 동화작가이기 전부터 농부로 살아온 인생이니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삼겹살에 노란 빛깔이 아름다운 울금막걸리를 마시면서 묵은 얘기를 나누었다.

이튿날 아침,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든 나는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지난밤 나는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했는데, 아마도 새벽 다섯 시 무렵까지 거실에서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들리곤 했다. 나이 차가 서른 살이 넘는 두 사내가 나눈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오후 2시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는 작은 행사가 있다. 꼬마평화박물관 개관식이다. 암주인 법인 스님과의 인연도 있고, 하루쯤 일지암에서 묵을 계획으로 3일간의 연휴를 할애한 여행이었다. 오일시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진도읍을 지나 팽목항 방면으로 달리고 있다. 내게는 취재차 몇 차례 방문한 곳이고, 후배도 몇 차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오갔다고 했다.

2015년 2월 중순, 진도읍에서 팽목항까지 하루의 도보행진을 촬영한 일이 있다. 안산 분향소를 출발한 유가족과 시민들이 함께 걸었다. 행사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참가자들이 참 많았다. 그날 점심을 먹었던 '십일시'를 지나 팽목항으로 달린다.

18번 국도 2차선 가드레일에는 노란 깃발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가로수에 리본이 매달려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영암군농민회, 보성군농민회.. 하단에 참가 단체명들이 적힌 삼각형의 노란 깃발들을 따라 달린다. 그런데 간간이 길가 전신주에 매단 사각형의 펼침막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는데, 한 사람 한 사람, 300~400미터쯤 간격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이름들, 아직도 차가운 물속에 있을 미수습 실종자들의 이름이 일정 간격으로 게시되어 있었다.


#004.

▲ 국도 18호선, 진도 십일시를 지나 팽목항으로 가는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에는 어떤 슬픔이 있다. 돌아오는 길, 눈물을 흘리던 지점을 찾아 자세히 바라본다. [하다윤: 마지막 한 사람까지 가족의 품으로, 세월호남문농성장]


#005.

▲ 그리고 길 왼편의 논을 바라본다. 보리를 심었을까, 밀을 심었을까, 수확은 했을까? 어쨌든 모내기를 위해 수확한 작물의 줄기를 불태운 흔적이 남아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 특히 미수습자 가족들의 속도 저와 같이 새까맣게 탔을 것이다.

[고창석 선생님], [양승진 선생님] 그리고 [허다윤]이 먼저였는지 [조은화]가 먼저였는지, 그렇게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안타까운 이름들이 일정 간격으로 전신주에 게시되어 있었다. 승용차가 [조은화]와 [허다윤] 사이를 달리는 동안이었을 거다. 조수석에 앉아 '저것 좀 보아' 운전석의 후배에게 뭔가를 설명하려던 나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은화란 이름과 다윤이란 이름 사이에서 쏟아진 눈물. 그 슬픔은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비록 하루였지만 이 길을 걷던 은화 엄마, 휠체어에 겨우 앉아 시종일관 눈을 감고 있던 다윤이 엄마의 모습이 겹쳤다.

2015년 2월 14일. 어둠이 내린 팽목항의 행사장 무대에 오른 은화 엄마는 문규현 신부 곁에서 절규했다.


#006.

▲ 2015. 2. 14. 안산분향소를 출발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종착지인 팽목항에 이르는 마지막 날 도보 행진을 하고 있다. 맨 왼쪽아 조은화 양의 어머니, 오른편 휠체어에 앉은 허다윤 양의 어머니다.


#007. #008.

▲ 2015년 1월 26일에 경기도 안산을 출발한 이들은 19박20일 동안 500여 km를 걸어서 팽목항에 이르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이 2월 14일(토), 연인에게 사랑의 의미로 초콜릿을 선물하는, 발렌타인데이였다. 초콜릿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실랑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며 웃음을 지었을 부모님들에게는 너무나 마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009.

▲2016년 6월 5일, 분향소를 나와 분향소 입구 솟대 아래에서 후배와 이야기를 나눴다. 후배도 작년 2월 이곳에 왔었노라고. 해서 당시 촬영한 사진을 찾아보았다. 있다. 후배와 내가 만난 것은 지난 봄이었다. 그는 주말을 이용해 세월호 집회에 참석하고 필요한 자리에서 자원봉사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날도 팽목항에 먼저 도착하여 행사준비를 돕고, 마침내 팽목항에 도착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김광진 의원(당시)이 옆에 있었다는 얘기가 떠올라 자세히 살피니, 김 전 의원도 솟대 아래에 서서 촬영하고 있다. 당시에는 그저 행사 참가자1, 2에 불과했을 것인데, '인연'이란 참 묘하다. 이번 여행 첫날인 6월 4일, 광주 포충사 부근의 빛고을공예창작촌(놀부마을)에서는 "잘 묵고 잘 노세"라는 행사가 있었다. 거기에 초대손님으로 김광진 의원이 참가했고, 후배와 나 광주의 지인들은 김광진 전 의원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010.

▲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따뜻한 밥을 해서 같이 먹고 싶다. 그저 한 끼면 충분하다. 하루 세 끼 중 한 끼도 함께 나누지 못한 날이 적지 않았기에.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을 곧잘 하면서 살아간다. 끼니를 때우기 힘들던 시절이 지났음에도 "밥은 먹었고"라고 묻는 인사와 거기서 거기, 그렇고 그런 인사다. 그러나 그 밥 한 끼를 함께 먹는 일이 죽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으로 애달음으로 남을 수 있음을 생각해본다.

 

#011.

▲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소식이 들린다. 둘째딸 백민주화 님(31)은 아버지가 깨어나실 때까지 이 나라에 머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네덜란드로 돌아가야 했다. 지난 1월 네델란드 중앙역에서 그녀는 1인 시위를 했다. <국민 앞에서 사과하라> 지난 3월 8일,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88)는 뉴욕시청과 유엔본부에서 열린 회견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을 담지 못한 합의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세월호 진상 규명과 온전한 선체 인양을 바라는 집회가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왜 이래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나라 밖에서 나라 밖에다 호소해야만 하는가? 팽목항 등대로 가는 방파제에서 여러 종의 펼침막을 만난다. 영어 sunken은 '침몰한', '가라앉은'을 뜻한다. The sunken South of Korea다.

#012.

#013.

▲ 팽목항, 170미터 길이의 방파제에는 기억의 벽이 조성되어 있다. 동화 작가들의 주도로 2014년 11월 14일부터 시작한 추모 타일 그리기 행사에는 서울, 안산, 진도,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등 전국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이 행사는 참가자들이 11㎝×13㎝의 타일 위에 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써서 제작했다.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에 마무리된 이 기억의 벽에는 6천여 장의 타일이 전시되어 있다. '은화야 다윤아' 여섯 개의 글자가 아프게 다가온다. 타일 하나하나를 살피고 촬영하느라 한 시간 이상을 썼다. 한 편의 서사시다. 오뒷세우스는 무려 20년 만에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다. 9명의 미수습 실종자들도 속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014.

▲ [약속할게요. 잊지 않겠다고 진실을 밝히겠다고_리멤버0416해남] 천에 새긴 글씨는 아직 또렷한데, 색이 바란 천은 본래가 노란색이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2년 넘게 이곳에 게시되어 있었으리라. 그동안 숱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아직도 세월호는 인양조차 되지 않았고, 기약하기도 쉽지 않다.


#015.

'화양연화花樣年華'란 조금 풀어 정의하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절정의 순간'을 뜻한다. 팽목항에 게시된 펼침막에서 김사인의 시 <화양연화> 일부를 읽는다. 이곳에서 발견한 시귀가 아니었다면 나는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를 가장 빛나는 대목으로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 뒷부분을 새긴 펼침막을, 팽목항 등대 옆에서 만나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자연에 맞게 흘러가는 세월 사이에 만남이 있고 또한 이별이 있고, 그 '덧없음'과 '속절없음'에 당황하거늘,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 마음은 오죽할까?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김사인, 「화양연화(花樣年華)」후반부,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 1.)에서


#016.

▲ 진도 팽목항 세월호 분향소 입구에 설치된 솟대. 아홉 마리의 새들이 앉아 있는 나무 뒷면에 흰 글씨로 <2015. 2.4. 실종 9인의 빠른 귀환을 기원하며~ _솟대 작가 윤정귀 작>이라고 적혀 있다.


#017.

1940년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 베르제 강변의 몽티나크라는 도시, 한 소년이 기르던 개가 사라지자 온 마을을 찾아 헤매다 우연히 벽화를 발견한다. 바로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다. '수렵도' 쯤으로 불릴 이 벽화에도 솟대가 등장한다. 이렇듯 새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지상 인간의 염원을 하늘 어디쯤에 있는 것으로 믿는 절대자에게 전달하는 메신저로 인류 최초의 그림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새'라는 말은 '사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난데없는 질문에 후배는 당황한다. 땅의 바람을 하늘에 전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메신저, 새. ‘트위터’가 그렇고, 팟캐스트 '새가 날아든다'(새날)도 맥락이 닿아 있다.

고대 그리스 희극을 대표하는 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가운데 <새>가 있다. 「새 Ornithes」(BC 414)는 '공상 희극'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아테네인들이 제국주의적 꿈에 사로잡혀 BC 415년에 시칠리아 항구도시 쉬라쿠사이를 함락하고자 불운한 원정에 나선 것을 풍자하는 정치풍자극으로 읽는다. 기원전 414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18년째 지속되던 해였다. "전쟁은 이제 그만~"을 바라는 시민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새들을 동원하여, 인간과 신의 소통을 막아버리는 장벽, 하늘과 땅 '사이에' 새들의 나라를 세운다. '구름뻐국나라'다.

이 작품 주인공들은 고향을 등지고 '평화의 땅'을 찾아간다. 논쟁으로 시끄러운 혼란한 현실을 등지고 주인공들은 본연의 인간을 찾고자 새로운 공동체를 실현할 새로운 국가를 세우러 간다. 간단치 않은 이민이다. 나라 국(國)의 부수 자는 큰 입 구(口)다. 국민들을 지키는 것은 나라가 할 일.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국민의 안전, 달리 말하면 생명을 지키는 문제인 안전에서 우리는 늘 전쟁 중이고, 그 기능을 해야, 나라다. 솟대 앞에서 폭풍처럼 쏟아지는 '강의'에 후배는 또 얼마나 황망했을까? 사이에 또 하나의 슬픔이 있다.


#018.

▲ 2014년 3월 26일 진도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촬영한 사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직후 발행한 잡지 『인문의 향연』 창간준비호의 표지사진으로 사용되었다. 구름이 낙하선처럼 보였다. 배는 침몰하는데 속수무책인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사진에 어떤 바람을 실었던 것 같다.

/글.사진: <인문의 향연> 편집주간 ugil703@hanmail.net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