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칠갑한 <곡성>의 잔혹한 곡소리, 지겹다!

나홍진 감독, <추격자>의 잔혹한 공포에 바르르 떨며 식겁했고, <황해>의 맹렬한 분노에 놀라면서도 통쾌했으며, <곡성>의 악마가 펼치는 핏빛 저주가 지겨웠다.

내 영화인생에서 가장 공포스런 영화를 꼽으라면 <추격자>다. 그 살인마가 그저 살인을 하는 게 아니라 살인을 즐기는 걸 실감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보는 동안 당장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치지 못하고, 그 영화의 마력에 사로 잡혀서 내 가슴에 난도질을 당했다.

▲ 영화 <곡성> 포스터.

그 공포가 무려 10여 일을 괴롭혀서 혼 줄이 났다. 이토록 격렬한 작품이 그의 첫 작품이라는 게 더욱 놀라웠다. 그의 영화는 모두 피칠갑한 장면으로 넘치지만, 그래도 <황해>는 ‘이유 있는 핏빛’이다.

그래서 작품성도 높지만, 스토리도 탄탄하고 긴박감도 좋아서 대중재미도 높았다. 특히 김윤석과 하정우의 조선족 동포 역할이 너무나 실감나고 그 굵은 남성미가 멋졌다.(지금까지 만난 그들의 캐릭터들 중에서, 김윤석도 최고이고, 하정우도 최고이다.)

나에게 한국영화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지나치게 잔혹하지만, 그런 <황해>의 매력에 약간의 두근거림을 안고서 <곡성>을 만났다. 실망했고, 그 막무가내 핏빛이 지겨워서 서너 번이나 도중에 뛰쳐나오고 싶었다.

주인공 곽도원과 박수무당 황정민 그리고 꼬마소녀 김환희의 연기가 좋았지만, 감동적이라거나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칭찬할 만한 게 하나도 없으니, 피칠갑한 핏빛과 날카로운 괴성에만 시달리고 말았다. 기분을 잡친 정도가 아니라, 영화에게 으스스한 저주만 뒤집어썼다.

이 영화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았으나, 영화를 이야기한 지 너무 오래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앞 영화 <황해>의 명망을 등에 업고 <곡성>을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이야기꾼들이 많을 듯해서 “<곡성>은 나쁜 영화다!”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사명감이 솟구쳤다.

실은 할 이야기도 별로 없다. 70시절에 어린 소녀에게 깃든 악령을 내쫒는 <엑소시스트>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엑소시스트>는 선과 악이 분명한데, <곡성>에는 선과 악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작품성이 높은 영화는 대체로 선과 악이 애매하고 이중삼중으로 겹쳐들면서 삶의 리얼리티를 북돋우고 생각할 꺼리를 주는데, 이 영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초점이 흐려지고 맥없이 복잡하게 비비꼬여 든다.

작품성이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감독의 허세가 지나쳐서 감독도 수렁에 빠지고 관객도 어지러운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막무가내로 핏빛만 난무하면서, 죽도 밥도 아닌 잡탕 스릴러로 추락해 버린다.

훌륭한 <황해>에 비하면 감독이 스스로 교만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졸작이다. <황해>에 주눅이 든 평론가와 관객은, 감독이 교만과 허세의 수렁에 빠진 걸 눈치 채지 못하고, 그 교만과 허세에 무슨 의미심장한 깊은 뜻이 있다는 듯이 서로 숨바꼭질하며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반짝이는 게 모두 금덩어리가 아니듯이, 좋은 감독이 항상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다. <황해>는 좋은 작품이지만, <곡성>은 나쁜 작품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로테스크한 작품은, 작가 스스로도 어지럽거니와 평론가들은 더욱 어지러운 데다가 자기 과시에 헛물까지 켜는 주접을 부리기 일쑤이다.

그러니 일반 관객은 그들의 어지러운 현란함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다.(아래 ‘피카소와 <님포매니악> 그리고 광주 비엔날레’를 참고.)

감독이 아무리 잔혹한 장면에 일가견을 갖고 있다지만, 이토록 막무가내 피칠갑한 작품에만 매달리는 건 왜 일까? 그가 어떤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으면서 보여준 광기어린 눈빛이 ‘천재의 눈빛’인지 ‘미치광이의 눈빛’인지 헷갈렸다.

<곡성>으로, 그에게 실망한 걸 넘어서서 위험하다는 염려가 들었다. 그 잔혹미에 대한 미감은 김기덕이나 박찬욱만으로도 버거운데, 이젠 나홍진까지 이 나쁜 반열에 끼어들었다.

나의 영화이야기에서 박찬욱의 수려한 그로테스크와 김기덕의 뒤틀린 그로테스크를 비난했다. <곡성>이 보여준 막무가내 그로테스크에서, 나는 김기운의 <악마를 보았다>에서 만난 저열한 그로테스크를 보았다.

나는 이들의 그로테스크를 매우 위험하게 여긴다. 제발이지, 분노의 대상을 제대로 잡고 제대로 박치기해라. 분노의 대상을 제대로 잡아도 제대로 박아도, 그 악마들은 좀비처럼 생존력이 너무나 질기다. 언제까지 어쭙잖은 자기 우월감에 빠져 재능을 탕진만 하려는가!

<예고편> http://movie.naver.com/movie/bi/mi/mediaView.nhn?code=121051&mid=30406#tab

이런 흉측한 작품의 무대를, 왜 또 하필이면 우리 전라도 곡성으로 잡았는가도 신경질이 나는데, 그 사투리마저도 개떡을 친다.

정치인들의 잘못으로, 전라도가 이토록 구석지에 몰려서 뚜껑이 튀어 오르는데, 왜 영화까지 나서서 이리 개지랄을 떠는 거야! 하기사 이창동 감독의 <밀양>을 본 밀양군수가 “우리 밀양이 볼만한 곳이 얼마나 많은데, 영화를 어떻게 그리 이상하게 만들 수 있나!”며 분노했다는데, 곡성군수는 “영화<곡성>에 관객이 많이 몰려서, 섬진강변의 아름다운 우리 곡성에도 손님들이 많이 몰려들기를 바란다”며 역발상을 촉구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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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예술 -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잔혹미는 서양문명의 극단적 병폐

@피카소와 [님포매니악] 그리고 광주 비엔날레와 아시아 문화전당 /  2015년 5월

피카소가 그린 ‘알제의 여인들’이 미술품 경매에서 1968억 원으로 세계 최고가격으로 팔렸단다. 난 피카소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걸 넘어서서 싫어한다. 공짜로 준다고 해도 거절할 그런 그림을, 왜 그리 엄청난 거액을 주고 살까?

그 그림을 산 사람은 그렇게 거액을 줄 정도로 좋아하기 때문일까? “그런 그림을 좋아할 리가 있겠어? 워낙 유명한 화가라 투기로 샀겠지?” 그런데 “피카소는 왜 그리 유명할까?”

▲ 영화 <님포매니악> 포스터.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200여 년 동안 지구촌을 온통 휩쓸며 승승장구하던 유럽문명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러 대량실업의 공황과 대량학살의 전쟁이라는 자기 파괴적인 문명의 구렁텅이에 빠져 들었다.

그 암울한 시대는 슈펭글러가 가히 ‘서구의 몰락’을 예견할 만한 시대상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선언했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고, 프로이드는 무의식에 담긴 ‘인간의 광기’를 드러냈다.

이런 시대상을 예술가들의 예민한 감성에 포착되지 않을 리 없다. 이른바 현대예술이다. 그래서 1968년에 젊은이들은 “모든 금기를 금지한다!”며 그 동안 서양문명에서 금기로 여기던 수많은 장벽에 망치를 들고서 ‘문화혁명’을 외쳤다.

그 동안 문명은 ‘빛과 어둠·남자와 여자·이성과 감정·영혼과 육체·필연과 우연·일과 놀이’에 ‘선善과 악惡을 몰아치며 부당하게 폭행하였다.

이 모든 것에 저항하는 운동들을 모두 아울러서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피카소는 그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가운데에서 우뚝 솟았다. 그래서 그는 유명하다.

이렇게 그의 유명세에는 공황의 대량실업과 전쟁의 대량학살의 핏빛 수렁이 깔려있고, 그 문명의 폭행에 저항하는 1968년의 치솟는 분노가 서려있다. 그 1968년을 되새기려고 1968억 원에 팔린 걸까?

우연에 기댄 독설이지만, 그야 어떠하든 엄청난 가격에 팔린 그 그림은 황금빛에 찬란한 보물이라기보다는 핏빛에 젖은 문명의 폭행을 상징한다. 현대예술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출발점이다. 그러니까 현대예술은 문명의 폭행에 저항하고 그 폭행에 시달리는 서민을 감싸주어야 한다.

이러한 현대예술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이 세상을 바꾸어낸 커다란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잘못된 수렁을 빠져들어서 더욱 깊이 병들어 가고 있다. 그 잘못된 수렁의 뿌리는 2가지이다.

하나, 서양문화의 뿌리인 ‘대립 존재론’에서 비롯한 ‘선과 악’의 극렬한 대립으로 극단적인 자기집착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문명의 잘못된 자기집착을 닮아가고 있다.

둘, 극단적인 자기집착에서 나온 그로테스크한 상상을 창조성으로 착각하고 문란과 퇴폐로 치달으며, 그걸 ‘천재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찬양한다. 이러한 현대예술의 ‘천재와 예술’은 2가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동쪽, 그 ‘천재와 예술’이라는 우상에 비열한 지식인들까지 끼어들어서 허세와 허영으로 으스대며 99%에게 등을 돌리고 1%의 적과 동침하고서 세상을 속이고 주눅을 준다. 그 잘못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게 ‘피카소 그림의 1968억 원’이다.

(피카소가 그렇게 의도한 것이 아니니까, 피카소의  잘못은 아니다. 낸시랭은 그렇게 의도하는 것 같아서 상당히 잘못 가고 있어 보이는데, 낸시랭이 대중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런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으니 더 지켜봐야겠다.)

황금빛 돈잔치에 불나방처럼 모여들어서 누구는 주인공이 되어 떵떵거리고 으스대며 누구는 주변이 되어서 떡고물을 주워 먹는다. 그러니까 그 1968억 원은 지지를 받아야 할 서민에게서 멀어지고 ‘적과 동침’한 몸값인 셈이다.

이에 서민은 한 쪽으론 그런 문화예술을 뒤받침하는 '돈과 권력'에게 폭행당하고 멸시받으며, 다른 한 쪽으론 그 황금빛 돈잔치에 부러워하고 주눅든다.

서쪽, 이창동 작품처럼 깊은 슬픔의 리얼리즘으로 지나치게 무겁고 음울하거나, 김기덕 작품처럼 극렬한 분노로 저항하며 기괴하고 어지럽고 메스껍고 잔혹엽기로 악다구니 쓰고 박치기한다.

그 어느 쪽이든 감당하기 힘들다. 그래도 이창동 쪽은 힘들더라도 깊은 슬픔의 감흥이 있어서 겨우겨우 견디며 만나지만, 김기덕 쪽은 힘들 뿐만 아니라 진저리까지 치기 때문에 아예 회피한다.

영화이야기를 할 작품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피카소 그림 소식에 문득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과 <안티 크라이스트>가 떠올랐다. 피카소 그림처럼, 현대예술의 평단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한 걸작이라며 그의 의미심장한 문명비판과 풍자를 극찬한다.

그의 작품은 서쪽으로 간 이창동과 김기덕의 문제점을 둘 다 갖고 있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만난 깊은 슬픔의 리얼리즘에 감동하고, <도그빌>에서 파격적인 주제를 참 독특한 무대에 담아낸 연출에 반했다.

그런데 <안티 크라이스트>와 <님포매니악>은 완전히 김기덕 쪽이어서 역겨웠다. <안티 크라이스트>는 자연산천이 '사탄의 교회'라며 극렬한 우울증을 엽기적인 폭행과 섹스로 인간을 저주하고, <님포매니악>은 여자의 ‘섹스 중독증’을 넘어선 님포매니악을 앞세워서 쌔디즘과 마조히즘의 폭행을 풍자하면서 문명의 폭압에 도전하고 해체하려고 한다.  인간 자체를 악마로 증오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처방하고 대응하는 것은 오히려 그 폭행자를 닮아가는 자기집착이다. 그걸 평단에서는 걸작이고 천재라며 찬양한다.

극단적인 '대립존재론'의 극렬한 자기집착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병이 더욱 깊어가고 그 잘못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지식인들은 그 병을 고치고 그 잘못을 벗어날 대안을 마련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병폐와 잘못을 추앙하고 흉내 내면서 과장하고 과시한다. 잘못된 현대예술을 꾸짖기는커녕, 인간사회를 또 다른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래서 나는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김기덕의 작품을 비난하고 회피하며, 박찬욱의 작품에 놀라면서도 동조하지 못하며, 이창동의 작품은 훌륭하지만 부담스럽고 힘들다.

그리고 육상효의 <방가? 방가!> <강철대오>와 이한의 <완득이> 같은 블랙코메디를 매우 좋아하고 높이 평가한다.

<예고편>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VideoView.do?movieId=71418&videoId=44704&t__nil_main_video=thumbnail

동쪽으로든 서쪽으로든, 현대예술이 서민에게서 너무나 멀어졌다는 게 공통점이다.(영화처럼 대중성이 강한 예술분야마저도, 현대예술에 몰입된 유럽의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은 영화는 거의 대부분이 관객이 모이지 않는다.) 이게 현대예술의 가장 큰 잘못이다.

그런데 광주 비엔날레가 그 병폐와 잘못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이지 않고 혈세만 ‘밑 빠진 독’에 하염없이 부어넣고 있다. 아시아 문화전당은 어찌 될까? 제발이지 비엔날레의 쌍둥이가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현대예술을 버리든지, 아니면 현대예술의 병폐와 잘못을 극복할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그 초점은 ‘건전한 시민의 생활예술’이다. 그런데 그 병폐와 잘못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술이라는 허울아래 감쳐둔 ‘자기 밥그릇’에만 매달려 있다. 통탄스럽다.

※ 알림 : 그 동안 ‘2주에 한 번 꼴’로 제 영화이야기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데 피치 못할 개인 사정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꼴’로 제 영화이야기를 이끌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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