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째 배와 함께 수장된 진실

질문과 성찰 통해 불의 극복해야

다시 또 벚꽃이 피었다. 남도의 섬진강 십리 허에도, 영암 월출산 자락에도, 한강물 남실거리는 서울 여의도 윤중로에도 연분홍 꽃 잔치가 한창이다. 사람들은 나라꽃도 아니련만 벚꽃 흐드러진 길을 걸어야만 비로소 이 나라의 봄을 껴안는다. 하긴 꽃에 붙는 사상이 어찌 꽃의 탓일까만.

▲ 김용국 정광고 교사.

하지만 바람결에 하롱하롱 떨어져 날리는 이 꽃잎을 보며 애달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떨어지는 꽃잎들이 가슴 속에 차곡차곡 켜켜이 쌓이는 사람들이 있다. 꽃잎들이 자식으로 비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꽃잎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다.

2014년 4월 16일. 이 땅을 수놓은 벚꽃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학여행으로 들뜬 여린 삼백 여 꽃잎들은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 세월호와 함께 진도 앞바다 시퍼런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후 두 해가 속절없이 흘렀다. 배는 진실 함께 수장되어 있다.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시신은 아홉 구나 된다. 생떼 같은 여린 죽음들을 목도하고도 관료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명리 보전에만 급급하다. 탐욕의 세월호도 추하고, 부패한 나라도 추할 뿐이다.

이 땅이 너무 추해서일까. 벚꽃은 또 어김없이 여린 꽃잎들을 내밀어 이 나라 골골을 연분홍으로 치장한다. 벌써 잊었을까. 사람들은 그 꽃 대궐 아래서 젊음과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가족들의 행복과 안녕을 빈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이 각기 하나 씩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망각이요, 원하지 않는 것은 철학이다.

정치가들은 국가의 무능과 부패를 국민들이 머릿속에서 빨리 잊기를 바란다. 그것이 어디 4ㆍ16 세월호 참사뿐이랴.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 고문치사 사건, 시민 학살 사건, 용산 화재 참사 등도 그 중 하나다. 여린 넋들은 꽃잎처럼 바다로 떨어졌건만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등은 흐지부지되었고, 꼬리 자르기식 수사로 진실을 호도하며 얼른 잊혀 지길 바랄 뿐이다.

▲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지난해 4월15일 전남 진도군 앞바다 사고 해역을 찾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광주인

정치가들은 또한 국민들이 철학하는 것을 싫어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나를 둘러 싼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이전과는 다르게 사물들을 보게 하는 눈을 갖게 한다.

왜 어린 넋들은 어른들이 지켜보는 상황 속에서 죽어야만 했을까?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은 생명보다 우월한 가치인가? 산 자들이 죽은 자들에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예는 무엇일까? 하지만 정치가들은 국민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미 조제된 지식으로 우민답게 조용히 살아가길 원한다. 지금까지 교육과정에서 철학이 등한시 되어 온 것도 군사독재의 우민화 정책의 한 발로일 것이다. 독재정권에겐 국민들의 침묵이 미덕이었을 것이다.

나는 교정의 흐드러진 벚꽃을 보며 철학하는 국민들을 꿈꾼다.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철학이 뭐 별건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질문하고 성찰하는 것이 철학이 아닐까.

▲ 세월호 참사2주기인 지난해 4월 15일 사고해역을 찾은 유가족. ⓒ광주인

김구 선생은 문화적으로 융성한 나라를 꿈꿨지만, 나는 부조리한 시대를 종결시키기 위해선 철학적으로 융성한 나라를 꿈꿔 본다. 안정과 고요의 평온을 깨고 나와 내 주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할 때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철학은 나와 우리를 지켜주는 튼튼한 버팀목이자 보루가 되는 것이다.

반도 남녘의 사월은 엘리엇의 사월보다 잔인하고 생채기도 깊다. 벚꽃은 저렇게 여전히 바람에 분분히 흩날리건만 여린 꽃잎들의 한 맺힌 낙화는 우리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우리 학교 고2들이 제주도 수학여행을 배 대신 비행기로 왕복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불의한 것을 피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불의한 것을 망각하지 말고,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성찰을 통해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사월의 여린 벚꽃을 보며 얻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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